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29
“···왜 그래?”
부담스러운 시선을 무시하고 애써 태연하게 물었다.
율리아는 불만 가득한 눈빛을 지우지 않은 채 역으로 질문했다.
“정말이야?”
“뭐가?”
“방금 여자랑 아는 사이야?”
그 얘기를 신경 쓰고 있던 건가? 분명 내 대답을 옆에서 들었을 텐데도 이렇게 재차 확인해야 할 만큼?
“아까도 말했잖아. 난 처음 보는 얼굴이라니까. 상대도 착각이라 인정했고.”
“흠···.”
사실대로 말하자면 블랑카와는 구면이긴 하다. 더 정확히는 나만 일방적으로 알고 있는 거지만.
상대는 내가 분장했던 모습만을 기억하고 있을 테니 지금의 얼굴을 알아볼 리 없다.
아까 블랑카가 그런 얘기를 꺼냈을 때 상당히 놀라긴 했다.
하지만 큰 의미 없이 가볍게 물어본 정도에 불과하다. 아무리 직감이 날카로울지라도 내 정체를 단박에 눈치채지는 못할 것이다.
“정말이지?”
“내가 너한테 이런 걸로 왜 거짓말을 하겠어?”
“알았어. 믿어줄게.”
마치 선심 썼다는 듯 팔짱을 끼고 새초롬하게 대답하는 율리아를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평소 봐왔던 그녀의 모습과는 상당히 다른 행동.
갑자기 왜 이러나 의아해하던 와중 불현듯 머릿속에 답이 떠오르고 말았다.
이곳은 평범한 장소가 아니라 괴도 추종자의 모임이 열리는 은밀한 공간이다.
즉 여기서 누군가를 만났다는 건 이전에도 모임에 참석했다는 증거나 다름없다.
그렇다. 율리아는 내가 그녀를 속이고 이곳에 잠입했었을까 봐 의심했던 거다.
과연 예리하다. 하마터면 들킬 뻔했잖아.
가까스로 위기에서 벗어났단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으니 여신님이 한심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이런 멍청한 녀석 같으니라고···.]
‘네?’
[되었다. 신경 쓰지 말거라.]
얘기를 할 거면 속 시원하게 해줄 것이지 애매하게 끊어버리니 괜히 더 궁금해져서 답답하잖아.
슬쩍 옆을 쳐다보니 율리아는 다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다행히 눈치채지는 않은 것 같으니 지금부터라도 조심하자.
“이제 어떻게 할까?”
오늘의 주인공은 엄연히 내가 아니라 그녀다.
나는 어디까지나 부탁을 받고 따라와 준 일행에 불과하다.
내 질문에 턱을 매만지며 고민하던 율리아가 한쪽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일단 저기 가서 앉자.”
“알았어.”
주변에 사람이 별로 없는 구석진 자리로 가서 착석했다. 무대에서 떨어지니 그나마 덜 시끄러워서 괜찮았다.
그런데 이렇게 계속 앉아만 있어도 되는 건가?
지난번에 왔을 때는 자연스럽게 블랑카가 다가와서 얘기를 나누다 드레이크가 연설을 시작했었지.
일단 분위기로 봐서 딱히 특별한 형식이 정해져 있는 느낌은 아니었다. 그냥 자유롭게 공연을 관람하며 술과 음식을 즐기다가 마음에 맞는 사람과 자유롭게 떠드는···.
그냥 말 그대로 클럽이나 다름없었다.
아니면 혹시 그날만 그렇게 진행됐던 건가? 혹시 모르니 율리아한테 물어보기로 했다.
“저번에도 여기 왔었다고 했지?”
“응. 한 번뿐이지만.”
“그때는 어땠어? 지금이랑 똑같았어?”
대답은 의외였다. 약간 머뭇거리던 율리아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부정의 뜻을 내비쳤기 때문이다.
“좀 다른 것 같아. 사실 많이 달라.”
“정말?”
내가 처음 왔을 때와는 변화가 거의 없길래 당연히 율리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었다.
날짜로 계산해보면 그녀가 처음 지하에 왔을 땐 지금보다 한참 전일 테니 분위기가 달라지더라도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닌가?
“어떻게 달랐는데?”
“···이렇게 시끄럽지 않았어. 마음을 차분하게 해주는 음악이 흐르고 서로 모여서 레이븐에 관해 자유롭게 얘기를 나눴던 거 같아.”
확실히 말만 듣고 상상해봐도 지금 모습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비유하자면 클럽이 아니라 학술회에 가깝지 않았을까.
율리아의 얘기를 들으면서 확신이 더욱 강해졌다. 드레이크는 괴도를 향한 순수한 팬심으로 이 모임을 운영하는 것이 아니다. 녀석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써 사용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괴도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모아 자연스레 본인의 사상을 은근슬쩍 드러냈겠지. 그리고 지하의 분위기를 서서히 바꾸면서 유흥과 쾌락에 시선을 돌리도록 현재의 추종 모임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럼 바뀐 분위기는 어떤데? 저번과 비교하면 더 마음에 들어?”
“···잘 모르겠어. 여기 있는 사람들은 좋아하는 것 같지만 내가 생각했던 모임이랑은 너무 달라서.”
다행히 마음에 든 눈치는 아니었다. 오히려 낯선 풍경에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만약 주기적으로 모임에 참여하며 익숙해진다면 좋아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되도록 얌전히 놔둘 이유는 없었다.
내 목표는 율리아가 괴도 추종자들에 관심을 끄도록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의 상황을 최대한 이용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너무 성급하게 움직여서는 안 된다.
율리아는 괴도 레이븐에게 상당한 팬심을 품고 있다. 단순히 멋있어서 좋아하는 수준을 넘어 자신의 인생을 바꿔준 전환점으로 여길 정도다.
그러니 괴도를 향한 마음 자체는 인정하되 이 모임은 잘못됐다고 생각하게끔 유도할 생각이다.
“내가 봐도 여긴···. 그냥 유흥만을 위한 장소처럼 보여. 당장 주변에서 괴도에 대해 얘기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잖아.”
“······.”
율리아는 대놓고 긍정의 답을 내뱉진 않았으나 눈빛만 봐도 상당히 공감하고 있음을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잘못 찾아온 건 아니지?”
“그건 아닐 거야. 아까 여자분도 나를 알아봤잖아.”
“아니면 모임 주제가 달라졌다던가.”
“···정말 그런 걸까?”
좋아. 제대로 흔들리고 있다. 이대로면 큰 무리 없이 모임에 실망하고 지하를 떠나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
그렇다고 너무 비난만 쏟아부으면 내 태도에 의구심을 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최대한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척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실 여기 분위기 자체는 꽤 마음에 들긴 해. 괴도랑 관련이 없어 보인다는 것만 빼면 말이야.”
“나한테는 그게 제일 중요해. 괴도 추종자가 괴도랑 관련이 없으면 안 되는 거잖아.”
“그건 그렇긴 하지.”
아주 바람직하다. 율리아의 눈빛에 실망하는 기색이 점점 진해져 갔다.
이 정도면 그냥 나가자고 제안해도 별말 없이 수긍할 듯했다.
“친구들. 잠깐 실례해도 괜찮겠나?”
그때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했다. 갑자기 등장한 누군가 우리가 앉은 테이블에 다가와 말을 건 것이다.
어두운 구릿빛 피부와 투박한 인상. 가까이서 보니 몸 곳곳에 새겨진 문신까지.
그가 누군지 깨닫자마자 계획이 단단히 꼬여감을 깨닫고 말았다.
이 모임의 수장인 드레이크가 직접 우리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율리아는 눈을 깜빡이며 상대를 가만히 쳐다보다 기억이 떠올랐는지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 저번에 봤던 그···.”
“기억해주니 영광이군. 몇 주 전에 왔던 예쁜 친구여.”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며 율리아의 옆에 가까이 붙었다. 그러자 이쪽을 힐끗 바라보며 능청스럽게 미소를 짓는 드레이크.
“그런데 옆의 친구는 기억이 나질 않는데. 혹시 여긴 처음인가?”
“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워워. 같은 친구끼리 왜 날을 세우고 그러나.”
“···같은 친구요?”
내가 언제 너랑 친구가 됐는지 기억이 안 나는데 말이지.
“그럼.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은 모두 친구거든. 우리의 영웅 레이븐을 동경하는 친구.”
“우리의 영웅···. 지난번에 했던 얘기네요.”
“정확해. 그때 너와 나눴던 얘기는 정말 많은 도움이 됐어. 지금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지.”
그러면서 허락도 묻지 않고 뻔뻔하게 자리에 엉덩이를 들이미는 녀석.
“그런데 옆을 지나가며 우연히 얘기를 들어보니 친구들이 뭔가 오해하는 것 같아서. 괜찮다면 내가 해명하고 싶은데 말이야.”
마음 같아서는 얼른 꺼지라며 쫓아내고 싶지만 지금 그랬다간 오히려 율리아의 반감만 키울 수도 있다. 차라리 이걸 기회로 삼아 드레이크의 속내를 확실하게 파악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그리고 율리아는 이런 녀석이 몇 마디 나불거린다고 바로 넘어갈 만큼 귀가 얇거나 줏대 없지 않다. 오히려 조금이라도 논리적 허점이 있다면 그걸 집요하게 캐물어 끝장을 볼 성격이다.
“물론 친구들의 생각도 이해해. 우리가 아무것도 안 하고 먹고 놀기에만 바빠 보이겠지. 하지만 그거야말로 괴도를 추종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이야.”
“어째서죠?”
“영웅이 그러기를 바라니까.”
···이건 또 뭔 헛소리래.
내가 너희들이 먹고 놀기를 바란다고? 이제 하다 하다 이런 것까지 내 이름을 팔아먹어서 변명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너무 황당한 대답이어서 뭐라 반박할지조차 감이 안 잡혔다.
율리아 역시 나와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떨떠름한 표정으로 멍하니 되물었다.
“네···? 레이븐이 그러길 바란다고요?”
“그렇다니까. 영웅님이 왜 탐욕적이고 부패한 부자들의 재산을 훔치겠어? 전부 우리가 행복하기를 위해서라고.”
기가 차서 코웃음조차 나오지 않는다. 이러다 아예 괴도 종교를 세우겠구만.
더 들어볼 필요도 없었다. 분명 율리아도 이 녀석의 논리가 얼마나 한심하고 빈약한지 깨닫고 자리를 박차며 일어나겠지.
“그건 맞는 말이네요.”
“···에?”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이미 흑화하기 시작한 율리아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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