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46
“장학금을 받기는 어렵겠네요.”
“···어 네?”
율리아의 앞에 서서는 다짜고짜 심사 불합격 통보를 날리는 줄리엣.
갑작스러운 상황 전개에 내가 뭐라 말릴 틈새도 없이 그녀가 서류를 집어 들고는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레이스 가문의 장녀라면 굳이 장학금 지원을 받지 않아도 무탈하게 아카데미를 다닐 수 있을 테니까요. 저희 재단은 여건이 어려운 학생들을 우선적으로 지원하거든요. 이사님 그렇죠?”
“어? 어···. 그렇긴 하네만.”
틀린 말은 아니다. 실제로 율리아가 신청서를 넣어봤자 무조건 탈락했을 테니까.
하지만 아직 작성도 안 끝났는데 그렇게 뺏어 들어서는 면전에 대고 불합격 통보를 날리는 게 맞나 싶다.
“아···. 그럼 어쩔 수 없죠.”
“그래도 일단 작성하신 서류는 제출해주시죠. 정확한 심사를 거쳐서 모두 공정하게 기회를 가져야 하니까요.”
“네. 여기 있어요···.”
율리아는 떨떠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본인도 심사에서 떨어질 것쯤은 예상했겠지만 그와 별개로 이런 대접을 받으리라곤 상상도 못 했겠지.
덕분에 분위기가 상당히 가라앉아버렸다. 이렇게 만든 장본인은 아무렇지 않게 다시 자리로 돌아가서 업무를 보고 있으니 결국 뒷수습은 내 처지가 되었다.
“많이 놀라셨다면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아 아니에요···. 저도 잘못을 했으니까요.”
괜히 귀족이 아니라는 걸까? 율리아는 곧바로 현 사태의 원인이 무엇인지 깨달은 듯했다.
엄밀히 따지자면 먼저 실례를 범한 건 손님으로 온 율리아와 레이첼이었으니까.
당사자가 있는 앞에서 누구와 닮았다느니 비교하며 자기들끼리만 속삭이면 당연히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다.
두 사람도 그래서 일부러 최대한 작은 소리로 얘기한 것 같지만 귀가 유난히 밝은 건지 줄리엣이 그걸 전부 들어버린 모양이다.
줄리엣의 대응이 좀 과격하게 보여도 율리아 역시 떳떳한 처지는 아니란 뜻이다.
그나저나 진짜 어떻게 들은 거지? 일반인이 알아차릴 수준이 아니었을 텐데.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문질렀다.
박살 난 분위기를 되돌리는 건 쉽지 않아 보였다. 그럴 바엔 차라리 같은 공간에서 떨어트리는 편이 제일 현명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혹시 장학금 신청 말고 다른 용건이 더 있으십니까?”
“아니요. 그게 전부에요.”
“알겠습니다. 심사 결과는 조만간 레이첼 양을 통해서 알려드리도록 하지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완곡한 축객령에 율리아도 별다른 군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뜻을 완벽하게 이해한 그녀와 달리 옆에 있던 레이첼 자매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우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니 벌써 가려고? 그래도 손님인데 차 한잔은 마셔야 하지 않나?”
나 참. 누가 들으면 여기가 우리 사무실이 아니라 너희 집인 줄 알겠다.
게다가 차는 네가 손님으로 왔을 때도 대접해준 적 없었거든?
“레이첼 양.”
“네?”
“친우분을 바래다주는 게 어떻습니까? 지금부터 언니분의 업무 교육으로 상당히 바빠질 예정이라서요.”
“아 그런 거였어요? 난 또 우리가 잘못해서 쫓겨나는 줄 알았네.”
너도 가만 보면 눈치가 더럽게 없구나. 괜히 가족이 아니란 건지 레아도 똑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아무튼 그렇게 두 소녀가 사무실에서 퇴장하고 나자 다행히 분위기가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그럼 저는 뭐부터 하면 될까요!?”
“음. 우선 이제부터는 말을 편하게 하겠네. 괜찮겠지?”
“무 물론이에요! 그럼 저는 주인님이라고 부르면 될까요?”
“아니. 절대 안 되지.”
어디 큰일 날 소리를. 줄리엣의 따가운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레아의 뒤틀린 인식을 바로잡아주었다.
“여긴 저택이 아니라 사무실이고 자네는 메이드가 아니라 우리 재단의 직원일세. 그러니 그냥 이사님이라고 부르게나.”
“아 알겠습니다! 이사님!”
벌써부터 피곤해지려 하네. 이래서야 라파노에 관한 정보는 언제쯤 알아낼 수 있을지 막막하게만 느껴졌다.
“그럼 저는 무슨 일을 하면 될까요? 혹시 저기 계신 분처럼 종이에 막 뭘 써야 하나요···?”
“아니. 사무 업무보다는 자네의 전공을 살리는 편이 좋겠지. 일단 지금은 청소와 비품 관리 손님 응대와 접객을 주로 담당해주면 되겠네.”
“그러니까···. 메이드 업무네요?”
“결은 비슷하겠군.”
이건 어쩔 수 없다. 당장 이거 말고는 그녀에게 시킬 만한 다른 업무가 없었으니까. 막말로 평생 메이드 일만 해왔던 사람한테 하루아침에 사무 일을 시킨다고 잘 해낼 리 없지 않은가.
게다가 내가 언급한 일들도 결국 누군가 해야만 하는 필수 업무이니 이왕이면 전문가에게 맡기는 편이 좋으니 말이다.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을 맡아서인지 그녀는 의지를 불태우며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럼 당장 시작하면 될까요!?”
“물론. 잘 부탁하겠네.”
“네! 맡겨만 주세요!”
사무실에 작게 딸린 창고로 쏜살같이 뛰어가는 레아. 아무래도 청소 도구함이 저기 있다는 걸 미리 파악해둔 모양이다. 그래도 평소 덤벙대던 모습과 다르게 일손은 뛰어난 편인 건가?
때마침 둘만 남게 되자 여태껏 침묵을 지키던 줄리엣에게 말을 걸었다.
“자네가 연장자이니 마음 넓게 이해해주게.”
“갑자기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네요.”
“아직 애들이지 않나. 얘기를 들어보니 나쁜 의도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새 몰래 엿들으신 건가요? 이사님도 음흉한 구석이 있으시네요.”
말 한마디를 안 지려고 하네.
나야 바로 맞은편에 있었다지만 본인은 한참 떨어진 곳에서 용케도 알아들은 주제에.
그녀는 서류를 정리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화 안 났어요.”
“그렇겠지.”
“정말이에요. 애초에 제가 어린 애들을 얼마나 상대해봤다고 생각하세요?”
“흠. 듣고 보니 일리가 있군.”
그녀는 고아원 출신이다. 원장에게 들은 바로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쭉 지내왔다고 들었다. 당연히 또래는 물론 한참 어린아이들까지 언니로서 상대해야 했겠지.
당장 고아원에서 유독 자주 마주치던 주황 색깔 머리의 아이도 줄리엣을 많이 따르는 듯했고.
이름이 분명 주디였던가? 요즘 고아원 방문이 뜸했던 탓에 가물가물하네. 조만간 한번 찾아가야겠다.
“그나저나 이사님이 이런 것까지 걱정하실 줄은 몰랐네요.”
“나름 우리 재단의 첫 장학생이지 않나. 게다가 그녀의 언니와도 앞으로 계속 일하게 될 텐데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편이 좋을 테니 말일세.”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저도 공과 사는 확실히 구분할 테니까요.”
확실히 지금껏 봐온 줄리엣이라면 고작 감정에 휘둘려 일을 망칠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다.
차갑다 싶을 만큼 계산적이며 이성적인 스타일.
게다가 독립한 지 몇 개월 만에 벌어들인 돈을 생각하면 속에 독기까지 품고 있겠지.
그래서 더 걱정됐다. 정말로 그녀가 믿을 만한 사람인지 헷갈렸다.
수상한 점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귀가 밝은 거야 그냥 그러려니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율리아에 대해 어떻게 알았던 거지?’
줄리엣은 율리아가 그레이스 공작가의 영애라는 사실을 단박에 언급했다.
그 목소리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섞이지 않은 채 오로지 확신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물론 신청서에는 풀네임이 적혀 있었으니 그걸 보면 알 수 있지만 줄리엣은 서류를 집어 들기 한참 전부터 이미 율리아의 정체를 파악한 상태였다.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봐도 그레이스라는 가문을 알아낼 정보가 없었다.
율리아는 본인을 소개할 때도 성을 빼고 이름만 언급했다.
수수한 교복 차림에선 그레이스를 떠올릴 상징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
그나마 유일한 힌트라면 그레이스 혈통을 상징하는 고결한 흑발 정도뿐.
그마저도 반드시 그레이스만이 검은 머리인 것은 아니니 결정적인 근거가 될 수는 없었다.
결국 남는 가능성은 단 한 가지뿐이다.
줄리엣은 원래부터 율리아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는 것.
하지만 어째서? 아무리 공작가의 영애라고 해도 율리아는 공식 선상에서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기껏해야 저번처럼 집안 행사가 있을 때나 잠깐 얼굴을 비추는 정도.
당연히 일반 사람들은 가주인 그레이스 경과 그의 형제들인 헨리 그레이스 길버트 그레이스 정도를 제외하면 얼굴을 모르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줄리엣은 율리아의 얼굴을 굳이 외워두고 있었다.
심지어 그냥 우연히 얼굴만 익혀둔 것도 아니었다. 그녀에 관한 정보까지 확실히 외워두고 있던 게 분명하다.
‘그레이스 가문의 장녀.’
그렇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율리아의 아버지가 가주 대리인 헨리 그레이스라는 사실까지 알아야 한다. 그보다 높은 위치인 그레이스 경에게는 딸이 없으니 율리아가 가문의 장녀인 거니까.
왜 굳이 대귀족 가문의 가계도를 이렇게까지 자세히 외워두고 있는 걸까?
그레이스 가문의 열렬한 팬이라서?
그게 아니라면···.
아마도 줄리엣의 이전 직업과 관련이 있는 거겠지.
내 생각은 후자였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사실은 전자였답니당!
줄리엣은 그냥 그레이스 가문의 열렬한 팬이었던 거에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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