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45
“절대 아니거든.”
“아니야.”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즉답을 내뱉는 우리 둘.
그러자 우리를 노려보던 두 사람의 눈초리에 의심이 더 강해져 버렸다.
레이첼은 눈살을 팍 찌푸린 채 잔뜩 성질을 부렸다.
“야. 새끼들아. 진짜 그러는 거 아니다. 친구 사이에서 몰래 연애질은 진짜. 어이가 없어서 말도 제대로 안 나오네. 할 거면 대놓고 하던가!”
“진짜 아니라니까!”
그래. 오해를 하는 것까진 그러려니 하는데 왜 해명해도 듣지를 않냐고.
반면 율리아는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역시 다혈질 레이첼과는 다르게 천사답다. 상냥한 그녀에게 억울함을 토로하려다 왜인지 모를 살기에 멈칫하고 말았다.
분명 입은 웃고 있는데 눈빛은 조금의 웃음기도 없이 너무나도 차가웠다.
저게 내가 알던 율리아가 맞나? 레이첼보다 더 무서운데···.
그녀는 레이첼처럼 화를 내지 않았다. 그저 나지막이 물어볼 뿐.
“크로. 아니지?”
“아 아니야. 진짜로.”
“나도 크로를 믿고 싶어. 그런데 왜 말을 더듬어?”
“아니. 그거는···.”
네가 무서우니까. 아무리 떳떳한 사람이라도 지금 네 앞에 서 있으면 전부 똑같지 않을까.
아니 애초에 왜 나한테만 그러는데.
샤론도 같이 혐의를 받고 있던 거 아니야? 나만 괴롭히지 말고 좀 분담해 달라고.
“그럼 오늘 빠지는 이유를 대봐. 모처럼 넷이 놀러 가려 했더니 왜 교묘하게 둘만 빠지는 건데. 게다가 사무실은 너희 집 바로 근처잖아.”
한숨을 내쉬며 핑계를 둘러댔다.
“저번이랑 똑같은 이유야. 집에 중요한 손님이 찾아오기로 해서 외출할 수가 없어.”
“그 중요한 손님이 누구냐니까?”
“친척이야. 이제 됐지?”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가 완전히 풀리진 않았지만 내가 그렇다고 하는데 본인들이 뭐 어쩌겠는가.
알지도 못하는 친척 얼굴을 확인하겠답시고 우리 집에 쳐들어오는 건 엄연한 민폐 행동이란 것쯤은 얘네들도 알고 있을 테니.
“흠···.”
결국 지금처럼 마지못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가까스로 내 혐의가 사라리자 다음은 샤론의 차례였다.
율리아는 서운하단 감정을 드러내며 그녀에게 불참 이유를 물어보았다.
“샤론. 저번에도 빠졌는데 오늘은 같이 놀러 가면 안 될까?”
“미안해. 중요한 일이라 꼭 가봐야 해.”
“무슨 일인지 얘기해줄 수 있어?”
솔직히 이건 나도 궁금하던 참이다.
정말로 샤론이 내 정체를 의심하고 있다면 뤼팽의 사무소에 찾아갈 기회를 제 발로 걷어찰 이유가 없으니까.
“미안.”
“···알았어.”
살짝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설마 여기서 이렇게 선을 그을 줄이야.
애써 이해하려 해도 당연히 섭섭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래도 학기 초부터 줄곧 같이 붙어 다니며 친구로 지냈으니까.
샤론은 입을 열었다 닫으며 머뭇거리다 뒷말을 덧붙였다.
“다음에 꼭 얘기해줄게.”
그것이 지금 그녀에게 최선이란 사실을 깨달은 걸까. 율리아도 그제야 표정을 풀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꼭 얘기해줘.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래도 훈훈하게 끝난 것 같아서 다행이네. 그나저나 저렇게까지 숨긴다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거겠지.
순간 고민이 됐다. 마음 같아서는 샤론의 뒤를 밟아서 뭘 하는지 확인하고 싶지만 레이첼과 율리아가 사무실에 방문하기로 한 탓에 자리를 비우기가 애매했다. 특히 오늘은 레아가 처음 일하러 오는 날이라 줄리엣만 남겨놓고 무작정 떠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한숨을 내쉬며 결정을 내렸다. 오늘은 포기하는 수밖에. 물론 샤론의 정체도 너무나 궁금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보다도 라파노와 드레이크의 문제를 해결하는 게 우선이었다.
어차피 기회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찾아올 것이다.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자.
***
아카데미를 마치고 얘기한 대로 나는 집으로 먼저 향했다.
그 뒤에 곧장 뤼팽으로 변장한 다음 사무실에 출근했다.
레이첼 일행은 먼저 집에 들러서 레아와 함께 사무실에 온다고 했으니 동선이 겹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됐다.
나보다 먼저 도착해서 이미 업무에 열중하고 있던 줄리엣이 나를 반겨주었다.
“안녕하세요.”
“일찍 출근했군.”
“누구 덕분에 밀린 업무가 많다 보니까요.”
덤덤하게 눈치를 주니까 왠지 뻘쭘하네.
그나저나 역시 샤론과 줄리엣은 별개의 인물일 가능성이 99%로 보인다.
내가 아카데미를 마치자마자 사무실에 왔는데 먼저 와서 앉아있지 않은가. 막말로 텔레포트를 익힌 게 아니고선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어제 말했던 대로 곧 새로운 직원이 출근할 걸세. 선배로서 잘 맞이해주게.”
“선배라고 떵떵거리기엔 저도 이제 겨우 이틀 차인데요.”
“그 정도면 충분하지. 단 하루 만에 얼마나 많은 것이 달라질 수 있는데.”
내 자리에 앉아 줄리엣이 일하는 모습을 가만히 구경했다.
뭔가 되게 바빠 보이네. 하긴 지금 시대엔 컴퓨터도 없으니 서류 작성도 전부 수작업으로 일일이 처리해야 하니 바쁠 수밖에 없나?
그나마 다행인 사실은 줄리엣이 내 생각보다도 훨씬 유능했다는 것이다.
솔직히 나는 사업을 어떻게 확장해야 할지 막막함만 앞섰는데 그녀는 차근차근 무언가를 진행해나가고 있었으니까.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얘기하게.”
“마침 잘됐네요. 이것들 전부 확인해주시고 피드백해주세요.”
“···이걸 전부 말인가?”
갑자기 내 책상에 툭 놓아진 서류 더미들. 이렇게 서류로 탑을 쌓는 건 연출된 장면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진짜로 가능한 거였구나.
나는 떨떠름히 줄리엣을 바라보다 제일 위에 있던 서류를 집어 들어 읽어보았다.
[재단 사무실 이전을 위한 자금 계획서]
[신규 직원 채용 계획서]
[부서 조직도 개편 확인서]
[자선 기부 대상 명단]
큰 글씨만 대충 훑어보는데도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냥 무시하고 적당히 처리하자니 하나 같이 너무 중요한 내용밖에 없어서 대충 확인할 수도 없다.
부하가 유능한 건 너무 좋은데 결국 내가 최종 결정권자라서 전부 검토해야만 한다.
그렇다고 줄리엣에게 전부 맡기기엔 아직 그녀를 온전히 신뢰할 수도 없고.
결국 어쩔 수 없이 끙끙대며 서류들을 하나씩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사무실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에 즉시 서류를 내팽개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입이 드디어 출근했나 보군.”
문이 열리며 레아가 안으로 들어와 꾸벅 배꼽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여기서 일하게 된 레아 스칼렛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흠흠. 어서 들어오세요. 여기 편히 앉으시고.”
“저기 그···.”
뭔가 할 말이 있다는 듯이 우물쭈물 망설이는 레아.
문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을 이미 눈치챘기에 대충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건지 눈치챌 수 있었다.
“무슨 일이시죠?”
“그게 있잖아요. 저희 동생이 친구랑 같이 와서 장학금 신청을 하고 싶다길래···.”
“같이 오셨나 보군요. 물론 괜찮으니 들어오시라고 말씀해주세요.”
“네! 잠시만요!”
레아가 동생들을 부르러 간 사이 줄리엣이 묘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존댓말을 쓰시는 겁니까?”
“흠? 질투하는 건가?”
“···아니요.”
그냥 가볍게 농담이나 던져본 건데 진심으로 불쾌했는지 순간 그녀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애써 태연한 척하며 황급히 변명을 덧붙였다.
“그녀와는 고객으로 만난 사이라 존대하고 있었던 것뿐이야. 당연히 말도 편하게 놓을 생각이다.”
“굳이 저한테 설명하실 필요는 없습니다만.”
“···혹시 화난 건 아니지?”
“그럴 리가요.”
하긴 내가 레아한테 공손하게 존대하는 것도 그림이 이상하긴 하다.
콧수염까지 멋들어지게 기른 중년 남성이 한참이나 어린 여자한테 존댓말이라니. 흑심을 품고 느끼하게 들이대는 변태 신사 같잖아.
아무튼 교복을 입은 소녀 두 명이 레아를 따라 사무실로 들어왔다.
뤼팽과 구면인 레이첼은 꽤 친근하게 손을 흔드는 반면 항상 얘기만 들었지 실제로는 처음 와본 율리아는 어색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율리아입니다.”
“레이첼 양의 동급생이신가 보군요. 일단 여기 앉으시죠.”
좁은 사무실이지만 구색을 갖추는 용도로나마 접대용 소파를 들여놓긴 했다.
“얘기는 들었습니다. 장학금을 신청하고 싶다고요?”
“어 네. 가능할까요···?”
어딘지 자신감이 없어 보이는 율리아.
당연한 반응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레이스의 영애가 장학금을 신청하다니. 물론 성적만 생각하면 충분히 받을 수야 있겠지만 그럴 필요조차 없을 만큼 부유한 가문이니까.
“신청이나 누구든 가능하죠. 여기 신청서에 작성만 해주시면 됩니다.”
“넵.”
신청서를 쓰면서 힐끔힐끔 건너편에 있는 줄리엣을 힐끔거리는 시선.
애초에 이 사무실에 방문한 목적 자체가 장학금이 아니라 샤론을 닮았다는 직원을 보기 위해서였으니 저러는 거겠지.
그리고 소곤거리는 목소리.
“우와···.”
“닮았지? 그치?”
“응. 진짜 닮으셨다.”
어이. 아무리 그래도 당사자가 있는 앞에서 대놓고 그러는 건 실례잖아. 뒷담의 목적이 아니더라도 눈치챈다면 상당히 불쾌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때 줄리엣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순식간에 입을 다물고 합죽이가 되어버린 두 소녀.
그녀는 잠시 이쪽을 바라보더니 이내 성큼성큼 다가와서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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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엣은 과연 무슨 말을 했을까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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