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21
이게 무슨 소리지?
필살기를 나 때문에 만들어냈다고?
순간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닌가 귀를 의심할 정도로 황당무계한 이야기였다.
일단 확실한 건 원작에 이런 내용은 절대 없다는 사실이다.
내가 작중에서 등장조차 거의 없는 엑스트라인 건 둘째치고 애초에 아까 대련에서 쓰려던 기술은 시간대가 한참 지난 후에야 처음 등장하니까.
원래는 얘가 어떻게 필살기를 익혔더라? 가물가물한 기억을 되짚어보니 상당히 까다로운 적을 상대로 고전한 다음에 깨달음을 얻었던 것 같다.
잠깐만. 그러면 내 도움으로 필살기를 만들었다는 건 깨달음을 얻을 만큼 나와의 대련이 도움이 됐다는 소리인 건가?
“흠···.”
뭔가 뿌듯한 느낌이 들면서도 아리송함을 지우기는 힘들었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그만큼 큰 도움이 됐다는 게 잘 믿기지 않는달까. 그냥 적당하게 대련하면서 서로 주고받은 정도 아닌가?
난 주인공과 대련했다고 뭔가 깨달음 같은 건 전혀 못 느꼈는데.
내가 너무 생각 없이 싸웠던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까 뭔가 손해 본 느낌인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그때 옆에서 들려온 율리아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 대련장에서 꽤 오래 있던 거 같던데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아···. 일이 있긴 했었지.”
그것도 상당히 많은 일이 말이야.
반으로 돌아와서도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할 만큼 다양한 일이었지.
“무슨 일인데? 설명해주라. 응?”
“아니 별 건 아니고···.”
대련장에서 있던 일을 적당히 얘기해주고 있으니 어느샌가 옆에 슬그머니 와서 같이 듣고 있는 샤론.
“샤론! 대련은 끝났어?”
“응.”
“어떻게 됐어?”
율리아가 반짝이는 눈동자로 시험 결과를 묻자 샤론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졌어.”
“진짜? 괜찮아! 다음번에 더 잘하면 되지!”
“응.”
응? 샤론이 졌다고?
뜻밖의 결과에 살짝 놀라고 말았다.
지난번에 레이어드를 꽤 손쉽게 이겼다길래 당연히 이번 시험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둘 줄 알았더니.
상대가 전교 2등이라도 되나? 오늘 확인한 레이어드의 실력을 생각하면 샤론이 웬만한 상대한테 질 리는 없어 보였는데.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네. 알면 알수록 참 기묘한 아이다.
“할 말 있어?”
나도 모르게 샤론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 그 시선을 의식하고 내게 당당히 묻는 그녀.
“아 아니야.”
“그럼 됐어.”
시크하기도 해라.
그나저나 레이첼 얘는 또 어디 갔대. 옆자리에 있어야 할 녀석이 보이지를 않는다.
분명 나보다 먼저 반으로 올라간 거 아니었나?
“혹시 레이첼 어디 갔는지 봤어?”
“응? 아니. 아까부터 계속 없었던 거 같은데.”
잠시 비어있는 옆자리를 바라보다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어디 화장실이라도 갔겠지. 어련히 알아서 잘 돌아올 테니 굳이 걱정할 필요 없으리라.
잠시 후 마지막 대련까지 끝나며 오늘의 시험 일정이 마무리되었다.
이제 종례만을 앞둔 상황. 모두가 자리에 앉아 선생님이 오길 기다리던 와중 뒷문이 휙 열리며 레이첼이 등장했다.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당당함.
“어디 갔다가 이제 와?”
옆자리에 털썩 앉는 레이첼에게 귓속말로 물어보았다.
“볼일 보고 왔는데.”
“···아 그래.”
너무 뻔한 대답이라 딱히 더 물어볼 것도 없었다.
막말로 큰 건지 작은 건지를 꼬치꼬치 캐 물어볼 것도 아니니까. 만약 그랬다간 녀석한테 어떤 해코지를 당할지 상상만으로 두려웠다.
“뭐냐? 그 기분 나쁜 표정은.”
“어? 내가 뭘.”
“흠. 수상한데.”
따가운 눈초리를 애써 피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야. 내 눈 똑바로 쳐다봐봐.”
“···갑자기 왜 그러는데.”
“아무것도 아니면 왜 자꾸 내 시선을 피하냐고. 엉?”
얼굴을 들이대며 집요하게 나를 추궁하는 레이첼.
굉장히 곤란하다. 이런다고 해서 순순히 속마음을 어떻게 털어놓겠냐고.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인생이 끝나버리는 수준일 텐데.
“아! 선생님 오셨다.”
다행히 때마침 담임 선생님이 앞문으로 들어오며 상황은 일단락되었다.
여전히 옆에서 부담스러운 눈초리가 느껴지긴 해도 물증이 없는 이상 아무리 압박해도 달라질 건 없단 사실을 깨달았겠지.
선생님은 교탁 앞에 서서 평소처럼 종례를 시작했다.
“다들 수고했어. 이제 시험도 내일로 끝이니까 다들 마지막까지 준비 열심히 하고. 알고 있다시피 내일은 협동 시험이니까 미리 4인 1조로 팀 짜서 내일 아침까지 명단 제출하고. 그럼 해산.”
미사여구 없이 짧고 간결한 종례 멘트. 사실 선생님 본인이 일찍 퇴근하고 싶어서 그런 거지만 어쨌든 핵심만 가득 찬 종례에 학생들도 기뻐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나저나 4인 1조 협동 시험이라.
종례가 끝나자마자 율리아가 이쪽으로 다가와 당연하다는 듯 파티를 소집했다.
“4인 1조면 우리끼리 하면 되겠다!”
사실 당연한 흐름이었다. 학기 초반에 조별 과제로 환상의 4인조가 결성된 뒤부터 줄곧 이렇게 넷이서 뭉쳐 다녔으니까.
“오케이. 설마 다른 팀에 들어가기로 한 배신자가 있는 건 아니겠지?”
“율리아 말고는 그런 걱정할 필요도 없을걸.”
“응? 왜 나만 빼고야?”
그걸 정말로 몰라서 물어보는 거니.
우리 반에서 최고 인기녀인 율리아를 제외하면 나머지 셋은 엄밀히 말해 멀쩡한 교우관계를 유지 중이라고 보긴 힘들었다.
나야 아무 존재감 없는 흔한 아싸에 불과하고. 레이첼은 성격이 너무 거칠어서 다른 애들이 무서워하고. 샤론은 워낙 말수가 없는 데다 차갑고 무뚝뚝하다 보니 얼음 공주 취급이다.
그런데 이렇게 셋을 나열해 놓으니까 내가 제일 한심하잖아.
두 사람이야 타고난 성격과 특성 때문일 뿐인 반면 나는 그런 것도 없이 그냥 존재감이 없을 뿐이니까.
“샤론. 너도 가능하지?”
“응.”
“좋았어. 그럼 내일 아침에 바로 명단 제출하는 걸로.”
그렇게 자연스레 팀원이 전부 결성되고 우리는 반을 나섰다.
집으로 돌아가려던 찰나 율리아가 이쪽으로 슬그머니 다가오더니 내 귓가에 소곤소곤 속삭였다.
“내일 약속 기억하고 있지?”
“내일이면···.”
불쑥 떠오르는 미술관에서의 대화. 시험이 끝나면 둘이서 같이 괴도 추종자 모임에 참석하기로 했었지.
“물론 당연히 기억하고 있지.”
“다행이다! 그럼 내일 보자!”
“응. 조심히 들어가.”
그래도 다행이다. 율리아가 평소처럼 다시 원래의 밝은 모습으로 돌아온 것 같으니까.
지난주만 하더라도 다크서클이 턱 밑까지 내려와서는 애써 미소 짓는 모습이 안쓰러울 정도였지.
물론 아직 모두 끝났다고 보긴 어려웠다.
며칠 전에 지하에서 봤던 그 녀석. 이름이 분명 드레이크였나.
아무튼 녀석이 품은 사상은 지금 시대에서 상당히 위험한 것이었다. 문제는 그 위험이 나뿐만 아니라 율리아에게까지 불똥 튈 가능성이 있다는 거고.
따라서 내일 확실하게 결판낼 필요가 있다. 최소한 율리아가 앞으로 거기에 나가지 못하도록 막아야만 한다.
그게 아니라면 아예 모임 자체를 와해시키거나 리더인 드레이크를 자리에서 끌어내려야 하는데 그건 솔직히 단기간에 완수하기엔 상당히 어려운 난이도니까.
그렇다고 아예 염두에 두지 않은 건 아니지만.
블랑카를 통해서 초석은 다져놨으니 마음만 먹으면 그런 장기적인 계획도 실천에 옮길 수 있다. 비록 시간은 좀 걸리더라도 가장 확실하게 뿌리부터 뽑아내는 방법이니 효과는 확실할 것이다.
“여기서 뭐 해?”
“으악!!”
그때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샤론이 알 수 없는 오묘한 눈빛으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복도에 혼자 멍하니 서서 뭐 해?”
“아···. 그냥 이것저것 생각하느라.”
“무슨 생각?”
너무 노골적으로 캐묻는데. 솔직히 좀 부담스러웠다.
샤론은 항상 뭘 생각하는지 전혀 모르겠다. 언제나 짧은 단답으로만 얘기하니 깊게 대화를 나눌 기회조차 거의 없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마저도 나한테 말을 많이 하는 편이란 것.
다른 아이들 심지어 동성 친구인 율리아와 레이첼조차 샤론과는 제대로 된 얘기 한번 나누지 못해 봤다고. 나랑 대화할 때가 그나마 제일 떠들썩한 순간이라더라.
‘읏! 곤란한데···.’
제대로 대답하기 전까진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듯한 노골적인 시선.
얼굴이 너무 가깝다. 찰랑거리는 금발에 눈을 빼앗게 만드는 에메랄드 눈동자.
원래 얘가 이렇게 예뻤던가? 나도 모르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단 사실을 깨닫고 뒤늦게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안 되지. 이런 마구니에 속아 넘어가면 큰일 난다.
얼른 자리를 도망치는 수밖에.
애써 미소를 지으면서 대충 얼버무려 보았다.
“하하···. 무슨 생각이긴. 그냥 내일 협동 시험 관련해서 이것저것···?”
“그렇구나.”
생각보다 쉽게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샤론.
겨우 위기를 벗어났다는 생각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와중 곧이어서 처음보다 훨씬 묵직한 2연타가 날아왔다.
“율리아랑 내일 한 약속 때문은 아니라는 거지?”
“······.”
···그걸 들었어?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루이스_839님 후원 너무 감사드립니당!!
이걸로 맛있는 거 사먹어야겠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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