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39
우선 몸을 숨기고 몰래 잠입했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속 편하게 대놓고 등장해서 강제 해산시키고 싶었다.
그래도 나를 좋아한다는 명분으로 모인 조직이 내 말을 무시하긴 쉽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슬그머니 이름만 살짝 바꿔서 돌아와 또 내 이름을 팔아먹으면 말짱 도루묵이지 않은가.
결국 문제의 핵심은 드레이크였다. 물론 녀석의 주변에 있는 레이나를 비롯한 간부들도 이미 사상에 동화되었을 수 있지만 어쨌든 그것도 드레이크가 사라진다면 힘을 잃을 수밖에 없다.
죽인다는 식의 과격한 방법을 쓸 생각은 없다. 애초에 살생을 저지르고 싶은 마음도 없고 그런 극단적인 방법은 거부감만 불러일으킬 뿐이니.
그럼 내가 왜 굳이 괴도 레이븐이 되어 다시 지하로 돌아왔느냐?
‘아직 정보가 너무 부족해.’
이 지하와 괴도 추종자라는 조직에 대해선 어느 정도 파악했다.
대략적인 조직도와 모임 일정 평균 인원수도 알아냈다.
그렇지만 정작 중요한 드레이크 개인에 대해선 정보가 거의 없는 상태였다.
나이 거주지 출신 지역 가족 관계 등은 물론이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자금의 출처까지.
도대체 뭐 하는 놈이길래 이렇게 흥청망청 돈을 쏟아붓고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건지 알아내야만 한다.
지금부터 놈의 진실을 파헤칠 시간이다.
비록 시커먼 남정네를 미행한다는 게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이건 전부 대의를 위해서다.
어차피 여기서 내 은신 마법을 눈치챌 만큼의 실력자가 없다는 것쯤은 진작 파악해놨다.
그러니 마음 놓고 최선을 다해 뒤를 캐주마.
녀석의 모습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블랑카도 그러더니 항상 같은 테이블에만 앉는 걸 보면 특별히 정해진 지정석이라도 있는 건가? 아니면 그냥 본인이 편하고 익숙한 자리라 그런 걸 수도 있겠지만.
그쪽으로 조심스레 가까이 다가가니 역시나 내 기척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로 옆 사람과 신나게 떠들기 바빠 보였다.
“오늘도 슬슬 마무리할 시간이 되어가는군.”
“확실히 정체된 게 느껴지네. 사람들이 더 늘지를 않잖아.”
“어쩔 수 없지. 요즘 분위기가 뒤숭숭하니까.”
분위기가 뒤숭숭하다고? 흘려들을 수 없는 말에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러고 보면 아까 대머리 덩치도 비슷한 말을 했었지.
분명 극단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했던가. 아무래도 방금 얘기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정말 괜찮겠어? 차라리 내일부터라도 모임 횟수를 줄이고 잠깐 사리는 건 어때?”
“아니 이런 때일수록 더 우리끼리 뭉쳐야 해. 믿을 건 결국 친구뿐이니까.”
“그러다 만약 끄나풀이라도 섞여들면···.”
상대의 우려 섞인 걱정을 단칼에 잘라내는 드레이크.
“그래봤자 우리의 결속을 막을 수는 없어.”
끄나풀. 이번에는 결정적인 키워드가 나왔다.
일반적인 상황에선 사용할 리 없는 단어.
그 말은 즉 괴도 추종자를 적대하는 세력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분위기가 뒤숭숭하다거나 극단적으로 변해간다는 것도 적대 조직과 관련이 있는 거겠지.
안타깝게도 당장은 그 이상의 정보를 획득할 수는 없었다. 얘기를 매듭지은 드레이크가 일어나 모임의 끝을 알렸기 때문이다.
오히려 내가 바라던 바였다. 모임이 끝나면 녀석도 집으로 돌아갈 테니 더욱 개인적인 정보를 얻어낼 수 있을 테니까.
오늘은 적어도 녀석의 수상하리만치 풍족한 자금 출처라도 확실히 알아낼 작정이다.
속단할 수는 없지만 드레이크가 귀족가나 부호 출신일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렇다면 굳이 만인 평등을 외치며 신분제 철폐를 외칠 이유가 없을 테니. 물론 율리아처럼 귀족 출신이면서 별종일 가능성도 없는 건 아니지만.
드레이크는 일일이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건넨 다음 제일 늦게 지하에서 나왔다.
역시 다른 건 몰라도 추종자들을 대하는 태도만큼은 깎아내릴 여지가 없었다.
어두운 밤거리를 느긋하게 걸어가는 녀석.
나름 각오했는데도 남자 뒤를 졸졸 따라다니니 뭔가 기분이 묘했다.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여자 뒤를 따라가고 싶단 것도 아니다.
그나저나 상당히 오래 걸리네. 지하 건물을 대여한 것도 녀석일 테니 집도 가까운 곳에 있을 줄 알았더니.
그 뒤로 한참이 지나서야 드레이크의 발걸음이 멈춰 섰다.
나도 따라 멈춰선 다음 그가 들어가는 건물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여긴···.’
근처에 다다랐을 때부터 묘하게 이질적인 느낌을 받긴 했다.
처음에는 그게 막연히 남자의 뒤를 쫓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하고 가볍게 넘겼다.
하지만 목적지에 도착하고서야 마침내 깨달았다.
아까부터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가 무엇인지.
이곳은 내가 아는 장소였다.
단순히 지식으로만 아는 수준이 아니라 직접 방문까지 했었다.
착각일 리도 없다. 고작해야 몇 달밖에 되지 않은 기억이었기에.
어찌 보면 추억의 배경이라 불러도 무방하겠지.
다름 아닌 이곳에서 내 라이벌인 셜록을 처음으로 마주했으니까.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대체 어째서? 왜 다른 누구도 아닌 드레이크가 자연스레 이 안으로 들어간단 말인가?
“라파노의 저택···.”
내가 막 괴도 레이븐으로서 세상에 이름을 알리던 시절.
태양의 미소라는 보석을 갖기 위해 이 대저택을 털었었다.
보석은 돌려주지 않았다. 라파노는 이견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악인이었으니.
드레이크가 그토록 혐오하고 경멸하던 탐욕스러운 부호의 대명사가 라파노였다.
즉 방금 드레이크가 이곳에 들어간 것은 여태 보여줬던 모습을 생각하면 어떻게 해석하려 해도 모순되는 장면이었다.
결국 남는 가능성은 단 하나. 지금껏 지켜봐 온 녀석의 행실은 전부 철저하게 꾸며진 거짓이었다는 것뿐.
이렇게 된다면 가장 베일에 싸여있던 자금의 출처도 해결된다. 다른 건 몰라도 이 근방에서 재력만으로는 라파노와 비견될 부호가 없는 수준이니 말이다.
그와 동시에 더 근본적인 의문에 휩싸이게 된다.
도대체 왜?
아까 생각했듯이 굳이 귀족가 출신이나 대부호가 이런 짓을 벌일 이유는 없다.
오히려 자신에게 손해가 되면 몰라도 이득이 될 가능성은 없다시피 할 테니까.
일단 확실한 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몽상가의 꿈일 리는 없다는 거다.
적어도 내가 아는 라파노라면 몇백 번을 죽었다 깨어나도 그런 생각을 떠올릴 인물이 아니다.
어차피 이렇게 가만히 서서 아무리 궁상떨어봤자 답이 나오진 않는다.
직접 움직여서 확인하는 수밖에.
우선 주변을 꼼꼼하게 살피며 가장 안전한 침입 루트를 설계해갔다. 이러고 있으니 정말 오랜만에 괴도로서 복귀한 기분이네.
그렇게 저택을 중심으로 한 바퀴 쫙 둘러보니 생각보다 쉽지 않아 보였다.
마력 탐지기가 거의 도배하다시피 사방에 깔려 있었다. 이 정도를 구매하려면 제아무리 돈이 많다 해도 거덜 나지 않을까 싶은 수준으로.
보통이라면 이렇게까지 과하게 설치할 필요는 전혀 없다. 마력 탐지기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기껏해야 이름대로 마력을 탐지하는 것뿐이니까.
가장 중요한 장소에 한두 개만 깔아도 충분한데 왜 굳이 이렇게나 깔아놓은 걸까?
그나마 그럴듯한 이유를 꼽자면 내 침입에 트라우마가 생겨서이려나.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해야 할 만큼 중요한 무언가가 저택 안에 있다거나.
뭐가 됐든 달라지는 건 없다. 이렇게 마력 탐지기로 도배해봤자 좀 더 조심해서 움직이느라 잠입에 시간이 걸린다는 것만 제외하면 별다른 문제도 아니었다.
걸리지 않도록 천천히 최대한 신중하게 발을 내디디며 조금씩 저택의 안으로 나아갔다.
따로 경계를 서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더더욱 이상했다. 이만큼이나 마력 탐지기를 설치해뒀다면 당연히 그에 맞춰서 경비도 늘려야 하는 거 아닌가?
오히려 전체 인구 중 마법사의 비율은 무시해도 될 만큼 적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반대여야 정상일 텐데.
자꾸 뭔가 어긋난 듯한 느낌에 약간 꺼림칙하기도 했으나 일단 고개를 가로저으며 잠입에만 집중했다.
높고 뾰족한 창살을 넘은 뒤 널찍한 뒷마당을 가로질러 저택 뒤쪽에 다다랐다.
어차피 마력 탐지기를 제외하면 제대로 된 경비도 없으니 그냥 은신 마법을 풀고 당당히 숨어들까도 생각했지만 아까 느꼈던 꺼림칙함이 가시질 않아 최대한 조심하며 움직이기로 했다.
‘찾았다···!’
저택의 뒤쪽 창문 너머로 접견실로 보이는 방이 있었다.
그 안에 내가 생각하던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드레이크와 라파노.
불과 방금 직전까지만 해도 전혀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이질적인 조합.
하지만 둘은 상당히 친근한 듯 마주 보며 앉아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얘기를 떠들어댔다.
대화 내용을 엿들어야 한다. 그렇게 판단하고 더 가까이 다가가려던 순간.
흠칫!
목덜미가 찌르르 울리며 그 어느 때보다 직감이 강렬히 경고해댔다.
당장 이곳에서 도망치라고.
이렇게나 위험한 존재감은 거의 느껴 본 적이 없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목숨을 잃을 뻔할 정도의 위기를 겪었고.
당장 도망쳐야 한다. 하지만 어째선지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움직여! 제발···!’
그리고 곧이어.
“날파리 한 마리가 기어들어 왔군.”
한 사내가 등장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딱히 기어들어 오진 않았는데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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