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31
집으로 돌아와 생각에 잠겼다.
일단 시간은 충분하다. 중간시험도 전부 끝난데다 내일은 주말이니 아무런 방해 없이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러니 이번 주말부터 차근차근 시작해볼 생각이다. 어차피 지하 모임은 매일 밤 열린다고 하니 문제는 없었다.
지금 고민 중인 건 괴도 추종자 문제와 재단 확장을 동시에 엮어서 처리할 수 있냐에 관해서였다.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훨씬 효율적으로 쉽게 처리할 수 있으리라.
다만 그러기 위해선 빈틈없는 밑그림 구상이 필수적이었다. 어설프게 계획했다간 두 마리 토끼를 전부 놓치는 참사가 벌어질 수도 있으니.
그렇다면 재단의 몸집을 불리는 것이 우선이었다. 지금의 재단은 자본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는 수준에 가까웠다. 직원을 더 뽑고 활동 영역을 넓히면서 체급을 불려갈 필요가 있었다.
미리 정리해뒀던 서류들을 훑어보았다. 이건 시간이 남을 때 찾아본 지원 후보지였다.
대부분 비슷한 사정을 가진 곳들.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면서 사회·윤리적으로 특별한 문제가 없는 단체로만 엄선하여 뽑았다. 대부분 고아원 초등학교 병원 기타 복지 시설 등등이었다.
“흠···.”
재단을 설립한 지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아직 후원 중인 단체가 고아원 한곳 뿐이라 내내 마음에 걸렸었다. 이참에 두세 곳 정도는 더 늘리려고 한다.
물론 가장 좋은 건 뤼팽 재단에서 직접 고아원이나 복지 시설을 세우는 거였다. 하지만 아직은 그렇게까지 하기엔 너무 시기상조겠지.
“좋아. 일단 이렇게 하자.”
후보지 중에서 두 군데를 정했다. 각각 노인 복지 시설과 수도원이었다.
자선 활동의 영역을 넓히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일부러 고아원은 뒤로 미루었다.
물론 한 곳에 집중해서 전문적으로 파고드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내 궁극적인 목표는 뤼팽 제단이 세상에서 제일 거대한 자선 재단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어발처럼 마구 뻗어나가야 한다.
솔직히 수도원은 종교 시설이니 굳이 할 필요가 있나 싶기도 했지만 지금 시대에는 이런 수도원이 고아원이나 병원과 같은 복지 시설의 역할도 겸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외진 시골일수록 더더욱 그런 경향이 심하다.
게다가 종교 시설만 의도적으로 제외한다면 나중에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가능성도 있다.
나야 21세기의 현대적인 사고방식이 익숙하지만 지금은 엄연히 19세기 런던이니까. 아무리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있다 하더라도 아직 종교는 삶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필수 요소였다.
아무튼 지원 대상은 정했다. 내일부터 직접 방문해서 후원하고 싶다고 말하며 구체적인 방식을 상의하면 될 것이다.
“그럼 이제 남은 건···.”
직원 고용. 어찌 보면 지원 대상을 정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사안이었다.
사실 체급을 늘리겠다고 결심한 현재 상황에도 계속 갈등이 이어졌다. 사실 원래 처음 설립할 때 뤼팽 재단은 나 혼자서 운영할 생각이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괜히 직원을 고용했다가 내 정체를 들킬까 걱정됐기 때문이다.
특히 수상할 정도로 풍족한 자금의 출처를 한번 의심하기 시작하면 매우 곤란해진다.
따라서 직원을 뽑는다면 확실하게 해야 한다. 의문을 품지 못할 만큼 정보를 제한시켜 버리거나 아니면 아예 의심도 못 할 만큼 확실히 내 사람으로 만들어버리거나.
마침 한 명 떠오르는 사람이 있긴 했다.
***
“···네? 직원 고용이요?”
“그렇습니다. 줄리엣 씨.”
지금 나는 아침 일찍 한 여자의 집을 찾아가 다짜고짜 제안했다.
우리 재단의 직원이 되어달라고.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제 비서로 당신을 스카웃하고 싶습니다.”
내 말을 듣자마자 그녀의 눈가가 살짝 꿈틀했다. 겉으로 최대한 태연한 척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상당히 동요하고 있는 모양이다.
“대체 왜요?”
그래. 그런 질문이 돌아올 줄 알았지.
오히려 이런 반응이 나오지 않았다면 내가 더 당황했을 것이다.
그녀와 나는 얼마 전에 한번 마주친 이후로 쭉 별다른 접점이 없었으니까.
그나마 마주쳤던 것도 특별한 인연이 아니라 그저 고아원의 후원을 어떻게 할지 조율하기 위한 업무적인 상황에 불과했다.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대답할지도 미리 생각해두었다.
“저희는 목적이 같으니까요.”
“···네?”
“줄리엣 씨는 고아원을 후원하셨잖습니까. 저도 마찬가지였고요. 누군가를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이야말로 저희 뤼팽 제단에 가장 필요한 마음가짐이죠.”
그렇게 말하며 미소를 짓자 그녀는 황당하다는 듯 눈가를 가늘게 뜨며 노려보았다.
“뭔가 착각하시는 거 같은데 전 어디까지나 제가 자라왔던 은혜를 갚으려고 후원한 것뿐이에요. 타인을 위해 살겠다는 거창한 신념 같은 건 없다고요.”
“괜찮습니다. 줄리엣 씨는 무상 자원봉사가 아니라 제게 봉급을 받으며 일하면 됩니다. 거창한 신념 없이 그냥 돈을 벌기 위해 일해도 된다는 거죠.”
“방금은 누군가를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이 제일 중요하다면서요.”
난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흠. 제가 그랬었나요?”
“······.”
“하하. 농담입니다. 어쨌거나 줄리엣 씨에겐 좋은 제안이라 확신합니다.”
작전을 바꿨다. 애초에 이렇게 쓸데없는 군말을 덧붙일 필요 없이 하나만 보여줘도 충분하니까.
“한 달 월급입니다. 물론 성과급을 제외한 기본 급여죠.”
“허. 진심이에요···?”
헛웃음을 터뜨리면서도 종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그녀. 아주 솔직해서 좋군.
어차피 이 정도 돈이야 내게 아무 문제 되지 않는다.
흔들리는 눈빛. 이대로면 제안을 승낙하는 것도 시간문제로 보였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줄리엣은 오히려 더 경계하는 기색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재차 물었다.
“더 이해가 안 가요. 왜 이렇게 하면서까지 저를 고용하려는 거죠?”
“당신의 능력 때문입니다.”
“능력이요?”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고아원 출신의 소녀가 나간 지 몇 달 만에 상당한 돈을 들고 후원하겠다고 돌아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죠.”
특히 지금 같은 시대라면 더욱더 그러하다. 아카데미 내에서야 어차피 실력이 최우선이니 별로 티가 안 나지만 엄연히 지금 시대는 남녀 차별이 뚜렷하게 존재한다.
쉽게 말해 여자가 밖에서 돈을 벌어오기란 매우 힘들다는 뜻이다. 기껏해야 공장에 취직해 겨우 입에 풀칠하는 정도가 최선이겠지.
“그건······.”
“말하기 힘든가요? 이해합니다. 저번에 직업란을 비워뒀을 때부터 어림짐작했습니다. 남한테 알리기 어려운 직업을 가지고 계신 거겠죠.”
일단 매춘부는 절대 아닐 것이다. 애초에 지금 시대의 성매매는 현대와는 느낌이 전혀 다르다.
물론 평범한 일보다는 많이 벌 수 있겠지만 그래봤자 결국 최하 계층의 먹고살기 위한 몸부림이나 다름없었다. 몇 개월 만에 그만한 돈을 모으는 건 불가능하다.
“줄리엣 씨라면 잘 해낼 거라 확신합니다. 저보다 취약 계층의 사람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는지도 잘 이해하겠죠. 원래 직업이 뭐였든 간에 더 떳떳하고 만족하며 살 수 있을 겁니다.”
사실 그녀를 선택한 이유는 또 있었다. 지금으로선 거의 샤론이라 확신하고 있지만 그녀도 셜록의 후보인 만큼 곁에 가까이 두고 조사해볼 생각이다.
물론 내가 가까이 가는 만큼 상대도 다가온다는 위험성이 있긴 하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재밌는 거다. 마치 치열한 눈치싸움 같달까. 누가 먼저 들키고 누가 끝까지 숨길 것인지 셜록과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는 것이다.
“물론 선택은 줄리엣 씨의 몫이지만요. 어떻습니까?”
나는 그녀를 정확히 응시하며 손을 내밀었다. 잠시 그 손을 빤히 바라보던 줄리엣은 이내 자신의 팔을 내밀어 부여잡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좋아요. 당신의 비서가 될게요.”
“역시 받아들이실 거라 믿고 있었습니다. 그럼 우선···.”
역시 아무리 봐도 샤론이랑 너무 닮았단 말이지.
그래서 존댓말이 너무 어색하달까.
“편하게 반말로 하겠네. 괜찮겠지?”
“네. 저는 사장님이라 부르면 될까요?”
“이사님이라 부르게.”
마음 같아서는 당장 업무 지시를 내리고 싶지만 오늘은 상쾌한 주말 아침이었다.
게다가 고용한 첫날부터 개같이 부려 먹을 수는 없지.
품에서 명함을 꺼내 그녀에게 주며 말했다.
“지난번에 왔던 사무실 기억하나?”
“네.”
“다음 주 월요일 5시부터 그리로 출근하게.”
“오후 5시요?”
“그래.”
아카데미가 4시 30분에 끝나거든. 나중에는 내가 없어도 알아서 굴러가게끔 시스템을 구축할 생각이지만 지금 당장은 어차피 내가 업무 내용을 가르쳐줘야 하니 5시에 출근시킬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밤에는 괴도 활동을 해야 하니 못해도 7~8시에 퇴근시켜야겠지.
그러면 업무 시간이 2~3시간밖에 안 되는 건가? 그렇게 일하면서 그만큼이나 받아 간다고?
내가 고용주이긴 하지만···.
너무 개꿀인데?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당장 이력서 제출해야겠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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