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20
대련이 시작되며 내가 잘못 생각했단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섣불리 판단을 내렸던 근거야 몇 가지 있었다.
작중 초반이기에 레이어드는 아직 성장이 충분하지 않은 상태였고 맞붙는 상대가 너무 안 좋았으니까.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여태까지 봐왔던 대련의 영향도 없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
여태껏 주인공과 몇 차례 대련을 붙으며 상당한 접전을 치렀었다. 그 중에선 내가 손쉽게 이겼던 적도 가끔 있었다.
게다가 전투력이 베일에 감춰진 샤론에게도 패배했었으니 현재 시점의 레이어드는 아직 약하다는 생각이 무의식중에 뿌리 깊이 자리 남아버린 것이다.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주인공의 전투력을 무시하고 있었다.
“오. 제법 잘 싸우는데?”
하지만 레이첼의 말대로 전력을 다하는 레이어드의 실력은 결코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다.
“큿!”
그레인저가 소환한 마력 늑대를 단칼에 썰어버리는 검격.
거기서 그치지 않고 즉시 거리를 좁히며 상대를 강하게 압박해나간다.
소환수를 이용해 전투하는 그레인저로서는 매우 까다로운 상황일 것이다.
최대한 거리를 벌린 채 일방적인 구도로 풀어나가야 소환 마법의 성능을 100% 끌어낼 수 있으니까.
몰아치는 레이어드와 인상을 찌푸리며 맞받아치는 그레인저.
누가 보더라도 지금 전투의 주도권은 소환사가 아닌 검사에게 있었다.
계속 지켜보면서 자연스레 깨닫게 된다. 단순히 내가 과소평가한 것뿐만 아니라 실제 주인공의 실력이 며칠 사이에 상당히 뛰어나 졌다는 것을.
뼈를 깎는 특훈 덕분인지 아니면 무슨 깨달음을 얻고 경지에 이른 건지는 몰라도 분명 일취월장 성장한 듯했다.
“이대로라면 설마···.”
원작과 다르게 첫 싸움에서 주인공이 승리하게 되는 건가?
약간의 불안감과 함께 기대감도 살짝 생겼다. 결국 원작을 좋아하던 팬으로서 당연히 주인공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야 여전히 남아있으니까.
거기에다 저 싸가지 없는 녀석이 참교육 당하는 것도 좀 보고 싶고. 아까 한 방 먹여주긴 했어도 어쨌거나 승패로만 따지면 내가 졌다는 사실은 변명의 여지가 없으니 말이다.
물론 아무리 레이어드가 분전하고 있다 해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상대가 다른 누구도 아닌 진 그레인저니까.
상성으로만 따지면 주인공도 할만하긴 하다. 아까 봤던 것처럼 계속 근접해서 몰아붙이는 것이 그레인저를 파훼할 방법 중 하나인데 그렇게 하기에 레이어드의 전투 스타일만큼 제격도 없으니까.
마법사와는 어울리지 않는 검을 이용한 전투. 순간 파괴력이나 공간 장악력은 다른 마법에 비해 부족할 수 있지만 그만큼 전투 지속력과 대인 무력화에선 최상급의 스페셜리스트로 거듭날 잠재력이 있었다.
즉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주인공이 당장 이겨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란 뜻이다.
“어떻게 생각해?”
“뭘.”
“네가 보기엔 누가 이길 거 같아?”
내 질문에 레이첼은 턱을 짚으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지금까지의 흐름만 보자면 1초의 고민 없이 레이어드를 선택해도 고개를 끄덕일 만큼 꽤 일반적인 구도였다.
하지만 그녀는 상당히 오랫동안 뜸을 들이며 대답을 미뤘다.
“오케이. 결정했다.”
“누구로?”
“기생오라비.”
레이첼은 장고 끝에 그레인저를 선택했다.
과연 정말 그녀의 예상대로 흘러갈까?
“이제 네 차례. 넌 누가 이길 거 같은데?”
“글쎄. 누가 이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응원은 역시 레이어드지.”
둘 다 대련으로 날 피곤하게 만들었지만 그래도 레이어드는 같은 반인데다 나름 친하게 지내고 있으니까.
“흠. 그러면 내기하는 건 어때?”
“내기?”
“서로 다른 사람을 선택한 거잖아? 진 사람이 이긴 사람 소원 들어주는 거지.”
갑자기 이렇게 뜬금없이 소원 내기를 하자고?
“그걸 해서 얻는 이득이 뭔데.”
“소원이라니까? 이기면 무조건 이득이지. 왜? 설마 자신 없냐?”
하하. 이렇게 뻔한 도발에 넘어갈 거 같냐.
“좋아. 받아들이지.”
“히히. 그렇게 나와주셔야지.”
이제 더는 대련을 남의 일이라고 시큰둥하게 지켜볼 수 없게 되었다.
제발 이겨라. 주인공 버프든 뭐든 좋으니까 어떻게든 이겨달라고.
“근데 넌 왜 레이어드 말고 쟤를 골랐어? 솔직히 흐름만 보면 무조건 레이어드잖아.”
“뭐 그런 걸 묻냐. 이유라고 해봤자···. 그냥 직감인데.”
직감이라. 나랑 완전히 똑같은 이유로군.
솔직히 객관적으로만 따지면 역시 그레인저의 승리가 정배이긴 했다.
전교 1등에 원작 공인 먼치킨이란 속성이 괜히 붙은 것이 아니니까.
그런데 아무리 봐도 지금 전투에선 역배가 터질 것만 같단 말이지.
지금의 흐름을 뒤집지 못하고 그대로 레이어드가 이기는 그림이 선명히 그려졌다.
무엇보다 그레인저의 표정이 결정적이었다.
제 뜻대로 전투가 흘러가지 않아 짜증 나면서도 당황스러운 듯한 찌푸림.
나와 대련할 때도 비슷한 모습이었지만 지금은 그보다 한층 더 뚜렷하게 느껴졌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짜증 나게···! 다 뒤져!!”
분을 터뜨리며 녀석의 주변에 일렁거리며 등장하는 소환수들. 이번에도 아까 나와 싸울 때처럼 한 번에 여러 소환수를 불러내 끝낼 생각이었다.
과연 레이어드가 저 일격을 막아낼 수 있을까? 만약 내가 저 자리에 있었다면 아무 피해 없이 막기는 힘들고 다소의 피해를 감수하고 도박 수를 던졌을 확률이 높다.
물론 어디까지나 전력을 다할 때의 가정이며 실제로는 그냥 깔끔하게 기권해버렸지만. 지금은 자존심 싸움인 만큼 그렇게 허무한 결말이 나올 가능성은 거의 없다.
만약 저 공격마저 깔끔하게 막아낸다면 레이어드가 지금의 나보다 강하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후우···.”
위협적인 소환수의 기세에 레이어드는 차분하게 호흡을 가다듬으며 자세를 취했다.
그 자세를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버렸다.
“뭐야? 갑자기 뭔데?”
“저건···.”
틀림없다. 저 자세는 원작 중반부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필살기.
저게 왜 벌써 등장하는지는 몰라도 정말 내가 생각하는 그 기술이 맞다면 이 싸움은 레이어드가 무조건 승리한다.
지금의 그레인저로서는 저 공격을 절대로 막아낼 수 없을 테니까.
검에 서서히 모여드는 은은한 빛.
“뒤져!!”
그와 동시에 그레인저가 손을 내뻗자 모든 소환수가 일제히 적을 향해 달려들었다.
마침내 레이어드가 준비 자세에서 빠져나와 검을 휘두르는 순간.
“그만. 거기까지.”
쿵!!
무거운 충격음과 함께 누군가 대련장의 중간에 난입했다.
“단순 연습용치고는 상당히 거칠게 싸우는구나. 방해해서 미안하지만 지금 시험용 대련을 위한 자리가 없어서. 둘 다 이쯤하고 나와줘야겠어.”
그녀는 다름 아닌 우리 반의 담임 선생님이었다.
평소에는 언제나 시큰둥하고 미적지근한 태도 때문에 존재감도 딱히 없지만 마법 아카데미의 교사는 절대 아무나 거머쥘 수 있는 감투가 아니다.
하물며 지금 같은 작중 초반 시점에선 주인공이든 그레인저든 학생이라면 아무리 발버둥 쳐도 교사의 발 끝자락에도 못 미치는 것이 현실이다.
“크윽! 하필 지금···.”
봐라. 그 지랄 맞던 그레인저도 뭐라 불평도 못 하고 말끝을 삼키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진짜 궁금해서 묻는 건데. 내가 알기로 너희 둘 다 이미 대련은 끝났을 텐데. 왜 이렇게 열심히 연습하는 거니?”
그야 두 사람은 연습이 아니라 진심이었으니까.
알면서 일부러 묻는 건지 아니면 진짜 몰라서인지는 몰라도 상당히 속을 긁는 태평한 질문이었다.
뭐 어쩌겠는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교사가 축객령을 내린 이상 학생으로선 따를 수밖에 없었다. 만약 자리를 안 비키고 억지로 버텼다면 시험 진행 방해로 부정행위가 될 수도 있고.
“에이. 노잼이네.”
레이첼은 입을 쭉 내밀고 투덜거렸다.
미안한데 너는 아쉬워할 게 아니라 안도해야 하는 상황이거든?
만약 선생님이 방해하지 않고 그대로 다음 상황이 이어졌다면 주인공의 필살기에 대련은 곧바로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주장해봤자 이 녀석이 순순히 인정할 리는 절대 없겠지만.
다른 것도 아닌 소원이 걸려있는 내기였으니 입장 바꿔 만약 나였어도 절대 아니라고 우겼겠지.
“쳇!”
다행히 그레인저는 그 이상 행패를 부리지 않고 혀를 차며 순순히 대련장을 떠났다.
어차피 바로 옆에 선생님이 있는 이상 뭘 시도해도 성공할 수는 없었겠지만 말이다.
우리는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던 레이어드에게 다가갔다.
“야. 칼잡이. 거기서 혼자 뭐하냐?”
칼잡이. 레이첼이 주인공을 부르는 별명이다.
어찌 보면 레이어드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별명일지도.
우리를 힐끗 바라보고는 설레설레 고개를 내젓는 레이어드.
“아니. 아무것도.”
“재미없는 놈 같으니라고. 됐고 나 먼저 간다.”
레이첼은 싸움 구경 다 했으니 이제 미련 없다는 듯 시선 한번 주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가만 보면 저 녀석도 참 특이한 캐릭터란 말이지. 어차피 결국 우리도 반에 돌아가는 건 똑같은데.
그보다 주인공과 둘만 남게 되자 아까부터 계속 궁금했던 내용을 슬쩍 물어보았다.
“저기 있잖아. 아까 마지막에 그거는 역시···.”
필살기에 대해 물어보려던 찰나.
내 질문을 다 듣기도 전에 녀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맞아. 네 덕분에 만들어낸 기술이야.”
“···에?”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모두 필살기 하나쯤은 가지고 있자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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