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41
내가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율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괴도한테 부탁하라니. 그게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야. 실직의 책임이 있으니까 부탁할 수도 있잖아.”
샤론의 다소 생뚱맞은 대답에 레이첼은 콧방귀를 내쉬었다.
“하 뭔 소리를 하나 했더니. 그 좀도둑이 뭔 능력이 된다고 일자리를 주냐?”
“일이야 만들면 되잖아. 괴도 조수라던가.”
“지금 우리 언니한테 범죄자나 되란 뜻이야?”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오늘따라 유난히 능청스럽게 농담을 던지는 샤론. 평소엔 저러지 않던 애가 갑자기 확 바뀌니까 뭔가 굉장히 수상하게 느껴졌다.
그 와중에 샤론의 얘기를 듣고는 진지하게 고민에 잠겨있는 율리아.
“괴도 조수···.”
설마 지금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거니?
거기까지 가면 단순히 괴도 추종자가 아니라 레이첼이 말한 대로 진짜 범죄자가 되는 거라고.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와서 샤론의 돌발 행동이 매우 수상쩍었다.
단순히 레이첼과 율리아가 편해져서 말을 터놓기 시작한 거라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라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거라면.
그건 아마도 내가 괴도 레이븐이라는 증거를 찾기 위해 일부러 은근슬쩍 밑밥을 던져본 게 아닐까?
물론 나 혼자만의 망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왠지 그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지금 우리는 서로 치열한 두뇌 싸움과 심리전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서로의 정체를 밝혀내기 위해서. 본인의 정체가 발각될 위험성을 무릅쓰고서라도.
사실 이건 나한테만 일방적으로 불리한 싸움이긴 했다. 나는 그녀가 셜록인 걸 알아내봤자 딱히 달라지는 게 없지만 반대로 상대는 내가 괴도라는 걸 밝혀내는 순간 곧바로 체포당할 수도 있으니까.
당연히 계산적으로 생각한다면 내가 몸을 사리는 게 옳았다.
하지만 그건 너무 낭만이 없지 않은가? 원래 탐정과 괴도의 라이벌 구도에선 위기가 찾아와도 유유히 빠져나가는 괴도야말로 로망 그 자체이니 말이다. 자고로 어느 정도의 스릴은 중독성 넘치는 향신료와도 같은 법이다.
나는 슬쩍 샤론의 표정을 살폈다. 언뜻 보기엔 평소와 다름없는 무뚝뚝한 무표정.
무슨 생각 중인지 읽어내는 게 불가능할 만큼 완벽한 포커페이스였다.
우선 여기서는 너무 대놓고 티를 내면 안 되겠지.
내가 원하는 건 그녀한테 냅다 ‘내가 괴도입니다!’하고 실토하는 게 아니었다.
손에 땀을 쥘 정도로 팽팽하게 이어지는 눈치 싸움. 그 속에서 결국 최후의 승자는 내가 되어야만 했다.
그렇기에 당장은 섣부르게 움직이지 않았다.
샤론이 힐끔 나 살피는 게 느껴졌으나 내가 별다른 행동이 없자 순식간에 그녀의 시선은 떠나버렸다.
너무 조급해하지 말라고. 어차피 내일이 되면 머리가 상당히 아플 테니까.
괴도한테 부탁하라고 했었던가?
마침 그 말을 들으니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번 라파노 문제도 해결하는 겸 레이첼의 언니를 취업시켜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때마침 사업에 일손이 부족했던 참이기도 하니까.
***
아카데미 수업을 끝마친 후 나는 곧바로 집 바로 건너편에 있는 사무실로 발길을 옮겼다.
오늘은 월요일.
그렇다. 저번 주 주말에 스카우트했던 우리 재단의 인재 줄리엣이 처음으로 출근하는 날이었다.
그래도 재단의 대표이사인데 먼저 와서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비록 직원이라 해봤자 지금은 고작 단둘밖에 없지만.
여기도 사실 급하게 구한 곳이다 보니 사무실로 쓰기엔 너무 작은 감이 있었다. 나중에 규모가 커지면 훨씬 번듯한 사무실로 옮겨야겠지.
어차피 돈은 문제가 되지 않으니 사람만 구하면 된다. 그게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차라리 지금이 21세기 현대였으면 더 좋았을 텐데. 취업난에 청년 일자리 문제가 심각한 세상에선 그냥 봉급 많고 사원 복지 준수하고 비전만 창창하면 지원자가 넘쳐날 거 아닌가?
반면 19세기 브리타니아는 달랐다. 애초에 비영리 재단이란 개념이 생소한 탓에 자기소개를 해도 사기가 아닐까 의심하는 사람이 많을 정도.
물론 돈을 많이 준다면야 지원하는 사람은 많겠지만 그중에서 진짜 도움이 될 만한 스펙을 가진 엘리트는 하늘의 별 따기나 다름없었다.
“안녕하세요. 이사님.”
“아 일찍 왔군.”
한창 생각에 잠겨있던 와중 사무실 문이 열리며 단정한 옷차림의 줄리엣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나타났다.
나는 저번에 얘기했던 대로 그녀를 편하게 반말로 대했다.
“잘 왔네. 그럼 곧바로 이제부터 자네가 담당하게 될 업무에 대해 알려주지.”
“네. 알겠습니다.”
그녀에게 당장 맡길 일은 하나뿐이었다.
“사업의 확정이군요.”
“뭐 우리는 영리 단체가 아니니 정확히는 자선 사업이지.”
일단 외부 활동은 여태 해왔던 것처럼 내가 담당할 생각이다. 줄리엣이 신경 쓸 것은 내부 관리.
후원할 대상을 정하거나 협력 관계자 등을 만나는 일은 뤼팽 재단의 얼굴인 내가 맡는다.
그동안 줄리엣은 인선과 회계 등을 총괄하는 비서로 키울 생각이다.
“···그런 중요한 업무를 저한테 일임하셔도 괜찮나요?”
“어차피 나 혼자서는 못 하네. 그러니 자네를 고용한 거고. 당연히 내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면 해고할 수도 있겠지.”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아마도 잘하지 않을까 싶다. 정확히는 몰라도 고작 몇 개월 만에 상당한 돈을 벌었던 만큼 능력은 있다. 걱정할 거라면 그녀가 너무 유능해서 내 뒤통수를 치지 않겠냐는 거겠지.
하지만 그것도 나름의 대비책은 있다.
바로 줄리엣이 자랐던 고아원을 내가 후원하고 있다는 것.
힘들게 모은 돈을 기부하려 했던 걸 보면 고아원을 향한 애정만큼은 각별해 보였다. 그러니 못하겠다고 그만둘지언정 나쁜 흑심을 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본다.
내가 그녀에게 알려준 내용은 별것 없었다. 왜냐하면 나도 이런 쪽에는 문외한에 가까웠으니까.
지금껏 해왔던 활동도 사실 주먹구구식에 가까웠고. 그래서 그녀에게 해준 얘기를 요약해봤자 돈은 얼마든지 써도 좋으니 규모를 최대한 늘리라는 식에 불과했다.
줄리엣은 딱히 불만을 내뱉지 않고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이러니까 악덕 고용주가 된 기분이야.
아니지. 그래도 나는 돈 하나는 많이 주잖아? 적어도 라파노처럼 사소한 걸로 트집 잡아서 해고하지도 않을 테고.
좋은 리더는 아닐지 몰라도 악덕 고용주라고 자책할 필요까진 없지 않을까.
“좋아. 혹시 더 궁금한 점 있나?”
“아니요. 없습니다.”
“아까 말했던 대로 일단 자네가 편한 대로 자유롭게 해보게. 업무에 필요한 돈은 이걸로 사용하고. 다만 매일의 활동을 보고서로 간략히 작성해서 나한테 제출하기만 하면 된다네.”
“알겠습니다. 이사님.”
말은 이렇게 해뒀지만 한동안은 내가 이것저것 개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줄리엣이 내 머릿속을 읽지 않는 이상 내가 원하는 재단의 모습과는 방향이 달라지는 게 당연하니까. 그때마다 내가 원하는 건 이런 거라고 확실하게 얘기해줘야겠지.
다만 그렇게 시간이 지나다 보면 결국 그녀가 전부 알아서 처리하게 될 날이 오리라.
그때부터는 내가 신경 쓸 필요도 없이 알아서 재단이 굴러가지 않을까.
“오늘은 첫날이니 이쯤 하지.”
“괜찮으시다면 여기 남아서 서류들을 좀 더 봐도 괜찮을까요?”
“물론이지. 여기 스페어 키도 줄 테니 앞으로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오가게.”
“감사합니다.”
어차피 사무실에는 내가 괴도란 사실을 들킬만한 정보는 싹 제거해두었다. 앞으로 줄리엣뿐만 아니라 다른 직원들도 드나들게 될 텐데 그런 걸 놔둘 수는 없지.
지나칠 만큼 풍족한 자금도 이미 마녀를 통해 전부 세탁을 끝내놓은 상태다.
막말로 ‘돈이 수상할 정도로 많으니까 넌 괴도다!’ 수준의 막장 추리가 아니라면 내가 괴도라고 추측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만에 하나 줄리엣한테 내 정체를 사실대로 밝힌다고 하더라도 그건 한참이 지난 이후의 얘기일 것이다. 그녀가 정말로 믿을 만하며 능력 넘치는 심복으로서 오랫동안 내 곁을 지킨다면 말해줄지도 모르지. 그전까지는 어림도 없다.
“참. 말하는 걸 깜빡했군.”
밖으로 나서려다 뒤를 돌아보며 아직 자리에 앉아있는 줄리엣에게 말했다.
“아마 내일은 직원 한 명이 더 올 거야.”
“그 직원분께서는 어떤 업무를 맡으시는 건가요?”
“흠···.”
나는 잠시 턱을 짚으며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청소부?”
“···네?”
“일단 본인의 의사가 제일 중요한 법이니 그건 내일 알려주도록 하지. 그럼 수고하게.”
“아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줄리엣답지 않게 떨떠름한 반응이 꽤 재밌었다. 하긴 당황할 만도 하지.
조그마한 사무실에 직원도 단둘뿐이니 벌써 전문 청소부를 고용할 이유가 없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레이첼의 언니를 사무직원으로 뽑기도 그렇고.
그렇다니 영업직으로 밖에 내보내는 것도 불안하기만 하다.
그럼 결국 남는 건 청소 같은 잡무밖에 없잖아.
어차피 원래 본직도 메이드였으니 직종도 살리는 셈이고.
뭐 지금 이렇게 고민해봤자 본인이 거절하면 전부 헛수고니까.
일단 직접 찾아가서 얘기를 나눠본 다음에 생각하도록 하자.
우선 그렇게 결론을 짓고서 나는 레이첼의 집으로 향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어제 푹 쉬고 나니까 많이 괜찮아진 거 같아용!
코로나 생각보다 별거 아니네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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