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43
말을 내뱉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언니의 강렬한 시선을 애써 피하며 레이첼은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반쯤은 무심결에 내뱉은 말이지만 어느 정도 진심이 담겨있는 것도 사실이긴 했다.
뤼팽이 찾아오기 전에 언니가 취업하길 바라며 응원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저 남자의 밑에서 일하는 건 좀 그렇다.
안 된다며 결사반대할 정도는 아니어도 찬성과 반대 중에선 후자에 가까운 느낌이랄까.
이유를 딱 잘라 설명하긴 힘들었다. 그렇지만 굳이 얘기하자면···.
미안한 마음에 가깝지 않을까?
언니가 아니라 뤼팽한테 말이다.
인정하긴 싫지만 아까 그가 성적 관련으로 해줬던 얘기에 꽤 감동했다.
게다가 자신을 도와준 사람이기도 하고 이런 자선 사업까지 하는 걸 보면 그냥 태생적으로 착한 사람이겠지.
그런 사람의 밑에서 언니가 일한다고?
물론 언니도 태생적으로 착한 사람이긴 하다. 그런데 약간 결이 다르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중요한 건 착한 것보다도 사고뭉치에 가깝다는 거다.
내심 마음 한편으로는 라파노의 저택에 괴도가 출몰한 것도 사실 언니 때문이 아닐까 불안할 정도.
단순히 본인이 덜렁대는 걸 넘어 온갖 사고를 몰고 다니니 뤼팽의 밑에서 일했다간 나중에 그가 변사체로 발견될지도 모른다.
더 중요한 건 따로 있다. 뤼팽은 단순한 호의로 제안한 거겠지만 언니는 순수한 의도로 받아들이지 않을 게 뻔하다는 사실이다.
그래. 언니는 뤼팽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다.
‘그것도 상당히!’
솔직히 저렇게 나이 차이도 크게 나는 수염 난 아저씨가 왜 좋다는 건지 레이첼은 전혀 이해되지 않았지만 언니의 취향 자체는 존중해줄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의 언니는 그런 흑심을 숨긴 채 뤼팽의 순수한 호의를 이용하려는 속셈 아닌가. 굉장히 불순하다고밖에 평가할 수 없다.
‘그러니까 막아야 한다···. 가 맞나?’
막상 레이첼 본인도 그냥 무의식중에 튀어나온 말이었을 뿐이기에 이게 정말 논리적으로 옳은 결론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오히려 지금 자신이야말로 언니의 취업+혼삿길이라는 겹경사를 방해하고 있는 게 아닐까?
당장 저 언니의 애절하면서 원망스러운 눈길을 보아라. 만약 이번 일이 잘못되면 최악의 경우 자매간의 사이가 멀어질 수도 있다.
언니가 좀 덜렁대서 일은 잘 못 하고 속에는 흑심만 가득하다 해도.
막말로 그게 자신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어차피 그건 뤼팽이 신경 써야 할 문제인데.
자꾸 갈팡질팡하는 마음에 고뇌하던 도중 뤼팽이 입을 열었다.
“레이첼 양. 반대하는 이유가 따로 있나요?”
“아···. 그게···.”
레이첼은 눈앞이 깜깜해지는 기분이었다.
***
진짜 이해가 안 가서 물어봤다.
당연히 레이첼이라면 좋아할 줄 알았는데 이걸 반대한다고? 왜?
심지어 내 앞에서 무릎을 꿇었던 레아마저 허망한 표정으로 동생을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확신했지만 막상 질문을 받은 레이첼은 우물쭈물하며 쉽게 대답을 꺼내지 못했다.
뭔가 말하기 어려운 이유인가?
저러니까 더 궁금해진다. 턱을 짚은 채로 왜 그런 대답을 내놓았을지 추측해보았다.
그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니 답은 의외로 금방 나왔다.
“무슨 뜻인지 이해했습니다.”
“네!? 이 이해하셨다고요···?”
자신의 속내를 들키자 잔뜩 당황해버린 레이첼. 시선이 마구 흔들리는 것이 아무래도 상당히 놀란 모양이다.
나는 확신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것 말고는 다른 답이 없을 테니까.
레이첼을 항상 옆에서 봐왔었기에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제가 두 분의 어려운 사정을 도와드리려고 일부러 일자리를 만들었다고 생각하신 거겠지요.”
“···어 네?”
“레이첼 양의 빚지기 싫어하는 당당한 성격은 정말 멋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절대 그런 뜻이 아니니 안심하시길 바랍니다.”
어안이 벙벙한 표정의 두 자매. 아무래도 자신의 속마음을 훤히 꿰뚫어 본 것 같아서 깜짝 놀란 거겠지?
“레이···. 그런 거였어?”
뒤늦게 동생의 진심을 깨닫고 감동한 언니의 울먹임.
참으로 감동적인 장면에 흡족하게 고개를 주억이고 있었다.
[어휴···.]
‘또 왜 그러세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니 신경 쓰지 말거라.]
한동안 멍하니 있던 레이첼은 곧 어색하게 미소를 짓더니 삐걱거리며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하 하하. 그 그걸 어떻게 바로 아시지? 와 진짜 대단하다. 깜짝 놀랐잖아요···.”
“원래 사업가는 사람의 마음을 잘 이해해야 하니까요.”
[좀 입을 다물면 안 되겠느냐?]
‘네?’
[아니다. 그냥 혼잣말이었다.]
아까부터 자꾸 왜 저러시는 거지? 뭐 잘못 드셨나? 괜히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여신님을 걱정하고 있으니 레아가 눈물을 훔치며 대답했다.
“설마 우리 동생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줄은···. 알았어! 언니도 뤼팽 님의 도움을 구하지 않고 알아서 일자리를 찾아볼게!”
아 미안한데 그건 안 된다. 이미 우리 사무실의 청소부는 당신으로 점찍어 뒀는걸.
“참고로 제 밑에서 일하면 받을 한 달 봉급은···.”
액수를 말해주자마자 레이첼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즉답했다.
“언니. 해.”
“···응?”
“하라고.”
“어 어 응. 알았어···?”
그렇게 성공적으로 레아를 고용했다. 내친김에 근로계약서까지 자리에서 바로 작성했다.
“업무는 간단합니다. 저희 사무실에 매일 출근해서 청소 및 잡무를 처리해주시면 됩니다.”
“사무실이요? 저택에서 일하는 게 아닌가요?”
참. 그걸 말하는 걸 깜빡했구나. 그녀의 전공이 메이드다 보니 당연히 맡게 될 일도 전속 하녀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네. 저는 따로 하인을 부리지 않고 혼자 생활하는 게 편해서요.”
“아···. 그렇구나···.”
명백히 아쉬워하는 레아. 그러면서 혼잣말로 작게 쭝얼거리는데 뭐라는 건지 잘 들리지 않았다.
“뤼팽 님 집에서 하루종일···.”
“언니?”
“으 응!? 나 아무 말도 안 했어! 진짜로!”
어수선해진 분위기를 정리하며 얘기도 슬슬 마무리로 접어들었다.
“그럼 출근은 내일부터 하시면 됩니다. 사무실 위치는 레이첼 양이 알고 있을 테니 나중에 여쭤보시고···.”
“저 오늘 가보면 안 되나요!?”
갑자기 손을 번쩍 들며 뜻밖의 얘기를 꺼내는 레아.
“지금은 이미 시간이 늦어서 돌아갈 때 위험하실 겁니다.”
“괜찮아요! 숙련된 메이드는 제 한 몸 정도는 지킬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증명하겠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주먹을 허공에 내지르기 시작한다.
“얍! 얍! 어때요?”
“음···.”
매우 어설펐다. 저 가녀린 팔로는 아무리 잘 휘둘러봤자 솜방망이나 다름없겠지.
“어차피 내일부터는 질리도록 보게 되실 텐데요.”
“그래도 본격적으로 일하기 전에 꼭 한번 보고 싶어요! 안 될까요···?”
딱히 안 될 거야 없다. 아까 말한 대로 여자 혼자 다니기엔 밤길이 위험하니까 걱정될 뿐이지.
특히 지금은 19세기 런던이 아닌가? 감시 카메라도 없는 도시에서 범죄가 일어나도 과연 얼마나 잡히겠는가.
“그럼 저도 같이 따라갈게요. 마법사가 옆에 있으면 괜찮잖아요.”
그렇다면야 문제는 없겠지.
엄밀히 따지면 아직 정식 마법사가 아닌 마법 생도 신분이지만 어쨌든 레이첼의 마법 실력은 믿을 만하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같이 가시죠.”
어쩌다 보니 견학 느낌으로 둘을 데리고 사무실에 가게 되었다.
줄리엣은 퇴근했겠지? 아직까지 남아있을 이유도 없으니 당연히 퇴근했을 것이다.
내가 앞장서서 걸어가자 뒤에서 자매끼리 티격태격하는 소리가 들렸다.
“뤼팽 님이랑 단둘이 있을 기회였는데···!”
“뭔 헛소리야! 어차피 사무실에서 일하게 됐으니까 기회는 넘쳐나잖아!”
“집이 아니라 사무실이잖아! 다른 직원도 있을 텐데 어떻게 둘만 있어!”
“저번에 보니까 혼자 일하던데?”
“헉. 진짜···?”
다 들린다. 그리고 미안한데 줄리엣도 입사했거든.
한동안 걸어가자 사무실 앞까지 도착했다. 그리고 문을 열려던 순간 안에서 나오던 줄리엣과 부딪치고 말았다.
“지금 퇴근하시는 겁니까?”
“네. 사장님은···.”
내 뒤에 쪼르르 따라오던 두 빨간 머리 자매를 발견하고는 말끝을 흐리는 줄리엣.
“손님인가요?”
“한 분은 내일부터 사무실에서 일하게 된 분이고 다른 한 분은 저희 재단에서 장학금 지원 중인 아카데미 학생입니다.”
서로 간단한 목례로 인사를 나누는 여인들.
줄리엣은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고 레아는 어딘가 질투하는 느낌에 가까웠다.
그리고 레이첼은 경악하고 있었다.
‘아 맞다.’
순간 깜빡하고 있던 사실.
“샤 샤론···?”
그녀가 아카데미에 다니는 한 학생을 너무나 닮았다는 것.
이건 오히려 기회일지 모른다. 괜히 의심의 여지를 주는 걸까 싶어 함부로 물어보지 못했던 내용을 레이첼이 시원하게 긁어주고 있는 셈이었으니.
레이첼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줄리엣은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없이 대답했다.
“사람 잘못 보셨어요. 제 이름은 줄리엣입니다.”
“···진짜요? 언니나 가족인가? 너무 닮았는데.”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레이첼이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샤론 몰라요? 샤론 혼시아.”
“···그런 사람 몰라요.”
나는 옆에서 그 상황을 처음부터 끝까지 유심히 관찰했다.
무언가 이상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무언가 이상한 거에용!
근데 뭐가 이상한 건지는 모르겠네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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