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30
“그건 맞는 말이네요.”
“···에?”
율리아의 대답에 귀를 의심했다.
지금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너무 황당한 헛소리였기에 당연히 누구보다 이지적인 그녀라면 드레이크의 시커먼 속내를 눈치챌 줄 알았는데 오히려 아무렇지 않게 긍정하며 맞장구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아니 이건 오히려 나조차 깜빡 속아 넘어간 함정일지도 모른다. 겉으로는 상대의 말에 동의하는 척하면서 방심을 유도하고 본심을 내뱉게 하려는 거지.
“역시 친구라면 이해할 거라 믿고 있었어. 영웅은 지금 브리튼을 좀먹는 부패한 신분제를 철폐하고 모두가 평등하며 가치 있는 존재로서 인정받길 원하고 있지.”
대체 내가 언제 저런 사상을 내비쳤단 말인가? 여태껏 괴도 레이븐으로서 해온 활동들은 그냥 보석을 터는 데 집중되어 있었다. 애초에 특정 인물 몇몇을 제외하면 제대로 말을 섞어본 적조차 거의 없다.
나를 이용하려는 심산은 알겠는데 방금 내용은 선을 넘어도 지나치게 넘어버렸다.
당장 맞은 편에서 얘기를 듣는 율리아가 신분제의 끝판왕인 그레이스 공작가의 영애니까.
아무리 동의하는 척 연기 중이라고 해도 저 정도로 대놓고 비난을 받으면 율리아가 그냥 넘어갈 리 만무했다.
“레이븐이 신분제 철폐를 주장했다는 의견에는 동의하기 힘드네요.”
그렇지! 역시 내 예상대로 율리아는 진짜 사상에 물든 게 아니라 적당히 맞장구쳐주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평등하며 가치 있는 존재로 인정받길 원한다는 뒷말은 동의해요.”
“친구. 물론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건 이해해. 그렇지만 진정한 평등을 위해선 신분의 벽은 허물어져야만 해.”
“아니요. 만약 그렇다면 레이븐이 왜 공주님에게 예우를 갖췄겠어요? 그쪽의 말과 모순되잖아요.”
“모든 변화는 시작이 존재하니까. 한 번에 모든 걸 바꿀 수 없으니 아래 단계부터 차근차근 변해가야지. 그러면 반대로 왜 영웅이 궁전을 털었겠나?”
두 사람은 첨예하게 부딪쳤다. 이제야 왜 율리아가 처음 모임에 방문했을 때 분위기가 학술회 같다고 했었는지 이해하였다. 그냥 둘이 이렇게 떠드는 자체만으로 주변을 학술회로 만들어버렸으니까.
심지어 둘의 끝장토론은 주변 사람들마저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커다란 음악 소리가 묻힐 만큼 두 사람의 목소리가 존재감을 키워나갔다.
“당장 신분을 철폐한다고 모두가 행복해질까요? 오히려 기존의 질서가 무너지며 혼란만 가중될 뿐이에요. 그보다는 더 큰 그림을 봐야 한다고요. 레이븐이 그러는 것처럼.”
“뭘 모르는군. 신분으로 인해 각 사람의 급이 정해지는 순간 변화는 불가능해. 결국 한계에 부닥치고 만다는 뜻이지. 신분 철폐는 선택이 아닌 필수야. 그게 바로 영웅의 뜻이라고.”
그래. 너희끼리 실컷 떠들고 토론하는 건 좋은데 말이지.
왜 거기에 뜬금없이 내 이름을 자꾸 끼워 넣냐는 말이다. 대체 내가 언제 신분제와 평등에 관해 얘기했었냐고. 그런 복잡한 건 괴도가 아니라 정치인·사상가가 신경 쓸 문제잖아.
그 뒤로도 율리아와 드레이크는 한참 동안 토론을 이어나갔다.
어느 순간부터 주변에 사람들이 둘러싸 양측으로 갈라져 서로를 두둔하고 반박하며 파벌처럼 갈라지기에 이르렀다.
정확히 둘 사이에 끼여버린 나는 한숨만 내쉬며 제발 이 시간이 끝나기를 빌 뿐이었다.
“저번에도 느꼈지만 친구와 얘기할 때마다 정말 많이 배우는 것 같네.”
“저도 마찬가지예요. 레이븐을 이렇게나 깊게 이해하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거든요.”
깊게 이해하긴 개뿔. 진짜 내가 어떤 사람인지 하나도 모르면서 그냥 마구 씨부렁대고 있는 거잖아.
솔직히 드레이크야 어차피 나를 도구로 이용하고 있단 사실을 아니까 넘어가겠는데 오히려 율리아의 반응이 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처음에는 상대를 속이기 위한 연기인가 싶었으나 막힘없이 튀어나오는 얘기를 들어보면 100% 진심인 것 같단 말이지.
대체 율리아의 머릿속에서 괴도 레이븐은 어떤 존재인 걸까? 평소에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길래 저렇게 망설이지 않고 찬양을 쏟아내는 건지 궁금해질 정도다.
“괜찮다면 곧 시작되는 2부 공연도 듣고 가지 않겠어? 오늘의 하이라이트거든.”
“죄송해요. 사실 오늘은 조금만 둘러보다 금방 갈 생각이었거든요.”
“아쉽지만 그럼 어쩔 수 없지. 그럼 다음에 보자고.”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지하를 빠져나왔다. 달팽이관을 두드리던 음악 소리가 사라지니 세상이 너무나 고요해진 것만 같았다. 마치 다른 세상에 온 듯한 느낌.
이미 하늘은 완전히 어두워져 한밤이 되어 있었다. 시간의 흐름을 파악하지 못하는 지하에 있다 보니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른 채로 갇혀 있던 것이다.
가까스로 빠져나오긴 했으나 드레이크가 했던 마지막 말이 불안하게 느껴졌다.
율리아가 바뀐 지하의 풍경을 보고 흥미가 식길 바랐지만 마지막 녀석과의 토론 때문에 생각을 바꿨을지도 모른다.
“···다음에도 올 생각이야?”
“잘 모르겠어. 그런데 여기가 아니면 레이븐에 관해 허심탄회하게 얘기할 곳이 없지 않을까···?”
결국 율리아가 원하는 건 괴도에 관한 얘기를 나누며 같은 관심사를 공유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그런 거라면 굳이 이 모임에 참석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 보았다.
“내가 있잖아.”
“···응?”
“우리가 어떻게 처음 친해졌는지 벌써 잊었어? 조별 과제로 괴도 레이븐을 조사하면서였잖아.”
그녀는 멍하니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지···?”
“나는 우리가 나름대로 그 주제로 많이 얘기했다 생각했는데.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어?”
“그건 아니야! 당연히 네가 첫째 순위긴 해. 그렇지만 다른 사람도 만나보고 싶은걸.”
“나뿐만 아니라 레이첼이랑 샤론도 있잖아.”
솔직히 내가 말하면서도 조금 억지스럽긴 했다. 어차피 매일 마주치는 애들을 억지로 끼워 맞춘 거니까. 비유하자면 친구를 사귀고 싶다는데 가족들을 데려와 놓고서 가족을 친구로 여기라며 억지 부리는 느낌?
“생각해보면 우리 셋 다 괴도를 향한 시선이 다르잖아? 나는 우호적인 편에 가깝고 레이첼은 딱히 흥미 없는 쪽 그리고 샤론은···.”
굉장히 적대적인 극단에 서있다고 표현해도 무방하리라.
내 말을 듣던 그녀는 눈가를 가늘게 뜨며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크로는 내가 여기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솔직히 말하면 좀 꺼림칙해. 지하의 전체적인 분위기나 아까 남자도 그렇고. 약간 위험한 냄새를 풍기는 것 같아. 물론 근거는 없이 내 직감일 뿐이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이해해. 하지만 단지 그것만으로 섣불리 판단할 필요는 없다고 봐.”
다행히 율리아는 내 우려를 귀찮은 참견이 아니라 진심 어린 걱정으로 받아들여 주었다.
그렇지만 마음은 이미 다시 방문하겠다는 쪽에 쏠린 것처럼 보였다.
“아까 그 남자 얘기 들었잖아. 신분제 철폐를 주장하던데 그러면 만약 네가 누군지 알게 되면···.”
“해코지할 수도 있단 거구나. 귀족한테 원한이 있어 보이니까.”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진 않는 거지.”
이건 거짓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드레이크는 자신의 극단적인 사상을 위해서 율리아를 이용할지도 모른다. 내 이름을 팔아먹는 모습을 보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녀석이다.
율리아는 잠시 내 눈을 바라보더니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올 뒷말이 무엇일지 예측할 수 있었다.
“걱정해줘서 고마워. 그런데 진짜 괜찮아. 내가 거기에 몸담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몇 번 가서 떠들다 오는 게 전부니까. 크로가 걱정하는 것처럼 내 이름을 쉽게 밝힐 생각도 없어.”
참 답답하다. 그건 본인이 조심한다고 무조건 예방될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호랑이굴에 대놓고 들어가는데 정신만 차리고 있다 해서 살 수 있는 건 아니란 뜻이다.
호랑이한테 잡아먹히기 싫으면 그냥 호랑이굴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제일 확실한 방법인데.
“그리고 나도 단순히 흥미 때문만은 아니야.”
“···그러면?”
“음. 백부님을 향한 사소한 복수라고 할까.”
백부? 그레이스 경이 갑자기 여기서 왜 나오지?
둘 사이에 있던 일이야 대략 파악하고는 있다. 그날 현장에 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내가 등장하면서 일단락된 거 아니었나? 내가 모르는 뭔가 더 남아있던 건가?
“미안해. 자세한 얘기는 가문의 일이라서. 크로를 못 믿는다는 게 아니라 괜히 나 때문에 위험해질까 봐 그런 거야. 네가 다치길 원하지 않으니까.”
“알았어. 나도 더 캐묻지는 않을게.”
“이해해줘서 고마워.”
율리아는 상기된 표정으로 쑥스럽다는 듯이 수줍게 미소 지었다.
“네가 옆에 있어 줘서 정말 다행이야.”
“···뭘. 오늘 난 아무것도 안 했는데.”
“아니야. 옆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 너무 든든했는걸. 약속 지켜줘서 고마워.”
진심이 담긴 감사 인사를 듣는 순간 그녀와의 거리가 조금 더 가까워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이제 가볼게.”
“응. 오늘 시험도 치느라 피곤할 텐데 푹 쉬어.”
“너도 조심히 들어가!”
작별 인사를 나누고 우리는 헤어졌다.
혼자 집으로 걸어가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결국 율리아의 관심을 떼어낸다는 1차 목표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차선책으로 괴도 추종 세력에 잠입하여 드레이크라는 싹을 제거할 수밖에.
마침 한 가지 떠오르는 방법이 있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모두 해피한 크리스마스 보내고 계시나용?
오늘 아카괴도가 선작 8000을 찍을 것 같아용! 아주 두근거리네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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