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40
가까스로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만약 1초라도 늦었다간 그 살벌한 기운을 내뿜던 존재와 마주쳤겠지.
그랬다면 분명 몸 성히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했으리라.
안전하다고 확신할 만큼 멀찍이 도망가서야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다른 건 몰라도 도주 능력 하나만큼은 이미 수준급에 도달하지 않았을까?
전부 괴도로서 단련된 노력의 성과였다. 이걸 과연 자랑스러워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나저나 상대가 누군지 확인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만약 원작에 등장하는 인물이었다면 보자마자 눈치챌 수 있었을 텐데. 결국 목표로 했던 드레이크와 라파노의 대화를 엿듣는 것도 실패했고.
확실한 건 이대로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는 점이다. 단순히 괴도 추종자 문제를 떠나 라파노까지 얽혀있단 사실을 확인한 이상 확실한 진상을 밝혀야만 했다.
물론 지금 당장은 내 침입을 눈치채고 상대의 경계심이 바짝 올라갔을 테니 몸을 사려야 한다. 이건 빠르게 해결하고 치울 일이 아니라 최대한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움직여야 하는 문제였다.
집으로 돌아가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 조합이었다. 설마 다른 누구도 아닌 드레이크와 라파노가 뒤에서 서로 힘을 합치고 있었을 줄이야.
정확히 무슨 계획인지는 몰라도 분명 매우 시꺼먼 꿍꿍이를 품고 있을 게 분명했다.
중요한 건 그 둘뿐만이 아니라 내 기척을 눈치채고 뒷마당으로 왔던 누군가였다.
그 위압감과 존재감으로 따졌을 때 어지간한 강자들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은 수준이었으니까.
마력 탐지기를 그렇게나 많이 깔아놓고서 왜 막상 경비는 아무도 없나 했더니 그 녀석 한 명만으로 충분하다 못해 넘쳐서 그런 거였단 걸 이제야 깨닫는다.
대체 누구였을까? 얼굴을 확인하지 못해서 확신하긴 힘들지만 사실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는 부분은 있었다.
라파노가 누구와 얽혀있는지를 생각하면 가능성은 충분하다.
불과 직전까지만 하더라도 완전히 해결됐다고 생각해 전혀 염두에 두지도 않고 있던 존재이지만 내가 마주쳤던 그 어떤 것보다도 위험한 존재.
드라칸.
사실 놈들과 직접적으로 조우한 적은 거의 없다. 기껏해야 처음 레이첼과 함께 이동하던 지크프리트에게 죽을 뻔했다가 가까스로 도망친 경험이 유일했으니.
녀석들이 라파노와 관련되어있단 사실도 예언의 마녀를 통해 수정구슬로 확인한 것에 불과했다.
심지어 놈들을 퇴치한 것도 멋지게 정면승부로 박살 낸 게 아니라 꼼수를 사용해서 시선을 돌리게 한 것뿐이었고.
“···아니야.”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나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번 사건의 배후가 드라칸이라고 단정 짓기에는 근거가 너무 부족했다.
이런 짓을 벌인 동기야 오히려 너무 집착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드라칸은 용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는 조직이니까. 막말로 목적에 도움만 된다면 똥통에서도 망설임 없이 웃으며 구를 녀석들이다.
그보다도 드라칸이 배후가 아닐 가능성이 높은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놈들이 다시 돌아오기엔 너무나 빠른 시간이기 때문이다.
나는 녀석들이 레이첼에게서 관심을 떼도록 만들기 위해 원작의 지식을 이용했다.
바로 드라칸의 핵심 계획에 필수 요소인 천사의 나팔을 훔쳐 간 것.
그러면서 동시에 ‘묵시록의 예언’을 언급하는 카드도 같이 남겨두었다.
당연히 드라칸 조직원들은 남겨진 흔적을 보고 자신들의 리더가 움직였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조직 내에서 극비로 여겨지던 계획이 새어나갔으리라곤 상상도 못 했겠지. 실제로 새어나간 게 아니라 그냥 내가 원작을 본 덕분에 알게 된 거니까.
아무튼 그 덕분에 드라칸은 현재 진행 중이던 모든 작전을 취소한 채 최종장에 돌입한 상태다.
그것은 바로 용을 만들어낼 제단의 봉인을 푸는 것.
이 봉인을 해제하는 데만 무려 1년이 넘는 시간이 걸린다. 즉 녀석들은 여전히 재단 앞에서 끙끙거리며 봉인을 풀고 있으리란 뜻이다.
봉인을 푼다고 끝이 아니다. 오히려 그때부터 본격적인 시작인데 그 뒤부터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게 바로 내가 훔친 천사의 나팔이다.
그게 없으면 말짱 도루묵. 기껏 힘들게 해제한 봉인도 단 3일 만에 원상 복구되고 만다.
그런데 나는 이미 나팔을 호수의 여인에게 도움을 받아 인간은 절대 찾을 수 없는 치유의 낙원에다 고이 모셔두었다.
맡아주는 기간은 자그마치 천년. 초월적인 존재인 정령 기준의 시간 개념 덕분에 그때부터 드라칸과 엮일 리는 아예 없겠다고 안심했었다.
그러니 드라칸은 적어도 지금 움직이진 못할 것이다. 최소한 봉인을 해제하고 나서 뭔가 잘못됐음을 깨닫고 날뛸지는 몰라도 그 역시 1년이란 시간이 지난 뒤의 얘기다.
하지만 그러면 누구지? 차라리 드라칸이 확실하게 맞다면 오히려 대응법을 강구하기가 더 수월했을 텐데. 상대가 누구인지도 모르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집으로 돌아가서도 고민은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결국 당장으로서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급할수록 돌아가란 말처럼 우선 최대한 정보를 수집해 수수께끼 같은 적의 존재를 밝혀내는 수밖에.
처음에 접근할 방향은 대충 생각해 두었다.
***
“엉? 뭔 헛소리냐?”
레이첼이 눈을 찌푸리며 내게 되물었다.
“너희 언니. 일 그만두신 이후로 쭉 집에만 계신다고 하셨지?”
“그게 갑자기 왜 궁금한데. 너 설마···.”
말끝을 길게 늘어뜨리며 점점 인상이 싸늘해지는 그녀.
“우리 언니한테 관심 있냐?”
“아니거든.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
레이첼의 언니 이름이 레아였던가? 아무튼 그녀는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라파노의 저택에서 하녀로 일했었다.
내가 놈의 저택을 털었던 날 트릭으로 준비한 풍선을 발견하고 나로 착각해 라파노에게 보고했다는 이유만으로 잘려버렸었지. 솔직히 그 사실을 알았을 땐 내 잘못이 아닌데도 괜히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아무튼 그녀라면 라파노에 대한 정보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을지 모른다. 사소한 거라도 좋으니 거기서부터 하나씩 이어나가다 보면 결정적인 힌트를 찾을 가능성도 있으니.
“뭐 그냥 그대로지. 연달아 두 번이나 잘리니까 생각보다 충격이 큰가 봐.”
레이첼은 투덜거리면서도 눈빛 속에 언니를 향한 걱정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그나저나 두 번이었구나. 생각해보니 그랬었다.
처음에는 라파노의 저택에서 뒤이어서는 드라칸의 계략으로 베로니카의 저택에서 똑같이 하녀로 일했었지. 베로니카도 봉인을 해제하러 뛰어가느라 고용인을 전부 해고해버린 모양이지만.
“그래도 당장은 장학금 나오는 게 워낙 두둑해서 급하게 일을 구할 필요는 없지만 언니도 집에만 있으니까 답답한 눈치긴 하더라. 그런데 일이 구하고 싶다 해서 바로 되는 것도 아니고···.”
“많이 힘드시겠네.”
“나한테 그런 티는 안 내. 바보처럼 착한 언니라서 동생이 걱정하는 걸 제일 싫어하거든.”
듣다 보니 괜히 나까지 마음이 숙연해진다.
물론 근본적인 문제는 라파노가 시답잖은 이유로 잘라버린 탓이지만 거기에 내 영향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었으니까.
“어쩌다가 잘린 거야?”
“···내가 왜 너한테 그런 것까지 말해야 하는데?”
“미안. 불편했으면 사과할게.”
내가 미련 없이 뒤로 내빼자 레이첼은 한숨을 내쉬며 오히려 자기가 먼저 얘기를 꺼냈다.
“하. 생각하니까 또 열받네. 그 망할 괴도 자식만 아니었어도···.”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해도 그동안 마음에 쌓인 응어리가 많았던 모양이다. 그 대상이 다름 아닌 나라는 사실이 좀 씁쓸하긴 했지만.
“무슨 얘기야? 괴도가 왜?”
그때 괴도라는 키워드가 나오자마자 귀신같이 근처로 다가오는 율리아.
이쯤 되면 진짜 광신도가 아닌가 무서워질 정도였다.
“······.”
설상가상으로 샤론마저 어느새 스리슬쩍 자리를 차지하고 조용히 대화를 경청했다.
갑자기 듣는 사람이 확 많아지자 잠깐 당황하던 레이첼은 이렇게 된 거 속 시원하게 털어놓겠다는 심산인지 모두 허심탄회하게 얘기했다.
“···그렇게 됐다는 거지.”
“그런 일이 있었구나···.”
나는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수정구슬로 과거를 엿봤기 때문이고 레이첼이 직접 알려준 적은 없었다. 그래서 처음 듣는 척 적당히 놀란 연기를 해야만 했다.
율리아는 레이첼에게 공감해주면서도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런데 그건 레이븐보다도 저택 주인이 나쁜 거 아닐까···?”
“그 돼지 새끼는 원래 나쁜 놈이니까 그건 당연한 거고. 아무튼 괴도 자식도 문제란 거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이해해.”
막상 그렇게 말하면서 표정은 전혀 납득하지 못했다는 눈치잖아.
저러다가 나중에는 맹목적으로 나를 두둔하고 찬양하는 게 아닐까 진심으로 걱정됐다.
“그래서 언니분은 아직도 실직 상태란 거지?”
“응. 괜찮은 일자리 하나 구하면 참 좋을 텐데. 집에서 하루종일 얼굴 맞대면서 부딪치는 것도 지긋지긋하단 말이야.”
참 현실적인 이유다. 그나저나 그런 거라면 마침 괜찮은 방법이 있다.
물론 지금 당장 내가 얘기를 꺼낼 수는 없으니 조용히 넘어가려고 했다.
“괴도한테 부탁하면 되잖아.”
이어진 샤론의 말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코로나로 아픈데도 열심히 썼어용..
얼른 칭찬해주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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