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34
나는 아직 괴도 추종자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다.
특히 조직원은 드레이크와 블랑카를 제외하면 아무도 모르는 상태였으니까.
오늘 이렇게 대낮에 지하를 방문한 건 결과적으로 좋은 선택이 됐다. 곧바로 이 조직의 핵심 인원과 접촉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여기는 로버트. 가장 듬직한 친구지.”
“앞으로 잘 부탁한다고. 도일.”
내게 솥뚜껑만 한 손을 내미는 우락부락한 대머리 덩치. 아까 블랑카와 함께 내려와 살벌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던 그 남자였다.
“그리고 이쪽은 알프레드. 누구보다 믿을 만한 친구야.”
“드레이크한테 얘기 들었어. 대단하던데?”
이쪽은 반대로 호리호리하면서 허수아비가 떠오르는 남자였다. 환하게 웃는 인상 덕분에 쾌활하며 친근한 이미지를 주었다.
“블랑카는 굳이 소개할 필요 없을 테고.”
“너무하네. 사람 차별하는 거야?”
가볍게 농담을 주고받는 두 사람은 상당히 친해 보였다. 하긴 모임이 설립되던 처음부터 함께해온 원년 멤버라고 했으니 당연한 건가?
그리고 뒤이어서 새로운 얼굴도 등장했다. 구릿빛 피부와 노출도가 상당한 복장이 꽤 잘 어울리는 강한 인상의 여인이었다.
블랑카도 그러더니 왜 여기 여자들은 하나 같이 옷차림이 파격적인 걸까.
“오. 레이나. 마침 잘 왔군.”
“거기 있는 얼빵한 애는 누구야?”
“블랑카의 남자친구.”
“헤. 그래?”
덩치의 농담에 내가 뭐라 반박할 틈도 없이 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얼굴을 뚫어져라 살펴보는 갈색 피부의 여인.
“블랑카. 너 이런 타입이 취향이었어?”
“어머. 그게 무슨 뜻일까.”
“온갖 남자들이 들이대도 어물쩍 넘어가길래 남자한테 아예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닌 모양이네?”
내 기억 속의 첫인상이랑은 너무 다른데? 당연히 나한테 그랬던 것처럼 아무한테나 불쑥 먼저 다가와서 눈웃음치는 모습을 상상했더니 아무래도 내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잠깐만. 그럼 나한테는 왜 먼저 다가온 거지?
그녀는 나를 슬쩍 흘겨보더니 특유의 눈웃음과 함께 능글맞은 태도로 대답했다.
“응. 나는 귀여운 남자가 좋거든. 이런 징그러운 남정네들은 싫어.”
“어이. 지금 그거 누구보고 하는 소리냐?”
“글쎄? 왜? 혹시 찔려?”
사실 여기서 나를 제외한 세 남자는 모두 귀여움과는 거리가 멀긴 했다.
대머리 덩치는 말할 것도 없고 드레이크 역시 그에 뒤지지 않게 마초적인 느낌을 물씬 풍겼고 허수아비는 그냥 키가 더럽게 커서 도저히 귀엽게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귀엽다는 것도 좀 이상하긴 했다.
지금은 변장 중인 도일은 평범함을 중시한 만큼 몰개성에 가까울 정도로 흐릿한 인상이었으니까.
그냥 블랑카가 나를 놀리려고 적당히 말을 꺼낸 거거나 아니면 취향이 되게 독특한 거겠지.
어쨌든 분위기는 상당히 좋아 보였다.
너무 딱딱하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위계질서가 흐트러진 느낌도 없었다.
적어도 지금까지의 모습만 봤을 때는 리더인 드레이크를 중심으로 잘 조직되었다고 고개를 주억일 정도였다.
“대강 다들 모인 것 같으니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지.”
나를 포함해 여섯 명만이 자리한 지하 공간. 한 테이블에 둘러앉은 뒤 드레이크가 자연스럽게 얘기를 주도해나갔다.
“안 그래도 이른 시일 내에 부르려 했는데 잘 됐군. 우리의 새로운 친구여. 여기에서의 모임이 어떤 식으로 운영되는지 알고 있나?”
“어 글쎄요?”
“뒤에서 기꺼이 자원해주는 일꾼들의 희생 덕분이지.”
뜬금없는 주제에 눈을 깜빡이고 있으니 설명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로버트는 보안과 경호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이렇게 듬직한 친구가 지켜주니 모두가 안심할 수 있는 거지.”
“하하. 별말씀을.”
확실히 어울리긴 한다. 그런데 저번에 입구 앞에 있던 가드는 대머리가 아니지 않았나?
저렇게 개성적인 헤어스타일이면 내가 기억 못 할 리가 없는데.
“알프레드는 공연을 비롯해 무대 전체를 관리한다. 이 친구만큼 발이 넓고 믿음직한 녀석이 없거든.”
“신입. 원하는 가수가 있으면 언제든지 부담 없이 말하라고.”
그래서 아까 둘이 얘기를 나눌 때 무대 섭외 주제가 나왔나 보군. 서글서글한 인상에 나한테도 아무렇지 않게 친한 척 다가오는 걸 보면 잘 해낼 것 같긴 했다.
“레이나는 음식과 술 담당이다. 요리를 한 번이라도 먹어봤다면 그녀의 실력이 어떤지는 설명할 필요도 없으니까.”
“그렇게 비행기 태워도 나올 거 없거든?”
새침하게 대꾸하며 팔짱을 끼는 레이나. 솔직히 이건 좀 의외였다. 요리보단 좀 더 활동적인 일을 좋아할 것 같은 인상이었으니까.
“마지막으로 블랑카는 외부 홍보를 총괄하고 있다. 네가 어디서든 지하에서 열리는 모임에 관해 들었다면 그녀의 노력 덕분인 거겠지.”
“사실 내 업무는 다른 애들도 알아서 해주니까 딱히 할 것도 없지만 말이야.”
외부 홍보라. 그렇다면 내가 처음 들었던 괴도 추종자에 관한 소문도 출처를 거슬러 올라가면 블랑카로부터 시작됐다는 건가?
어쩌면 처음 왔을 때 나를 반겨준 이유도 그냥 담당 업무가 그런 쪽이라서일지도.
드레이크의 말을 끝까지 기다렸지만 더 이어지지 않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럼 드레이크 씨는요?”
“내가 하는 일은 별 볼 일 없어. 그냥 친구들과 신나게 떠들면서 자금을 대는 것뿐이지.”
“바보야. 그게 제일 중요한 일이거든?”
레이나의 핀잔대로 결국 지금의 모임은 돈이 끊기면 곧장 중단될 수밖에 없다.
가수 섭외는커녕 음식과 술값 더 나아가 건물의 임대료를 못 내서 쫓겨날지도 모르니까.
“물론 혼자서 그런 막중한 업무를 전부 처리하긴 힘들지. 그래서 보통은 마음이 맞는 친구들을 모아 팀을 꾸리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경호팀이나 요리팀처럼 말이야.”
아하. 내가 전에 봤던 입구 앞 가드는 대머리 밑에 소속된 경호팀 일원인 모양이다.
정리해보자면 일꾼이라 표현하긴 했지만 결국 이 모임을 이끌어가는 최측근 간부들에 대한 설명이었다. 즉 예상했던 대로 괴도 추종자의 핵심 인원이 바로 여기 앉아있는 다섯 명이란 뜻이다.
그리고 이런 얘기를 내게 알려준다는 것은.
“도일. 혹시 너도 이 지하를 위해 일꾼이 되어볼 생각은 없나?”
역시나였다. 드레이크는 지금 나를 간부로 스카웃하고 있는 것이다.
정확히 내가 바랐던 흐름이긴 하지만 냉정하게 따지자면 너무 진도가 빠르긴 했다.
당장 주변에 있던 다른 녀석들도 상당히 당황한 눈치였다. 즉 이건 다섯 명이 합의한 내용이 아니라 순수하게 드레이크 혼자 결정한 문제라는 거겠지.
어제 내가 흘렸던 얘기가 그만큼이나 매혹적이었나? 나를 어떻게서든 이 조직에 끌어들이기 위해 감투를 제안하는 건가?
“잠깐. 그건 너무 성급한 거 아니야? 우린 아직 이 녀석이 어떤지도 전혀 모르잖아.”
가장 먼저 반대표를 던진 사람은 레이나였다.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면서 팔짱을 꼈다. 자신의 불만을 겉으로 팍팍 드러내고 있었다. 물론 저런 반응도 이해는 갔다. 솔직히 이건 내가 봐도 성급한 결정처럼 보이긴 했으니까.
찬성의 뜻을 내비친 건 의외로 허수아비 알프레드였다.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언제는 우리가 그런 걸 진지하게 따졌나? 애초에 우리는 체계적인 조직이 아니라 그냥 서로 좋아서 모이는 친목회잖아. 친구가 되는 조건은 딱 하나뿐이란 걸 잊었어?”
그 하나가 뭔지는 듣지 않아도 대충 짐작 갔다. 조직 이름만 생각해봐도 괴도를 좋아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식의 내용이리라.
드레이크는 굳이 먼저 얘기를 꺼내지 않고 오히려 남은 이들의 생각을 물었다.
“로버트. 네 생각은 어떠냐?”
“네가 그렇게 결정했다면 이유가 있겠지. 그래도 레이나의 생각도 이해는 돼. 요즘 들어서 분위기가 점점 극단적으로 변해가는 거 알잖아.”
“···그래. 그렇긴 하지.”
분위기가 극단적으로 변해간다?
그냥 넘기기 힘든 중요한 단서인 것 같지만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알기는 어려웠다.
“블랑카의 생각은 굳이 듣지 않겠다. 왜 그런지는 이해하겠지?”
“어머. 누가 들으면 진짜 나랑 우리 귀염둥이가 사귀는 줄 알겠어.”
“좋아. 너희들의 생각은 잘 알았다. 친구의 의견을 무시할 수야 없는 법이지. 내가 너무 성급했던 것 같기도 하군.”
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했지만 막상 눈앞에서 기회를 잃으니 아쉽게 느껴지긴 했다.
바로 간부가 되었으면 목표했던 계획도 금방 성공할 수 있었을 테니까.
“그럼 막 합류한 신입이니만큼 견습 기간을 두도록 하자고. 블랑카.”
“응?”
“너랑 같이 홍보 일을 하면서 이 지하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도일에게 잘 가르쳐줘라.”
블랑카는 손톱을 정리하며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난 원래 혼자 활동하는 거 몰라?”
“네 귀염둥이니까 네가 책임져야지. 싫나?”
“싫다고는 안 했는데. 음···. 좋아. 둘이서 오붓하게 다니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이니까.”
“그럼 결정됐군.”
저기 내 동의는 구하지도 않고 그렇게 일방적으로 결정해버리는 거니?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우리는 깐부잖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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