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32
수도원을 빠져나오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얘기는 아무런 막힘없이 잘 끝마쳤다. 사실 좋은 목적으로 후원하고 싶다는데 그런 순수한 호의를 거절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냐마는.
지원 액수를 들은 순간부터 내가 어떤 얘기를 꺼내도 무한 긍정만이 돌아왔다. 덕분에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일정이 끝나게 되었다.
재단 운영은 줄리엣이 출근하는 다음 주 월요일부터 본격적으로 개편할 생각이다.
따라서 지금부터 남는 시간은 괴도 추종자를 상대하는 데 집중하려고 한다.
물론 하루아침에 해결하기엔 쉽지 않겠지만 적어도 이번 주말 동안 확실히 초석을 다져놓아 율리아가 위험해지기 전에 드레이크를 처리할 수 있도록 말이다.
특히 이 문제는 가만히 놔뒀다간 율리아뿐만 아니라 나까지 위험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만약 드레이크가 저대로 계속 떠든다면 어느샌가 괴도 레이븐은 공산주의의 상징으로 변모해있을지 모른다.
만인의 평등이니 신분제 철폐니 당연히 중요한 사안인 건 맞다.
하지만 그런 민감한 정치적 문제에 내가 끼어들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정계에 출마할 생각이 전혀 없단 말이다.
지금 당장은 모임의 주도자인 드레이크가 사상을 퍼트리는 느낌에 가깝지만 시간이 지나면 모두가 동화되어 비슷한 생각을 가지게 될 것이다. 실제로 모임에 참여한 대부분이 괴도를 영웅이라 부르는 것만 봐도 상당히 진행됐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까 최대한 빨리 해결해야 한다.
계획은 어느 정도 짜두었으니 이제 남은 건 실제로 움직이는 것뿐.
“좋아.”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점검했다.
최근 들어서 자주 사용하고 있는 제3의 신분인 도일 르블랑. 뤼팽과는 달리 최대한 평범한 인상이 목표로 했기에 몰개성하다 표현해도 될 만큼 일반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변장이 완벽하게 이뤄졌음을 확인한 뒤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이며 집을 나섰다.
지하 모임에 향하는 건 오늘로써 세 번째인가.
오늘부터 나는 본격적으로 그들 속에 깊숙이 침투할 예정이다.
***
언제 와도 적응되기 힘든 분위기다.
클럽이라 생각하며 넘기려 해봐도 배경 음악이 EDM은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 순수한 연주다 보니 위화감이 느껴진달까.
게다가 스테이지에서 춤을 추는 사람도 없으며 전부 삼삼오오 자기들끼리 모여 떠들기 바쁘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있자면 클럽보단 차라리 재즈 바에 가깝지 않나 싶다.
구석에 적당히 자리를 잡고 무대를 지켜보고 있으니 누군가 이쪽으로 자연스레 다가왔다.
“안녕? 옆에 앉아도 되지?”
이제는 익숙하게 느껴지는 목소리.
블랑카가 고혹적인 눈웃음과 함께 허락도 받지 않고 옆자리를 차지해버렸다.
심지어 음식과 술까지 챙겨와서는 태연하게 먹기 시작하는 모습에 기가 찼다.
“다시 안 오는 줄 알았어.”
“그냥 한동안 바빠서요.”
“그래? 앞으로는 계속 올 생각?”
“매일은 힘들어도 자주 오고 싶긴 하네요.”
어쨌거나 이건 놓쳐선 안 될 기회였다. 저번에 잠깐 얘기를 나눠본 결과 그녀는 이 모임의 원년 멤버이자 드레이크와 개인적 친분이 두터운 것으로 보였으니까. 즉 드레이크에게 접근하기 위해선 블랑카의 도움이 필수적이었다.
“한잔 마실래?”
“괜찮아요.”
“에. 시시한 남자네.”
이래 봬도 엄연히 미성년자라고. 물론 괴도로 활동하는 시점에서 그게 무슨 상관인가 싶겠지만.
테이블에 놓인 맥주잔과 음식을 잠시 쳐다보았다. 뒤이어 다른 자리도 힐끗 살펴보니 대부분 비슷한 세팅인 것을 확인하고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여긴 전부 공짜인 거죠?”
“응? 그렇지. 왜?”
“매일 이렇게 유지하는 게 가능한가 싶어서요.”
단순 음식과 술값뿐만 아니라 매일 같이 무대도 준비한다. 적어도 연주가 듣기 거슬린 적은 한 번도 없는 걸 생각하면 분명 전문 연주자를 섭외하는 건 분명한데 그만한 자금이 어디서 나오는 걸까?
이 정도면 최소한 입장료나 음식값은 받아도 이상하지 않다. 그럼에도 굳이 전부 공짜로 베푸는 건 당연히 본인의 사상을 널리 퍼트리기 위해서겠지만. 드레이크는 과연 이만한 돈을 어디서 충당하는 걸까?
내 옆에 앉아있는 이 여자라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대답을 기대하며 빤히 응시하자 블랑카는 작게 콧소리를 내며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난 잘 모르겠네.”
“그렇군요.”
아쉽긴 하였으나 굳이 미련을 드러내진 않았다.
“궁금하면 직접 물어보는 게 어때?”
“직접요···?”
“드레이크는 먼저 다가오는 친구를 환영하거든. 특히 영웅님께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속으로 콧방귀를 꼈다. 저 녀석이 괴도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을 환영한다고?
자기 사상에 껌뻑 넘어가 줄 만한 사람을 찾고 있는 거겠지.
그렇지만 제안을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계획을 위해서는 드레이크와 친분을 쌓으며 입지를 다질 필요가 있었으니까.
“잘됐네요. 안 그래도 저번에 무대에서 하는 말을 듣고 한번 얘기해보고 싶었거든요.”
“그랬어? 그땐 별로 관심 없어 보였는데 내 착각이었나 보네. 그럼 이참에 내가 소개시켜줄게. 잠깐 따라와.”
자리에서 일어나는 블랑카를 뒤따라 움직였다. 저편에서 누군가와 여유롭게 대화를 나누던 드레이크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우리를 발견하고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이게 누군가? 우리 오랜 친구가 직접 찾아올 줄이야.”
“잠깐 시간 괜찮아? 얘가 너를 꼭 만나보고 싶다길래.”
“흠. 그쪽은 처음 보는 얼굴이군. 물론 새로운 친구도 언제나 환영이지.”
옆에 앉아있던 사람을 물린 뒤에 빈 옆자리를 툭툭 치며 앉으라는 제스처를 취하는 드레이크.
나는 사양하지 않고 착석하며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도일입니다. 저번에 한 번 왔었을 때 드레이크 씨의 연설을 감명 깊게 들었거든요.”
“과찬이로군. 난 아직 한참 부족해. 전부 친구들이 옆에서 도와준 덕분이지.”
“아니요.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엄청난 충격을 받았달까요. 특히 신분제를 철폐하고 모두가 평등한 사회를 만들자니. 저로서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접근법이었어요.”
우선 마음에도 없는 칭찬을 늘어놓으면서 금칠을 해주었다.
다행히 내 말에서 이상한 점을 눈치채진 못했는지 녀석은 환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건 당연한 거야. 나 역시 영웅님이 아니었다면 진실을 깨닫지 못했을 테니까.”
“정말 대단해요. 어떻게 괴도 레이븐이 그런 생각을 품었단 사실을 눈치챈 건가요?”
“그야 물론 친구들과 영웅님에 관한 얘기를 나누며 알게 된 거지. 그래서 내가 이 모임에 최선을 쏟아붓는 거고.”
이쯤 되니까 나도 살짝 헷갈릴 정도였다. 설마 진짜로 괴도가 그런 사상을 지녔고 자신은 그걸 발견한 것뿐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다른 의미로 더 심각한데.
어차피 녀석의 꿍꿍이는 전부 밝혀질 것이다. 그러니 지금 당장은 최대한 놈의 마음에 들어 가까워져 측근이 되어야 한다. 쉽게 말해 드레이크가 나를 믿고 오른팔로 써먹을 만큼의 신뢰를 쌓을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선 단순히 놈을 찬양하는 것만으론 부족하다. 거기서 더 나아가 놈이 나를 이용하고 싶게끔 능력을 드러내야 한다.
당연히 여기서 말하는 능력이란 자신의 사상을 잘 퍼트리는 데 도움이 될만한 무언가를 뜻한다.
이미 방법은 정해두었다. 사실 이건 너무나 쉬운 문제였다.
이제 막 산업혁명이 시작되며 왕권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시대. 이제야 막 자유주의니 공산주의니 사상이 등장하려는 시점에서 난 21세기 출신으로서 무려 200년이나 발전된 지식을 알고 있다.
물론 내가 이념과 사상을 전문적으로 배운 적은 없기에 지식수준이 매우 얕긴 해도 어쨌거나 알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한마디로 내가 상대성 이론은 거의 모르지만 뉴턴의 앞에서 광속은 절대적이며 시간과 공간은 상대적이란 것쯤은 말할 수 있다는 거다. 그것만으로도 역사는 엄청나게 바뀌지 않을까?
따라서 나는 드레이크와 대화를 나누며 적당하게 현대적인 관점을 내비쳤다.
예를 들면 모든 국민에게 선거권을 부여한다거나 인종 차별을 금지하고 정치·종교적인 자유를 인정해줘야 한다는 등. 21세기의 관점으로선 지극히 당연하고 정상적인 얘기들이었다.
“···전부 혼자서 생각한 것들인가?”
“저번에 연설을 듣고 난 뒤로 자꾸 생각이 나더라고요. 그래서 드레이크 씨는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해서···. 제가 너무 오버했죠?”
“아니야. 이건···. 정말로 대단해. 굉장히 혁신적이야. 마치 미래에서 실제로 보고 온 것처럼.”
솔직히 좀 뜨끔했다. 표정으로 티 나지는 않았겠지?
아무튼 내 얘기를 들은 드레이크는 대단히 만족스럽단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방금 말해준 것 말고도 더 있나?”
“어···. 있긴 한데 아직 제대로 정리를 못 해서요. 너무 뜬구름 잡는 것도 많고···.”
“물론 그렇겠지. 천재의 머릿속은 언제나 복잡한 법이니까. 내 생각엔 우리가 아주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친구만 괜찮다면 앞으로도 매일 얘기를 나눠보고 싶을 정도야.”
좋아. 계획했던 대로 무사히 흘러가자 나도 싱긋 미소를 지어주며 대답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드레이크 씨.”
“나야말로. 도일.”
성공적으로 얘기를 매듭짓고 고개를 돌리던 찰나.
옆에서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이쪽을 쳐다보던 블랑카를 발견하고 말았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이제 20222년도 얼마 안 남았네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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