EP.119
“딱 보니까 또 크로한테 시비 걸고 있는 모양인데. 그냥 갈 길 가지?”
“하. 그러는 네놈이야말로 우리 사이에 끼어들지 말고 꺼지는 게 어때?”
저기 얘들아.
싸우는 건 좋은데 말이지.
남정네들끼리 왜 나를 사이에 두고 그러는 거니?
그리고 특히 그레인저 이 자식아.
어떻게 얘기를 해도 표현을 그딴 식으로 할 수가 있는 건지 궁금할 정도다.
우리 사이에 끼어들지 말고 꺼지라니. 누가 들으면 우리가 사랑싸움이라도 하고 있던 걸로 착각하겠네.
아무튼 이대로 놔뒀다간 진짜 싸움으로 번질까 봐 어쩔 수 없이 중간에 끼어들어 둘을 말렸다.
“일단 둘 다 진정하고···.”
“넌 빠져있어.”
“크로. 나한테 맡겨.”
진짜 돌아버리겠네.
레이어드 저 자식은 뭘 믿고 맡기란 듯이 얘기하는 건데. 지금 네가 실시간으로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단 걸 눈치채란 말이야.
물론 저 두 사람은 원작에서도 성격이 원체 맞지 않아 견원지간으로 유명하다.
말하자면 선의의 라이벌이 아니라 진짜 죽고 못 사는 앙숙에 가까운 사이다.
문제가 있다면 오직 하나. 원작과는 달리 지금은 계속 둘의 중간에 내가 끼어있다는 것뿐이다.
내가 걱정하는 건 지금 당장보다도 이러다가 시간이 지나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나도 엮여버리지 않을까 훗날이 걱정되었다.
작중 시점이 후반으로 접어들 때면 두 사람이 싸울 때마다 그 여파는 매우 크게 퍼져나간다.
그걸 나 혼자서 전부 감당하고 수습하라고?
생각만 해도 정신이 아찔해지며 눈앞이 어두워지는 끔찍한 미래였다.
절대 그렇게 되도록 놔둘 수는 없다.
따라서 지금부터 초기에 확실히 진압해 내가 연관되지 않도록 제지할 필요가 있었다.
“어이 촌뜨기. 좋은 말로 할 때 당장 꺼지는 게 좋을 거다. 나중에 괜히 울고불고 짜지 말고.”
“그건 내가 할 말이야. 생긴 건 계집애처럼 생겨선 하는 짓도 남자답지 못하군.”
“···뭐?”
젠장. 큰일이다.
하필 레이어드가 상대의 가장 큰 역린을 건드려버리고 말았다.
그레인저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다름 아닌 여자처럼 생겼다 혹은 곱상하게 생겼다며 외모를 언급하는 것이다.
저 말을 들으면 즉시 스위치가 켜져서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광견병이 도진 것처럼 말 그대로 개지랄을 떨며 무슨 수를 써서라도 상대에게 보복을 가하려 할 정도다.
역시 내 우려대로 이미 그레인저의 시선에 나는 깔끔하게 잊혀진 지 오래였다.
놈은 새빨간 삼백안으로 오로지 레이어드만을 응시하며 무섭게 노려보았다.
“방금 뭐라고 했냐? 다시 한번 말해 봐.”
“생긴 것도 하는 짓도 계집애답다 했는데.”
“···좋아. 무슨 뜻인지 잘 알겠어.”
잠깐만. 설마 저 녀석 여기에서 마법을 사용할 생각은 아니겠지?
아무리 빡쳤다 하더라도 그 정도로 사리 분별을 못 하지는 않으리라. 아까 시험관이 경고했던 대로 함부로 마법을 사용하면 부정행위로 제적까지 당할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하냐. 차라리 바락바락 분노를 터뜨리면 몰라도 저렇게 얌전하니 오히려 폭풍전야처럼 더 불길하게 느껴졌다.
설마 아니겠지 싶던 와중 잠시 후 녀석의 주변에서 느껴지는 미약한 마력.
화들짝 놀라 주변을 살펴보았으나 아직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했다.
아무래도 마력 감지에 민감한 내가 먼저 알아차린 모양이지만 결국 이대로면 모두에게 들키는 것도 시간문제다.
애초에 이런 공개적인 장소에서 마력을 방출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였다. 마법을 사용하겠다는 선전포고나 다름없으니까.
괜히 근처에 있던 시험관이 알아차리기라도 한다면 큰일이다. 녀석이 쌤통 당하는 거야 나쁘지 않지만 나한테까지 불똥이 튀길지도 모르니 아예 변수는 차단하는 편이 좋았다.
결국 하는 수 없이 그레인저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경고했다.
“야···! 일단 진정해! 그러다 시험관한테 들키면 어쩌려고!”
“방해하지 말고 꺼져.”
“너 이러는 거 걸리면 제적당한다니까!?”
“그럼 나보고 어쩌라고. 저 새끼가 한 짓을 그냥 보고서 참고 넘어가란 거냐?”
아니 애초에 그렇게 화낼 일도 아니잖아. 다른 사람이었으면 칭찬으로 받아들였어도 이상하지 않은 말이었는데.
그래도 이성이 완전히 날아간 건 아니었는지 마력을 갈무리하긴 했지만 여전히 살벌한 분위기는 해소되긴커녕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이대로 그냥 놔두면 결국 다시 똑같은 일이 반복될 게 뻔해 보였다.
어떻게 해야 하지? 진짜 그냥 모른 척하고 나 혼자 도망쳐버릴까.
그런 진지한 고민에 잠겨있던 찰나 또 다른 인물이 상황에 끼어들었다.
“엉? 너네 여기서 뭐 하냐?”
레이첼이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건들건들 이쪽으로 다가왔다.
“아 레이첼.”
“첫 빠따로 대련하러 갔던 놈이 아직도 안 오길래 뭐 하나 했더니.”
그녀는 내 옆에 있던 레이어드를 지나 그레인저까지 천천히 훑어보았다.
“분위기 뭐냐? 싸움 구경이면 나도 끼워주지?”
아마 현재 시점에서 레이첼과 그레인저는 아무 접점도 없는 생초면일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의외로 비슷한 공통점이 많다.
기가 세고 성격이 거칠다던가 자기가 최고라는 프라이드가 확고하며 상당한 전투광 체질도 갖추고 있다.
물론 깊게 파고들면 상당히 차이점도 뚜렷하지만 일단 대분류로 같이 묶어도 위화감이 없을 만큼 비슷한 캐릭터란 뜻이다.
“뭐냐 넌. 끼어들지 말고 꺼져.”
“허. 말하는 싸가지 보게. 이거 웃기는 놈이네.”
갑자기 또 뭔데. 왜 이번에는 또 너희 둘이서 신경전을 펼치는 거냐고.
이게 무슨 태그 매치인 줄 알아?
심지어 좀 조용해졌나 싶던 레이어드까지 다시 튀어나와 기 싸움에 합류했다.
“어이. 아직 너랑 나 사이에 얘기가 끝나지 않았을 텐데.”
“···그래. 다른 새끼는 몰라도 넌 그냥 넘어가면 안 되지.”
다시 두 라이벌이 불붙어버리자 레이첼은 뭔 상황이냐는 눈빛으로 이쪽을 쳐다봤다.
“너도 좀 말려 봐.”
“뭔 헛소리. 싸움은 말리는 게 아니라 구경하는 거야. 멍청아.”
“저러다 마법이라도 써버리면 그냥 싸움 구경한 걸로 안 끝나니까 그렇지···!”
내 말을 들은 그녀는 피식 코웃음을 터뜨리면서 말했다.
“겨우 그딴 문제로 끙끙대고 있었냐? 귀엽네.”
지금 여유롭게 그런 말이나 하고 있을 때냐고.
말하는 걸로 들어보니 레이첼은 해결 방법을 알고 있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그렇게 잘난 척할 거면 보고만 있지 말고 어떻게 좀 해 봐!”
“그거야 쉽지. 그냥 합법적으로 싸우게 판 깔아주면 되잖아?”
“···어?”
합법적으로 싸운다고?
레이첼은 호기롭게 둘 사이에 끼어들어 상황을 중재했다.
“거기 둘! 뭔지는 몰라도 맞짱 깔 거면 시원하게 저기 안에서 하라고. 어때?”
그녀가 가리킨 곳은 바로 우리가 방금 나왔던 장소인 대련장이었다.
“그게 가능해?”
“당연하지. 시험 전에 몸 푼다면서 대련하는 놈들이 얼마나 많은데. 대충 시험관한테 허락만 받고 빈 곳에서 싸우면 되거든.”
레이첼의 제안에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면서 얘기를 나눴다.
“설마 겁먹고 도망갈 생각은 아니겠지?”
“하! 내가? 네까짓 놈한테? 기가 차서 코웃음만 나온다고!”
결국 둘의 사이가 최악으로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하지만 오히려 나쁘지 않은 걸지도.
아까도 생각했던 내용이지만 만약 이런 이벤트 없이 그냥 넘어갔다면 원작에서 둘이 맞붙는다는 사건이 아예 없던 일이 되어버린다.
비록 디테일한 흐름은 다르더라도 이렇게 대련장에서 서로 싸우는 것이 차라리 나은 걸지도 모른다.
뭣보다 밖에서 싸우다 부정행위로 걸리는 것보다야 낫겠지.
그렇게 합법적인 대련으로 결판을 짓기로 하여 다시 몸을 돌려 대련장에 돌아갔다.
그런데 나랑 레이첼은 굳이 따라갈 이유가 있나?
문제도 해결됐으니까 쟤네 둘이서 적당히 끝내면 되는 거 아니야?
나 피곤해서 쉬고 싶은데. 이런 살벌한 분위기가 아닌 평화로운 반으로 돌아가 율리아에게 힐링 받고 싶다.
이런 내 생각을 조심스레 전하자 돌아온 레이첼의 대답.
“뭔 헛소리야. 싸움 구경해야지.”
그래. 넌 원래 그런 아이였지.
잠시나마 한여름 밤의 꿈만 같던 청초한 레이첼이 그립구나.
아무튼 우리는 옆에 착석해서 두 사람의 대련을 지켜보게 되었다.
레이어드와 그레인저.
두 라이벌의 첫 격돌.
“야. 넌 둘 중에 누가 이길 거 같냐?”
“그야 당연히···.”
이건 생각보다 훨씬 쉬운 문제였다.
“그레인저겠지.”
전교 1등인 천재 라이벌과 아직 성장이 필요한 주인공.
너무나도 당연히 처음엔 패배하는 흐름이다. 실제 원작에서도 그랬었고.
물론 주인공이 폭풍 성장하며 구도를 뒤집을 때 그만큼의 충격과 열등감을 받게 되겠지만 그거야 한참 나중의 일이고 지금 당장은 무조건 그레인저가 이길 수밖에 없지.
“흠···.”
내 단호한 대답에 침음성을 흘리는 레이첼.
“왜? 네 생각은 달라?”
“글쎄다. 나도 굳이 따지자면 저 재수 없는 놈일 거 같긴 한데. 의외로 반대도 할 만해 보인단 말이지?”
그런가? 내 생각엔 레이어드가 이길 여지는 딱히 없어 보이는데.
당장 주인공은 현재 시점에선 나를 이기는 것조차 버거울지도 모른다.
물론 그녀의 직감은 상당히 날카로운 편이니 두고 볼 필요는 있겠지만.
그렇게 시작된 대련.
“···어?”
흐름은 내 예상을 빗나가고 있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늘은 119화에용!
삐용삐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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