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33
그녀의 표정은 순식간에 원래대로 돌아왔다.
무심코 착각이라 넘길 만큼 찰나에 불과한 변화. 하지만 내가 잘못 봤을 리는 없다.
당황스러웠다.
블랑카가 저런 눈빛으로 나를 쳐다볼 이유가 있나? 내가 말한 내용 중에 어딘가 문제라도 있던 건가?
아니 그랬다면 드레이크가 그냥 넘어갔을 리 없다. 그는 오히려 대단히 만족스럽다는 듯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으니까.
그럼 어째서일까.
어쩌면 괴도 추종자와 상관없이 그녀 개인의 무언가를 건드린 걸지도 모른다. 정확히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알아낸다면 오히려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
“좋은 친구를 사귀게 되어 기쁘군.”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앞으로 자주 만나면 좋겠네요.”
일단 드레이크와의 대화를 마무리한 뒤에 다시 우리가 원래 앉아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마치 표정을 보여주지 않겠다는 듯이 앞장서서 성큼성큼 걸어가는 블랑카.
“솔직히 놀랐어. 설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거든.”
“그런 생각이란 게 무슨 뜻인가요?”
“세상을 바꾸겠다는 생각 말이야. 전에도 말했던 건데 넌 이런 쪽에 딱히 관심이 없어 보였으니까.”
상당히 예리하군. 그녀의 말대로 난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엔 별 관심 없다.
방금 내가 신나게 떠든 것도 어디까지나 드레이크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일 뿐이니까.
“아까 말한 것들. 정말로 혼자 다 생각한 거야?”
“네. 믿기 힘드신가요?”
“솔직히 조금? 며칠 만에 그렇게까지 떠올리는 게 가능한가 싶어서.”
지금 반응도 그렇고 블랑카가 내 얘기를 신경 쓰는 건 확실했다. 정확히 어떤 부분에서 무슨 이유 때문인 건지는 아직 밝혀내지 못했지만.
“그런 생각은 예전부터 어렴풋이 가지고 있었어요. 며칠 전에 여기 오게 된 후로 뚜렷해진 거죠.”
“그렇구나. 넌 드레이크랑 좋은 친구가 되겠네.”
“블랑카 씨는요?”
“응?”
내 물음에 드디어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마주하게 된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첫 단추는 무사히 끼웠으나 계획은 여전히 변함없었다.
이 집단에 깊숙이 파고들기 위해선 그녀의 도움이 필수적이었다. 드레이크의 관심을 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확실한 내 편이 필요하단 뜻이다.
“저는 블랑카 씨와도 친해지고 싶어요.”
“···너.”
오묘한 눈빛으로 나를 지그시 응시하던 블랑카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의외로 저돌적이네. 그런 남자도 싫지는 않아.”
음.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는데 말이지.
차라리 저대로 오해하게 놔두는 편이 더 나으려나?
“저한테 제일 먼저 말을 걸어주셨잖아요. 오늘도 먼저 와서 챙겨주시고.”
“길 잃은 강아지처럼 애처로운 눈망울을 하고 있으니까 그냥 지나치기가 어렵더라고.”
···내가 그랬었다고? 대체 어떤 시선으로 바라봐야 그런 모습이 될 수가 있는 거지?
일단 나를 대하는 태도로만 봐선 딱히 적대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아니면 본심을 철저하게 숨기고 두꺼운 가면을 쓴 걸 수도 있다.
오늘은 이만 떠날 시간이다. 굳이 억지로 자리에 앉아있어봤자 달라질 것도 없으니.
중요한 건 천천히 신중하게 이 공간에 섞여드는 것이다.
“앞으로 자주 보겠네.”
“네. 특별한 일 없으면 매일 오려고요.”
“너무 실망하지는 마.”
“네?”
“여긴 그렇게 재밌고 신나기만 한 낙원은 아니거든.”
그렇게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꽤 의미심장한 말이긴 했다.
제일 처음부터 가장 오랫동안 소속되어있던 그녀가 저렇게 얘기한다는 건 이 지하에 뭔가 숨겨진 비밀이 남아있다는 뜻일 테니까.
그게 뭔지는 지금부터 차근차근 확인해봐야겠지.
***
다음날. 화창한 아침 햇살을 받으며 잠에서 깨어났다.
이렇게 여유로운 주말 기상이 얼마 만인지 기억이 안 날 정도다.
[오늘의 일정은 어떻게 되느냐?]
“오늘은 하루종일 괴도 추종자에만 집중해보려고요.”
재단 관련 업무는 어제 전부 처리해뒀다. 남은 건 줄리엣이 출근한 뒤부터 같이 해나가면 되는 문제고.
일요일이라 아카데미에 나갈 필요도 없고 특별한 약속도 없으니 오늘은 본격적으로 괴도 추종자에만 집중할 예정이다.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그냥 집에서 빈둥거리며 안락한 휴식을 취하고 싶지만 욕망을 꾹 참아내며 아침부터 변장을 시작했다.
엊그제 율리아와 함께 지하에 방문할 때부터 궁금한 점이 하나 생겼다.
해가 지기 전의 지하는 과연 어떤 상태일까? 모임 자체는 매일 저녁이 되고 나서야 열리는 걸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전에는 그냥 출입 불가인 걸까? 아니면 다른 무언가 있는 걸까.
지금부터 그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지하로 향해볼 생각이다.
“부디 뭔가 있어 줬으면 좋겠네요.”
[그러게나 말이다.]
기대 반 불안감 반으로 집을 나섰다. 이렇게 밝은 시간대에 지하 근처에 다다르니 색다른 기분이었다. 마치 대낮에 유흥가를 보는 느낌이랄까.
밤에는 항상 입구 앞을 가로막던 가드가 지금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따로 입구가 닫혀있지도 않고 그냥 겉보기엔 방치된 것처럼 보였다.
주변을 슬쩍 살펴보다 일단 건물 입구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래로 내려가는 어두컴컴한 계단. 원래라면 여기서부터 음악 소리가 새어 나와야 하는데 지금은 매우 고요했다.
아무도 없는 건가? 발소리를 죽인 채로 살금살금 지하로 내려갔다. 예상과 달리 살짝 열려있는 문틈. 그 너머로부터 나지막한 대화 소리가 흘러나왔다.
“슬슬 상승세가 주춤하는 느낌이야.”
“어쩔 수 없지. 사실 이 정도로도 충분한 수준이고.”
꽤 익숙하게 들리는 목소리. 드레이크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듯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즉시 몸을 낮추고 둘의 얘기를 엿듣기 시작했다.
“오늘 무대 가수는 섭외했나?”
“어. 그만한 돈을 주는데 거절할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 요즘에는 아예 소문이 퍼졌다던데. 괴도 추종자 모임에서 섭외 문의가 오면 무조건 잡아야 한다고.”
“흐흐. 아주 좋군.”
“드레이크. 물론 우리야 너무 좋지만 정말로 괜찮은 거야? 그렇게 돈을 펑펑 써도 아무 문제 없어?”
내가 궁금했던 내용을 때마침 언급해주는 상대방. 그나저나 이렇게 따로 만나서 단둘이 대화할 만큼 가까운 사이인데도 돈의 출처를 모른다니.
그 말인즉슨 이 모임은 드레이크가 혼자 관리하는 수준에 가깝다는 거겠지.
“됐어. 너흰 그런 쪽에 신경 쓸 필요 없다 했잖냐.”
“그래도 말이야. 정 뭣하면 우리라도 돈을 좀 걷어서···.”
“친구들한테 상납을 요구하라고? 됐으니까 이 얘기는 더 꺼내지 마.”
솔직히 좀 놀랐다. 당연히 전형적인 속내 시커먼 악당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의리 넘치는 녀석이었던 건가?
하긴 생각해 보면 녀석의 사상이 너무 극단적이라 피해를 줄까 걱정될 뿐이지 현대적인 시각으로 봤을 때 사상 자체에 문제가 있는 건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지향해야 할 올바른 방향이라 표현해도 무방하리라.
잠깐만. 그보다도 너희? 친구들? 분명 저기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둘 뿐인데 어째서 복수형으로···.
“어이. 뒤지고 싶냐?”
그때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살벌한 멘트. 황급히 고개를 돌리자 위에서 내려오던 사나운 인상의 남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뭐 하는 새끼길래 이렇게 쥐새끼처럼 엿듣고 있을까. 엉?”
이거 상당히 잘못 걸린 느낌인데. 어떻게든 탈출구를 모색하던 도중 남자의 뒤에서 따라 들어오는 사람을 확인하고는 눈을 부릅떴다.
“어라? 우리 귀염둥이가 이 시간에는 웬일이래?”
대체 언제부터 내가 ‘우리 귀염둥이’로 전직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선 오히려 너무나 좋은 애칭이었다. 그녀와의 관계가 돈독해 보일수록 위기에서 빠져나갈 확률도 올라가니까.
“뭐냐. 블랑카. 너랑 아는 사이였어?”
“드레이크가 말했던 그 애야.”
“아 그렇구만.”
순식간에 험악하던 표정을 지우고 너털웃음과 함께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는 남자.
아무리 오해가 풀렸다고 해도 태도 변화가 너무 급작스러운 거 아니야?
어쨌든 위기를 넘겼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와중.
뒤에 있던 블랑카가 어느새 바짝 다가와선 내게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
“그런데 진짜 왜 온 거야?”
“그냥···. 근처를 지나갈 일이 있었는데 생각이 나서요?”
“흐응. 그렇구나. 잘됐네! 안 그래도 언제 한번 따로 부르려고 했거든!”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다. 결국 이 모임도 조직인 이상 중심 세력이 있을 것이며 내가 드레이크의 마음에 든 순간부터 그쪽에 자연스레 합류하는 것이 기본 계획이었으니까.
“밖에서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밌게 나누나?”
그때 우리의 대화가 안에서도 들렸는지 드레이크가 직접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나와 정확히 마주치는 시선. 그렇게 몇 초가 흘렀을까.
서서히 녀석의 입꼬리에 미소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게 누구야. 우리 새로운 친구가 찾아왔군.”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의리 넘치는 사상가 드레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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