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25
하필이면 이 순간에 저놈을 마주칠 줄이야.
아니 같은 시험장에 배정된 이상 지금의 대치는 필연적인 결과였다.
우리 팀은 최강이라 표현해도 손색없을 만큼 강하다. 하지만 우리와 맞먹는 동급이 아예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존재가 진 그레인저. 녀석이 얼마나 강한지에 대해서 더는 굳이 설명할 필요조차 없으리라.
“···조심해.”
나뿐만 아니라 율리아를 비롯해 팀원 전체가 마주친 적을 경계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애초에 그레인저는 랭킹 1위란 타이틀을 지닌 만큼 아카데미 내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으니.
또한 그게 아니더라도 녀석의 주변에서 넘실거리는 불길한 마력의 흐름만 읽더라도 범상치 않은 녀석이란 것쯤은 눈치챌 수밖에 없다.
“쯧. 저 싸가지없는 놈이 왜 여기 있대.”
그러게나 말이다. 그런데 레이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네가 그런 말 할 처지는 아니지 않니?
아까 전까지만 하더라도 혼자 독단적으로 행동하느라 팀플레이에 악영향을 줬던 건 벌써 잊은 걸까.
레이첼도 말은 그렇게 하면서 눈빛은 상대를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특히 바로 어제 대련을 지켜봤으니 그레인저가 얼마나 강한지 지켜보며 깨달았을 것이다.
이 중에서 그레인저보다 강하다고 자신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레이어드가 필살기로 이길 뻔했으나 그것도 결국 선생님의 방해로 인해 끝까지 보지 못했으니 승리를 확정 짓긴 어려웠다.
막말로 레이어드가 변한 것처럼 그레인저도 원작의 흐름에서 벗어나 필살기를 익혔을지 누가 안단 말인가.
그렇지만 곧 펼쳐질 전투에서 승산이 아예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
“혼자야.”
샤론의 차분한 목소리.
그 말대로 녀석은 지금 혼자서 우리의 앞을 가로막은 상태였다. 정확히 무슨 사연인지는 알 수 없지만 대충 예상은 갔다.
레이첼을 뛰어넘는 독불장군이니 제대로 된 팀플레이를 펼쳤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팀을 내팽개치고 혼자 따로 돌아다니는 걸까? 아니면 팀원이 탈락하든 말든 개의치 않고 공격만 퍼붓다 혼자 남게 된 걸까?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팀원이 방해된다고 여겨서 의도적으로 탈락시켰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뭐든 간에 중요한 건 그레인저가 혼자란 사실이다.
일대일 승부로는 놈을 이길 수 없어도 4대1의 상황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심지어 어중이떠중이도 아니라 각각의 팀원이 모두 상위권인 엘리트 팀이니 이길 가능성은 충분했다.
“이건 오히려 기회야. 지금 저 녀석이 혼자 있을 때 잡아야 해.”
“응. 크로 말이 맞아.”
여기서 우리가 먼저 내뺄 이유는 전혀 없었다. 이런 절호의 찬스를 놓친다면 그거야말로 멍청한 짓이겠지.
빠르게 결론을 내리고 전투태세를 취하자 그레인저는 코웃음을 쳤다.
“하. 덤비겠다 이거냐?”
“우습게 보지 않는 게 좋을걸.”
“웃기고 있네. 아무리 지들끼리 뭉쳐봤자 결국 토끼는 사자한테 잡아먹힐 뿐이라고.”
그 말 자체는 동감한다. 토끼는 무슨 수를 써도 사자를 이길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토끼가 아니라 최소한 늑대 정도는 되거든.
늑대와 사자가 일대일로 붙으면 사자가 이기겠지만 늑대 무리가 함께 힘을 합치면 사자도 도망쳐야 할 먹잇감일 뿐이다.
“그래서 언제까지 얘기나 할 건데?”
“내가 신호를 줄게. 거기에 맞춰서 들어가.”
개인적으로 이번 전투는 꼭 이기고 싶었다. 물론 시험 성적과 점수도 중요하지만 이렇게 넷이나 뭉쳤는데 고작 한 명한테 허무하게 패배해버리면 얼마나 쪽팔리겠는가.
그러니까 어느 정도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비록 직접적인 공격 수단이 없어 전투력은 약하지만 내 마술은 그 어떤 마법도 따라오지 못할 독보적인 유틸성을 지니고 있다.
쉽게 말해서 지금과 같은 팀 전투에선 누구보다 뛰어난 서포터라는 뜻이다.
카드를 1장 꺼내 들고 레이첼에게 신호를 보내려던 찰나 그레인저가 소름 끼치는 웃음과 함께 먼저 움직였다.
“하!! 어디서 또 장난질을 치려고!?”
“레이첼!”
순식간에 소환된 거대 상어가 이쪽으로 날아들자 앞을 가로막으며 넓적한 화염 방패를 만들어내는 레이첼. 두 상극 속성의 마법이 부딪히며 엄청난 양의 수증기가 동굴을 가득 메워나갔다.
“큿···! 시야가!”
이건 좋지 않다. 상대는 어차피 자신을 제외하면 모두 적이니 아무 데나 공격을 날리면 되지만 우리는 아군이 맞지 않도록 신경 써야 하니 움츠러들 수밖에 없으니까.
“적은!?”
“안 보여!”
“일단 쏜다! 내 앞에서 다 비켜!!”
레이첼은 경고와 동시에 손을 내뻗고 넓은 범위의 화염 방사를 내뿜었다. 그녀가 전열의 가장 앞에 있었으니 공격 사거리에 아군은 없겠지만 그레인저 역시 공격을 가볍게 피해낸 듯했다.
율리아가 손톱을 깨물면서 난색을 드러냈다.
“이대로는 마력 낭비일 뿐이야. 수증기를 거둬내야 해.”
“내가 해볼게.”
이런 상황에선 어떤 마술이 제일 좋을까. 정체를 들키면 곤란하니 웬만하면 카드 마술 안에서만 사용하고 싶은데. 적당히 고민하다 괜찮은 마술이 떠올라 곧바로 사용했다.
카드를 던져 벽에 붙이자 가운데 구멍이 생기며 강력한 바람으로 수증기를 전부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좋아! 저기 보인다!”
다시 시야가 돌아오며 자리를 이동한 그레인저를 발견해냈다.
녀석은 아무런 위기감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기분 나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장기자랑은 다 끝났냐 애송이들?”
“잘난 척하지 말고 얼른 뒤져!!”
전투로 상당히 흥분했는지 말투가 과격해지며 화염 마법을 난사하기 시작하는 레이첼.
그레인저는 손을 휘적거리며 거북이를 소환하더니 등껍질로 불길을 방어했다. 그러면서 아까와 똑같이 불과 물이 만나며 증기가 가득 나오고 말았다.
“이래서야 원상 복구잖아···!”
“일부러 노린 거야.”
수증기로 가득 찬 환경이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화염 개성을 지닌 레이첼에 맞춰서 물 속성의 소환수만 꺼내 드는 거겠지.
외통수에 빠진 격이었다. 이대로면 내가 아무리 증기를 없애봤자 똑같은 구도가 반복될 뿐이다. 우리 팀의 핵심 공격 수단인 레이첼은 화염 마법에 특화되어있으니까. 다른 속성 마법으로 공격해봤자 녀석에게 유의미한 피해를 주긴 어려우리라.
무언가 다른 해결법을 찾아야 하는데. 쉽게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상대는 이점을 톡톡히 활용하기 시작했다. 희뿌연 안개 속에서 갑자기 나타나 우리에게 전력 질주해오는 3마리의 야생마.
“위험해!”
율리아가 가장 앞에 있던 레이첼에게 보호막을 씌어준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피해낼 수 있었다.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정통으로 발굽에 짓밟혀 탈락하지 않았을까.
당연하게도 공격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소환 마법의 가장 큰 특징은 지속성이다. 단발로 끝나지 않고 마력이 전부 닳을 때까지 계속 이어지는 소환수의 공격은 한 번만 당해도 치를 떨 만큼 악랄했다.
무엇보다 시야가 극도로 제한되어 있다 보니 제대로 대처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율리아가 최대한 힘쓰고 있으나 까딱 잘못했다간 형세가 완전히 무너질 만큼 위험천만한 구도.
“킥!”
안개 너머에서 들리는 그레인저의 비웃음 소리는 멘탈에 상당한 타격을 주었다.
특히 인내심이 약한 레이첼이 길길이 날뛰었다. 그렇다고 화염 마법으로 대응하자니 범위가 너무 넓어 우리까지 위험해질 가능성이 있다 보니 섣불리 움직이기도 어려웠다.
“이 새끼야! 정정당당하게 안 붙어!?”
거의 발광하다시피 흥분하는 레이첼. 그녀의 가장 큰 강점이던 우월한 광역 범위가 오히려 발목을 붙잡는 셈이었으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겠지.
입술을 짓씹으며 곤란함을 느낌과 동시에 적을 향해 나름의 리스펙도 들었다.
단순히 마력이 많고 개성이 사기라고 랭킹 1등이 된 것이 아니란 건가. 전투 센스와 지능부터가 타고났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소환 마법의 활용성이 무궁무진하다. 안개 속에서 튀어나오는 소환수가 얼마나 다양한지. 심지어 원작에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종류도 있었다.
새삼 격차를 실감하게 된다. 나름대로 강해졌다 자부했는데 아직도 한참 멀었다는 건가.
아니 그렇다고 벌써 포기하기엔 너무 일렀다. 아직 승부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무력감에 찌들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그레인저도 원작 초반부에는 뚜렷한 약점이 존재한다.
그 약점은 지금도 실시간으로 우리에게 기회를 만들어주는 중이고.
약점이 뭐냐고? 바로 오만함이다.
자신이 최고라는 프라이드에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남들을 깔보며 악질적인 성격을 전투에서도 대놓고 드러낸다. 덕분에 녀석은 곧바로 싸움을 끝낼 힘이 있음에도 일부러 전투를 질질 끌며 상대를 농락하려 한다.
그레인저는 본인이 원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우리를 쓰러트릴 수 있었다. 하지만 녀석은 그러지 않고 우리를 오랫동안 진득하게 괴롭히기를 택했다.
지금 이렇게나 불리한 상황에서 전세를 뒤집을 유일한 방법은 그 오만함을 공략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는 막막했다.
우선 이 지긋지긋한 안개부터 파훼해야 할 텐데.
그때였다.
“북서쪽.”
“···뭐?”
뜬금없는 방향 언급에 고개를 돌리자 초록색 눈이 밝게 빛나고 있는 샤론의 모습이 보였다.
저건···.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요즘 날씨가 너무 추운 거에용..!!
엣츙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