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24
레이첼의 돌발 행동에 눈을 팍 찌푸렸다.
그렇게 혼자 멋대로 튀어 나가면 어떡하냐고!
물론 정확한 타이밍을 정해둔 건 아니었지만 누가 봐도 남들보다 반 발짝 빠르게 움직였잖아.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일단 레이첼의 움직임에 맞춰 움직이는 수밖에.
“뭐 뭐야!?”
“윽!”
우리를 발견하고는 당황하는 적들. 제대로 대응하기도 전에 레이첼의 화염이 상대들을 통째로 뒤덮어버렸다.
“힘 조절해!”
“그런 당연한 것까지 일일이 지적할 필요 없거든!”
시험장에 입장하는 모든 학생은 고급 보호 마법으로 불상사를 방지한다.
마법을 걸어주는 시험관은 교사와 마탑 소속원들이니 어지간한 학생의 수준에서는 뚫리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에 절대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평범한 학생의 규격을 벗어난 몇몇 별종은 보호 마법을 뚫고 피해를 줄 가능성도 충분하다.
가장 대표적인 예시는 역시나 랭킹 1등인 그레인저.
단순 화력만 따졌을 때 수위를 다투는 레이첼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힘 조절은 필수다. 이건 결국 엄격한 통제하에 이뤄지는 시험이니까.
보호 마법을 뚫고 상대를 다치게 한다 해서 추가 점수가 있을 리 없다. 오히려 부정행위로 간주 되지 않으면 다행이겠지.
“으악!”
강력한 불길에 상대 팀은 어쩌지도 못하고 허둥댔다.
이 정도면 전투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수준. 내 예상대로 쟤네는 막 아카데미에 입학한 애송이들이 분명했다.
“F조 전원 탈락.”
시험관이 준비한 보호 마법은 받아낸 누적 피해량을 계산해 일정량을 넘기면 즉시 탈락 처리된다.
탈락이 되면 그 자리에서 곧바로 귀환 마법이 사용되어 시험장 바깥으로 이동된다.
학생을 보호하기 위한 차원임과 동시에 부정행위를 막기 위해서였다.
만약 특별한 이유로 귀환 마법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경우 즉각 시험관이 현장에 투입되어 강제 집행을 시행한다. 고의성이 입증된다면 예외 없이 부정행위 처리되어 유급이나 퇴학당할 수도 있다.
뭐 웬만해서야 그런 상황이 나올 리도 없겠지만.
“뭐야?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쉽네.”
자기 선에서 끝났다는 사실이 뿌듯한지 어깨를 으쓱대는 레이첼.
“레이첼. 잠깐 얘기 좀 해.”
“응? 뭔 얘기?”
“신호도 없이 혼자 그렇게 튀어 나가면 어떡해. 위험할 뻔했잖아.”
율리아가 진지하게 항의하자 그녀는 적반하장으로 코웃음을 치며 반박했다.
“위험하긴 개뿔. 혹시 아까 졸았냐? 내 마법 한방에 전부 정리 됐구만.”
“그 뜻이 아니잖아. 만약 훨씬 강한 팀이었으면 어쩌려고.”
“너야말로 착각하는 모양인데. 애초에 약한 상대란 걸 아니까 그렇게 한 거라고. 네가 아는 걸 내가 모르겠냐?”
끝까지 고개를 숙일 생각이 없다는 건가.
처음에 우려했던 대로였다. 레이첼은 실력과 별개로 독단적이며 자기중심적이다.
협동이 가장 중요한 이번 시험에서 우리 팀의 가장 큰 걸림돌이란 뜻이다.
“계속 이럴 생각이면 그냥 뒤로 가.”
“하. 내가 왜? 마음에 안 들면 네가 먼저 잡으면 되잖아. 설마 자신 없어?”
점점 분위기가 과열되자 어쩔 수 없이 내가 중간에 개입했다.
“둘 다 일단 머리 식히고 진정부터 해.”
“···흥.”
“쳇···.”
설마 율리아가 이렇게까지 반응할 줄은 몰랐다.
물론 잘못한 건 명백히 레이첼이 맞았다. 그렇지만 중요한 시험이라 그런지 율리아도 평소보다 예민한 것 같기도.
만약 이런 일이 터진다면 나 아니면 샤론이 레이첼에게 항의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우리가 훨씬 차분하고 율리아가 흥분해버렸다.
이걸 어떡하면 좋을까. 이런 상황조차 시험관들은 꼼꼼히 지켜보며 점수에 반영하고 있을 것이다.
즉 팀의 균열이 나버리는 순간 좋은 점수를 받는 건 불가능하다.
일단 율리아부터 진정시켜 보자. 그녀가 평소 모습으로 돌아온다면 그다음부터는 수월하지 않을까.
“율리아.”
“응. 내가 너무 신경질 냈지? 사실 그렇게 심각한 문제도 아닌데. 미안해.”
그냥 이름만 한번 불렀을 뿐인데 알아서 나아버렸다.
이게 바로 자가 회복인가?
“아니야. 솔직히 전부 맞는 말이었는걸.”
“···뭐? 그럼 내가 전부 틀렸다는 말?”
레이첼이 입을 삐죽 내민 채로 투덜거렸다.
애도 아니고 뭐 저런 걸로 삐지냐.
하긴 쟤도 딱히 나쁜 마음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겠지. 그냥 타고난 천성이 그렇다 보니 율리아의 주장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뿐.
그럼 녀석의 눈높이에 맞춰서 설명해주는 수밖에.
“레이첼. 이번 시험이 뭘까.”
“···갑자기 뭔 헛소리냐?”
“어허. 딴소리하지 말고 얼른 대답해 봐.”
초등학생을 대하는 선생님처럼 꾸짖자 눈을 가늘게 뜨며 노려보던 레이첼이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협동 시험. 됐냐?”
“잘 아네. 그럼 내가 뭔 말을 하려는 건지도 알겠지?”
“너 방금 되게 우리 언니 같았다.”
잠시 눈을 깜빡이며 귓가에 들린 말을 해석해 보았다.
레이첼의 언니라면···.
그 얼빠진 여자?
짧은 순간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그녀의 모습들.
몇 번 만난 적 없는데도 왜 이렇게 선명하게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그거 굉장히 무례한 말이네.”
“아 솔직히 인정. 방금 건 내가 생각해도 좀 너무했다. 사과할게.”
아니 내 말은 너네 언니한테 무례하다는 뜻이었는데.
대체 레이첼은 자기 언니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길래 저렇게 망설임 없이 사과를 건네는 걸까.
“아무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너 혼자 멋지게 활약해봤자 점수는 꼬라박을 수밖에 없다는 거지. 왜냐하면 그건 협동이 아니니까.”
“···너네가 날 서포트 해주면 되잖아.”
얘도 이 정도면 대단할 정도다. 비꼬는 게 아니라 정말로.
그래. 사람이 이렇게 한결같은 면이 있어야지. 장단점은 누구나 있는 거니까.
그래도 역시 단아하고 청초했던 레이첼이 그립긴 하지만.
음. 방금 말은 취소한다. 가끔은 반전 매력도 필요한 법이지.
“물론 그래야지. 그런데 서포트도 결국 합이 맞아야 가능한 거잖아. 방금처럼 혼자 툭 튀어 나가면 제대로 지원해줄 수도 없다고.”
“알았어. 안 그럴게. 이제 됐냐? 잔소리 끝?”
대충 대답하고 등을 돌리려던 녀석에게 최후의 수단을 썼다.
“너 장학금 받아야 하잖아.”
우뚝.
여태 쭉 한 귀로 듣고 흘리던 레이첼이 단 한마디에 움찔거리며 동요하는 기색을 드러냈다.
“제일 자신 있다던 실기에서 망치면···. 다음 학기에 떨어질 수도.”
“으악! 그것만은···!!”
예상을 뛰어넘는 반응이다. 형편이 어려운 건 알고 있지만 설마 저 녀석이 저렇게까지 장학금을 신경 쓰고 있었을 줄이야. 저 꼴을 보니까 갑자기 또 불쌍해지네.
재단 이사로서 장학 선발에 성적은 아무 상관 없다는 사실을 숨기고 거짓말하는 게 조금 미안하긴 했지만 지금으로선 이보다 효과적인 카드는 없었다.
“좋아. 그럼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한다?”
“협동! 나보다 팀을 먼저 생각한다! 아자아자!”
아주 바람직하게 교정된 모습을 보고서 흡족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변화를 실시간으로 지켜본 율리아가 감탄하며 말했다.
“크로. 나중에 조련사 해도 되겠다.”
“···뭔가 어감이 좀 이상한데.”
“의외로 어울릴지도.”
심지어 조용히 있던 샤론마저.
그보다 계속 한가롭게 이러고 있으면 안 되지. 한 팀을 잡긴 했어도 과정이 별로 안 좋았으니 이대로 시험이 끝난다면 점수를 많이 받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의견 조율로 여태 정체됐던 만큼 서둘러 움직였다. 사실 어떤 식으로 싸우던 우리 팀이 패배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막말로 첫 전투처럼 그냥 레이첼이 앞에서 불만 뿜어도 전부 쓰러트릴 만큼 다른 팀과의 격차가 상당했으니.
따라서 우리가 신경 쓴 것은 전투의 결과 자체보다는 과정이었다. 정확히는 모두가 고르게 활약할 수 있도록 밸런스에 최대한 집중했다.
레이첼의 화염 율리아의 회복과 버프 내 카드 마법.
그리고 샤론의 일반 마법.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자신의 개성 마법은 꼭꼭 숨긴 채 오로지 일반 마법으로만 전투에 참여하는 샤론.
신기한 건 그렇게 하는데도 전혀 부족함이 안 느껴질 정도로 마법의 활용성이 뛰어났다.
딱히 특이한 일은 아니다. 본인의 개성 마법이 전투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아 일반 마법을 위주로 단련하는 마법사도 상당히 많으니까.
당장 나만 하더라도 개성인 ‘마술’만으로는 부족하단 사실을 절실히 체감하고 있지 않았던가.
“거의 다 잡은 거 같은데. 나머지는 어디에 숨어있는 거야. 귀찮게.”
레이첼의 말대로 일방적인 전투 구도는 계속 이어져 상당히 싱겁게 느껴질 정도였다.
사실상 1등은 이미 확정이며 남은 건 어떻게 점수를 끌어올리냐 뿐인가?
그런 안일함은 마지막으로 마주친 적을 보자마자 흔적도 없이 증발하고 말았다.
“호오. 이게 누구야? 설마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새하얀 은발의 머리카락. 새빨갛게 타오르는 붉은 눈동자.
여리여리한 체구와 여자라고 착각할 만큼 곱상한 외모.
“마침 너한테는 갚아줘야 할 빚이 있었지. 뺀질이.”
저 녀석. 우리랑 같은 타임이었어···?
이거 아무래도 큰일 난 것 같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진 그레인저 여고생(?)쨩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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