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26
“······.”
멍하니 샤론을 쳐다보았다.
저 눈빛. 분명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머릿속에 아직 선명히 남아있는 기억.
어둡고 습하던 하수도에서 경찰과 탐정 연합의 함정에 빠졌을 때였다.
탈출을 위해 연막으로 시야를 가렸는데도 정확하게 내 위치를 찾아내던 상대.
셜록의 빛나던 에메랄드 눈동자와 똑같았다.
내가 얼이 나가 있던 동안 레이첼은 눈살을 찌푸리며 샤론에게 따지듯 물었다.
“뭐? 갑자기 북서쪽은 왜?”
“오른쪽으로 움직이고 있어.”
“그게 전부 보인다고?”
여전히 주변에 뒤덮인 안개는 자욱이 깔려있었다. 평범한 사람의 시력으로선 그 너머에 있을 상대방을 정확히 분간할 수 없을 만큼.
그렇지만 레이첼은 입가에 비뚜름한 미소를 지으면서 망설임 없이 샤론이 알려준 방향에 불길을 쏟아부었다.
“어디 한번 확인해보자고!”
타들어 가는 화염이 안개를 뚫고 치솟아 올랐다.
그러자 곧장 건너편에서 작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쳇!”
“정말인가 봐!”
율리아도 막막하던 전투 속에서 희망을 느꼈는지 밝은 목소리로 감탄사를 터뜨렸다.
“좋아. 계속해서 위치 브리핑해. 전부 태워버릴 테니까.”
“2시 방향에서 이쪽으로 소환수.”
“오케이!”
눈이 뜨이자마자 불리하던 전세가 다시 팽팽하게 맞춰졌다. 오히려 우리가 유리해졌다고 표현해도 될 정도였다.
어디서 튀어나올지 몰라서 가슴 졸였던 소환수의 기습도 샤론의 눈앞에서 전부 간파당했다.
빛나는 초록색 눈동자가 주변을 살필 때마다 그레인저의 혀를 차는 소리가 커져만 갔다.
“이 멍청아! 멍하니 있지 말고 빨리 도와!!”
그 상황을 넋 놓고 쳐다보던 와중 레이첼의 지적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다시 한번 카드 마술을 통해 연기를 전부 빨아들였다. 이젠 우리에게 파훼법이 있단 사실을 녀석도 알았을 테니 똑같은 방식을 쓰진 않을 것이다.
자욱했던 안개가 걷히면서 나타난 그레인저의 표정은 제대로 썩어 있었다. 아무래도 샤론의 활약이 매우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뭔 수를 썼는지 몰라도···. 결국 달라지는 건 없다고!!”
마치 포효하듯 분노를 터뜨리며 마력을 터뜨리는 그레인저.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대로 돌아온 동굴의 사방에 녀석이 만들어낸 소환수가 가득했기 때문이다.
소환 마법의 가장 큰 특징은 지속성.
즉 한번 소환했다면 일정 피해를 받거나 마력이 떨어지지 않는 한 계속해서 유지되어 주인의 명령을 따른다. 이전까지 상대했던 소환수는 사라지지 않고 안개 속에서 몸을 감추고 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처음부터 소환수를 한꺼번에 기용하지 않았던 걸까.
이유는 간단하다.
수증기가 사라졌다는 건 상대 역시 우리가 어디 있는지 위치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전까지는 그냥 우리가 있을 만한 장소에 적당히 소환수를 밀어 넣은 느낌이라면 지금부터는 본격적으로 우리를 노린다는 뜻이다.
···이거 괜히 안개를 없앤 건가? 차라리 샤론의 마법을 이용해 우리만 일방적으로 볼 수 있던 상황이 더 좋았던 걸지도.
아니다. 지금 샤론이 헐떡거리는 걸 보니 방금의 마법은 마력 소모가 상당히 심한 듯하다. 즉 아까와 같은 상황이 유지됐다면 금세 마력이 바닥나 위험했을지도 모른다.
“하. 이런 깜찍한 수를 준비해놓으셨다?”
레이첼은 사방을 둘러싼 소환수 무리를 보고도 겁먹긴커녕 조소를 머금었다.
어찌 보면 오만하게 느껴질 법한 태도였으나 근거는 충분히 있었다.
“율리아. 광역 보호막 가능하지?”
“응.”
우리 넷을 둘러싸는 반투명한 보호막. 율리아의 방어 마법을 보고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인 레이첼이 팔을 양옆으로 뻗어 2개의 마법진을 만들어냈다.
보호막의 바깥에 만들어진 마법진은 그대로 화염을 방사해 동굴 전체를 불길로 가득 채워나갔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공간 장악력이었다. 다수를 상대로 하는 전투에서 이보다 뛰어난 마법이 존재할지 의구심이 들 정도.
이렇게 싸운다면 우리가 질 수가 없다. 기껏 불길을 뚫고 접근해봤자 율리아의 보호막이 가로막고 있으니까. 보호막을 뚫기 전에 통구이가 되고 말 것이다.
안개에 가려져 있을 땐 시전 범위에 우리가 휘말릴 수도 있으니 자제했지만 그마저 사라진 이상 레이첼은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어 보였다.
쾅!!
보호막을 들이받는 거대한 코뿔소. 막강한 충격에 살짝 금이 가긴 했으나 그뿐이었다.
결국 보호막을 부수는 것보다 먼저 불에 타버려 마력으로 흩어져버리고 만다.
이쯤 하면 되지 않았나 싶은데도 화염은 꺼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 상태로 마력을 펑펑 쏟아부어서 그레인저까지 한 번에 탈락시키려나 본데.
물론 상대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이익···!!”
으르렁거림과 함께 불길 속에서 멀쩡히 모습을 드러내는 그레인저.
아니 완전히 멀쩡하진 않았다. 곳곳이 그을리고 불에 탄 흔적이 역력했으니.
그럼에도 녀석은 멀쩡히 서서 이쪽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귀찮게 기어오르지 말란 말이야!!”
오만한 자존심에 상당히 스크래치를 입었는지 놈은 비명을 지르듯 외치면서 눈을 번뜩였다.
살기가 넘실거리는 붉은 눈동자. 잠깐 마주친 것만으로 오싹해질 지경이다.
그와 동시에 녀석의 뒤쪽에서 흐릿하게 생겨나는 형상.
나는 그것을 보자마자 기겁하고 말았다.
‘드래곤···!’
분명하다.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 만큼 희미하지만 그레인저의 뒤에 넘실거리는 마력은 드래곤의 힘이었다. 이번에도 원작보다 훨씬 빠르게 필살 마법이 등장했다.
그래도 아직은 괜찮다.
만약 저 녀석을 제대로 소환한다면 우리는 저항할 틈도 없이 무참히 패배하고 말겠지. 지금 분위기로 보아 드래곤 소환을 완벽하게 숙달한 느낌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기회는 있다. 일단 확실한 게 있다면 무슨 짓을 저지르기 전에 우리가 먼저 대응해야 한다는 거다.
그때였다. 옆에서 들려오는 차분한 목소리.
“가슴 중앙. 비늘이 없어.”
“······.”
이번에도 밝게 빛나는 초록색 눈동자. 그녀의 말이 허튼소리일 리는 없다. 드래곤의 유일한 약점을 단번에 간파해낸 것이다.
역시···.
아니 일단 생각은 나중에 하자.
지금은 이 전투를 끝내는 것이 먼저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뚜렷해져 가는 드래곤. 역시 아직은 숙련되지 않은 마법인지 소환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듯했다. 그러니 이 틈에 얼른 해치워야 한다.
“율리아. 보호막을 없애줘.”
“하지만···.”
“괜찮아.”
“···응.”
아마 불길 속에 소환수가 남아있을까 걱정했던 거겠지. 하지만 지금은 일반 소환수가 중요한 게 아니다.
곧바로 카드를 꺼내 샤론이 알려준 가슴팍을 향해 날렸다. 그러자 화염 속에서 튀어나온 소환수가 몸을 날려 카드를 막아내려 시도했다.
“어딜!”
레이첼의 불꽃 세례가 소환수를 흔적도 남기지 않고 태워버렸다. 덕분에 무사히 드래곤의 비늘이 없던 가슴에 꽂힌 카드.
그러나 변화가 일어나기도 전에 그레인저가 광기 넘치는 폭소를 터뜨렸다.
어느새 녀석의 뒤에 있던 소환수는 완전한 색채를 띠고 있었다.
“크 크하하!! 이미 늦었어! 다 뒤져!!”
드래곤이 천천히 입을 벌린다. 그리고는 서서히 녀석의 입안에서 넘실거리는 어마어마한 마력의 응집체. 신화에서나 등장하는 용의 숨결이 지금 시험장에서 펼쳐지려는 것이다.
제아무리 원본과는 비교하기조차 민망한 열화판이라 해도 드래곤은 드래곤.
드래곤 브레스를 직격으로 맞는다면 시험용 보호막과 함께 가루로 만들어버릴지 모른다.
심상치 않은 마력량에 전투를 지켜보던 시험관들도 즉시 우리에게 전투 중단을 명령했다. 이대로면 끔찍한 사고가 벌어질 수도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삑! 파지직···!!
그러나 뜻밖의 이변이 발생했다. 외부와 연결되어있던 시험용 보호막이 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 것. 심지어 우리를 대피시키기 위한 텔레포트 마법진도 깜빡거리며 빛을 잃어갔다.
“···세상에.”
이것은 드래곤의 권능이었다. 마법의 주인이라 불리는 위대한 존재가 지닌 힘.
주변의 마력을 통제하며 오롯이 자신만이 다스리는 그야말로 드래곤에게 어울리는 능력.
원작에서도 똑같은 전개가 나오긴 하지만 그것은 지금 시점으로부터 한참 떨어진 나중 이야기인데.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나올 정도다.
문제는 그 힘을 시전자인 그레인저조차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고 있다는 거다.
오히려 자신의 불완전한 소환수에 휘둘려 넋이 나간 채로 이성을 잃은 듯했다.
점점 커져만 가는 농축된 마력량. 어느새 놈의 입안에 모이던 숨결은 보고만 있어도 눈이 멀 만큼의 밝은 빛을 내뿜었다.
“뭐 하는 거야!? 그렇게 있을 거면···!”
레이첼이 떨리는 목소리로 마법을 시전하려 했다. 나 대신 약점을 노리려 하는 모양이지만 그녀의 손목을 붙잡으며 말렸다.
나를 미쳤냐는 듯이 쳐다보는 시선.
하지만 이것이 지금으로선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율리아도 레이첼도 이해하지 못한 듯했지만.
샤론만큼은 내 의도를 눈치챈 건지 덤덤한 시선으로 나와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내 드래곤이 브레스를 전부 모으고 우리를 향해 쏘아내려던 순간.
녀석의 가슴팍에 꽂혀있던 카드를 폭발시켰다. 그 자체만으로는 코웃음 칠 만큼 별 볼 일 없는 충격이었으나 내가 노린 것은 폭발을 통한 연쇄작용이었다.
막강한 마력으로 뭉쳐있던 브레스는 우리를 향해 날아오지 못하고 드래곤의 입안에서 폭발하며 애꿎은 하늘로 쏘아졌다.
쾅! 쾅!! 쾅!!!
천장의 벽을 몇 차례나 뚫으며 하늘까지 치솟은 브레스.
고개를 들어 올리니 커다란 구멍이 뻥 뚫려 햇빛이 새어 들어왔다.
“···하.”
참 현실성 없는 광경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크와앙!! 쿠우웅!! 콰콰쾅!!
이게 바로 드래곤 브레스에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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