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38
저녁을 먹고 우리는 다시 지하로 돌아왔다.
어쩌다 보니 내가 원래 생각했던 계획과는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이 기회를 잘 붙잡는다면 훨씬 수월하게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블랑카가 제안한 작전은 매우 간단했다. 삼자대면으로 얘기를 나누며 드레이크의 본심을 파헤치고 설득을 시도한다. 웬만하면 끄떡도 안 하겠지만 일단 지금 당장은 거기까지만 생각하자.
어차피 블랑카가 뒤에서 받쳐주는 한 제아무리 드레이크라도 우리를 함부로 건들긴 힘들 테니까. 고작 얘기 몇 마디 나눈 걸로 그렇게 과민 반응할 리도 없을 테고.
“오. 친구들. 나만 쏙 빼놓고 어딜 갔다 이제 오나?”
때마침 우리와 마주친 드레이크가 섭섭하다는 말투로 우리의 행선지를 물었다.
“애기들 저녁이나 사주고 왔지. 나름 홍보팀인데 이 정도는 해줘야 하지 않겠어?”
“그렇고말고. 역시 우리 블랑카밖에 없군.”
“우웩. 그딴 말은 네 여친한테나 하지 그래?”
헛구역질까지 하며 싫은 티를 풀풀 내던 블랑카는 그대로 드레이크를 지나쳐 항상 앉던 자리로 향했다.
방금 말다툼 속에서 흘려들을 수 없는 내용이 있었다.
“드레이크 씨 애인이 있었군요.”
“응? 내가 말 안 했던가? 레이나랑 드레이크랑 사귀는 사이야.”
레이나라면 요리 총책임 간부인 구릿빛 피부의 여자였다.
드레이크의 결정에 주저 없이 반대표를 던지길래 뭔가 했더니 설마 둘이 연인이었을 줄이야.
일단 이 정보는 나중에 써먹을 수도 있으니 기억해두기로 했다.
“아 공연 시작하네요.”
무대로 올라와 연주를 시작하는 가수와 밴드. 그와 동시에 지하의 분위기가 한층 더 달아오르며 왁자지껄 떠들어댄다.
우리는 굳이 움직이지 않고 테이블에 얌전히 앉아있었다. 어차피 이렇게만 있어도 상대 쪽에서 먼저 접근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드레이크는 시간이 지나자 자연스럽게 우리 테이블로 다가왔다.
“다들 즐거운 시간 보내고 있나?”
“아 드레이크 씨. 덕분에요.”
“내가 한 게 뭐 있다고. 전부 뒤에서 헌신해준 친구들 덕분이지.”
말은 참 잘한다. 일상적으로는 잘 쓰지 않는 어휘를 능수능란하게 사용하는 것도 그렇고 전형적인 사기꾼이나 선동꾼의 느낌을 물씬 풍긴달까.
“그나저나 설마 둘이 이렇게 친해질 줄은 몰랐는데. 참 보기 좋군.”
그렇게 말하며 나와 율리아를 번갈아 바라본 뒤 흡족한 미소를 짓는 드레이크.
사실 우리는 딱히 친하지 않다. 정확히 말하면 변장한 상태의 도일과 율리아는 굉장히 어색한 사이였다. 중간에 친화력 만렙인 블랑카가 끼어있어서 티가 나지 않을 뿐 사실 단둘이 얘기를 나눈 적은 한 번도 없으니까.
그렇지만 우리는 일부러 친해진 척 연기하며 그를 속였다. 그래야 곧 시작될 삼자대면 토론에서 조금이나마 유리한 고지를 가져갈 수 있으니까.
나는 환한 웃음을 꾸민 채로 본격적인 연기에 돌입했다.
“율리 씨와 얘기를 나누면서 정말 많이 배웠거든요. 드레이크 씨랑 같이 셋이서 만나는 것도 정말 기대됐고요.”
“하하. 우리는 마음이 상당히 잘 맞는군. 사실 나도 너와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런 생각을 품게 되었으니까.”
자연스레 우리의 시선이 아직 얘기를 꺼내지 않은 소녀에게 향했다.
율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어색함 없이 자연스럽게 대답을 내놓았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여기서 이렇게 마음이 잘 맞는 분들을 만나게 돼서 기뻐요.”
세 사람 다 암묵적인 동의를 한 셈이다. 즉 이제부터 본격적인 삼자대면이 시작되는 것이다.
블랑카는 한 발짝 떨어져 우리를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대화의 주도권은 드레이크가 쥐었다. 그가 이곳의 리더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 둘에게 폭풍처럼 쏟아지는 질문들. 적어도 이 남자가 허투루 이 자리에까지 올라오지 않았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되었다.
드레이크의 말은 유창했다. 거기에다 나름의 근거까지 제법 탄탄하게 갖춘 상태였다.
비록 모든 얘기의 결론은 더 나은 세상으로 귀결되었지만 적어도 어떻게서든 괴도와 연관 지으려는 노력이 언뜻 들어도 느껴졌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렇게까지 할 자신이 없었다. 내가 그의 흥미를 끈 것은 21세기 현대적인 관점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걸 괴도와 연관 지어 나만의 사상으로 만들 만큼의 견식은 부족했다.
덕분에 시간이 지날수록 대화는 드레이크와 율리아의 단판 승부로 변해갔다. 나와 달리 율리아는 괴도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진심이었으니까.
“즉 궁전 습격 사태는 영웅이 더는 브리튼의 군주제를 좌시하지 않으리란 선전 포고이다.”
“아니요. 그렇게까지 결론 짓는 건 과민 해석이에요. 무엇보다 레이븐은 시민의 안전에 각별히 신경 쓰는 상냥한 사람이에요. 급진적인 신분제 철폐는 많은 피를 불러일으킨다는 걸 모를 리 없어요.”
어지럽네. 몇 번을 들어도 적응이 되질 않는다.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이라도 내 정체를 밝히고 제발 그만하라고 애원하고 싶을 정도다.
흐름은 처음부터 쭉 비슷하게 이어졌다. 드레이크가 먼저 괴도를 근거로 자기 사상을 떠들어대면 율리아가 괴도를 근거로 반박한다. 마치 성경의 내용만을 가지고서 교리를 해석하기 위해 옥신각신하는 종교 지도자들 같은 모습.
“도일.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내게 화살이 날아왔다. 이럴 때는 대부분 율리아의 의견을 지지해줬으나 계속 그러면 의심할 테니 적당히 반대편도 들어주거나 중도에 서기도 했다.
“음. 신분제를 철폐한다고 꼭 왕실까지 없애야 하는 걸까요?”
“당연한 거 아닌가?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모두가 평등해지겠나?”
“물론 모두가 평등해지는 것도 좋지만 많은 사람은 여전히 왕실에 충성하고 있잖아요. 억지로 없앴다간 반발만 심해질 테니 차라리 상징으로 남겨두고 영향력을 축소하는 거죠.”
“흠···.”
내가 하는 말은 그냥 21세기의 영국을 떠올리며 대충 얘기한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의외로 내 주장이 그럴듯하게 들렸는지 드레이크는 물론이고 율리아 역시 감탄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아니 너는 대귀족이면서 왜 납득했다는 표정인 건데.
그 뒤로도 한동안 얘기는 더 이어졌다. 그러면서 유의미한 변화가 생겼다.
드레이크가 율리아를 바라보는 시선 속에 약간의 껄끄러움이 담기게 된 것이다. 무슨 말을 해도 주구장창 반대 의견만 내놓으니 당연히 꺼림칙할 수밖에 없겠지.
그와 반대로 나에게는 더 살갑고 친근하게 대한다. 어느 한쪽에 너무 치우치지 않고 중립적인 모습을 보여줬던 덕분인 듯했다.
내게는 그야말로 최고의 상황이었다. 드레이크의 신임을 얻을수록 계획의 성공률은 더 올라가는 거니까.
“아쉽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다른 친구들에게도 가봐야 할 것 같아서. 정말 좋은 시간이었다.”
“저도요. 다음에도 또 이렇게 얘기 나눌 수 있으면 좋겠네요.”
마침내 녀석이 테이블에서 사라지자 블랑카가 잽싸게 우리 사이에 끼어들었다.
“다들 수고했어. 얘기해 보니까 어때?”
율리아는 약간 어두운 표정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언니 말이 맞는 거 같아요. 말을 섞을수록 레이븐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생각한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그래. 역시 그렇구나.”
저 두 사람. 어느 새에 저렇게 친해졌대? 심지어 친근하게 언니라고 부를 정도라니.
드레이크에게 경계심이 생긴 건 좋은데 저러다 오히려 블랑카와 너무 가까워져서 괴도 추종자에 더 애착을 갖게 되는 거 아닌가 걱정된다.
“블랑카 씨.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나도 잘 모르겠네. 평소에 의심하긴 했는데 막상 사실로 밝혀지니까 이상한 기분이야.”
그야 그렇겠지. 여태 봐온 모습으로 생각하면 두 사람은 딱히 나쁜 관계가 아니다.
약간 티격태격해도 서로 친구이자 조직의 동료로서 인정하는 느낌이 강했다.
여기서 무작정 드레이크를 끌어내리자고 제안해도 그녀가 받아들일 리 없다. 그렇게 과격한 방법에 찬성할 리가 없지. 차라리 놈을 어떻게든 설득해 괴도를 좋아하도록 만들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런 미적지근한 방법은 아무 의미 없었다.
해결할 거면 확실하게 조직 전체를 와해시키거나 드레이크를 끌어내려야 했다.
“그러면 이렇게 하는 건 어때요?”
그렇기에 나는 여태껏 구상하고 있던 계획을 약간 변형시켜 그녀들에게 알려주었다.
“정말로 그게 가능할까···?”
“너무 도박수 아닌가요?”
우려를 표하면서도 꽤 혹한 듯한 눈길. 정말 그게 가능하다면 당장이라도 승낙할 것 같은 눈치였다.
“일단 해보는 거죠. 가만히 손가락만 빨고 있는 것보단 낫지 않겠어요?”
이렇게 말해두긴 했지만 내 계획은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바로 괴도 레이븐이니까.
결국 두 사람은 내 제안보다 나은 계획을 떠올리지 못했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더는 이 지하에 굳이 앉아있을 이유가 없었다. 우리는 작별을 고하고 각자 갈 길을 떠나 헤어졌다.
내 발걸음은 집으로 향하지 않았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고된 일정을 소화했으나 안타깝게도 아직 마지막 일정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지하 건물로 향했다.
이번에는 도일이 아닌 괴도 레이븐으로서.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기습 팬싸인회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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