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48
후. 하마터면 들킬 뻔했다.
아슬아슬하게 줄리엣의 집을 빠져나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걸리진 않았겠지? 설령 위화감을 눈치채더라도 아무 증거를 남겨놓지 않았으니 나라고 확신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쉽게 느껴지긴 했다. 결정적인 증거를 눈앞에서 놓친 셈이었으니까.
만약 조금만 시간이 더 있었더라면 전부 확인할 수 있었을 텐데.
그렇지만 종이를 빼가는 것은 리스크가 너무 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만에 하나라도 그게 꼬투리가 되어 뒤를 밟혀버리면 쫄딱 망해버리는 거다.
그래도 상당한 정보를 얻어냈으니 오늘은 이걸로 만족해야겠지.
내가 확인한 서류에는 그녀의 이전 직업이 뭐였는지 유추할 만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줄리엣은 첩보원으로 활동했던 것 같다.
그레이스 가문에 대한 세부적인 정보가 빼곡하게 기록되어 있었으며 그 외에도 브리타니아 내의 다양한 귀족 가문의 정보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있는 걸 확인했다.
여기까지는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던 사실이었다.
단기간에 그렇게 많은 돈을 벌어들이려면 남들에게 밝히기 힘든 직업을 가졌으리라고 예상했으니까. 수상할 만큼 다방면에서 유능했던 것도 그렇고.
문제가 있다면 정보를 넘기는 조직의 정체였다. 내 나름대로 여러 예상 후보지를 생각해두고 있었으나 전부 시원하게 빗나가고 말았다.
“설마 다른 나라일 줄은···.”
다름 아닌 프랑크 왕국이 그녀의 배후였던 것이다.
예언의 마녀를 만나러 갔을 때의 배경 정도로만 기억에 남아있던 이름을 설마 여기서 다시 마주하게 되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었는데.
솔직히 지금도 너무 비현실적이라 어안이 벙벙하다. 전부 나를 감쪽같이 속이기 위해 준비된 개꿀잼 몰래카메라가 아닐까 의심될 정도.
그야 직관적으로 생각해도 좀 이상하지 않은가?
줄리엣은 고작 몇 개월 전에 성인이 되어 고아원에서 독립했다. 그런데 단 몇 달 사이에 이웃 나라의 첩보원이 되어 브리타니아 귀족들의 정보를 몰래 넘겨주고 있었다고?
아무리 능력이 출중하다 하더라도 그만한 신용을 단기간에 쌓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어쩌면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 만약 첩보 활동을 고아원에 나온 뒤부터 시작한 게 아니라면?
즉 그 이전부터 프랑크 왕국과의 어떤 접점이 있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없다.
생각해보면 줄리엣이라는 이름도 프랑스식 작명 아닌가?
샤론도 약간 그런 느낌이 있고 혼시아라는 성도 영국보다는 프랑스에 더 어울리는 느낌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여기서부터는 별다른 증거 없이 직감에 따른 추측에 불과하기에 섣불리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아까 확인하지 못했던 나머지 서류의 내용이 아쉬울 따름이다.
일단 가능성은 전부 열어두자. 어차피 마법과 괴도가 실존하는 세상인데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그보다도 지금 제일 중요한 건 줄리엣이 여전히 첩보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지였다.
만약 그렇다면 그녀가 내 정체를 알아차렸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까.
정확히는 몰라도 내가 괴도라는 사실을 반길 것 같지는 않았다.
머리가 복잡해지는 탓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편하게 괴도 활동에만 전념하고 싶어서 움직이는데 그럴 때마다 오히려 신경 써야 할 문제들이 늘어지기만 하는 느낌이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속세와의 연을 끊고 괴도 레이븐으로서만 살아가는 것이 정답 아닐까?
이렇게 생각해봤자 결국 또 움직이겠지만 말이지.
그 뒤부터는 머릿속으로 앞으로의 계획을 구상하며 여신님과 함께 오붓이 밤하늘을 구경했다.
그렇게 하루가 저물었다.
***
다음 날 평소와 다름없이 아카데미에서 흘러가는 일상.
중간시험도 얼마 전에 끝났다 보니 분위기는 잔뜩 풀어져 수업 시간에도 제대로 집중하는 학생은 얼마 되지 않았다.
물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작심삼일이라고 하던가. 마법 실력을 끌어올리겠다는 내 결심은 고작 일주일 만에 바스스 사그라들고 말았다.
그렇지만 나도 억울하다고. 하교 이후에 워낙 할 일이 많아서 바쁘다 보니까 아카데미에선 축 늘어져 흐느적거릴 수밖에 없단 말이다.
“너 상태가 왜 그러냐? 친척이랑 밤새 놀기라도 했음?”
“어. 대충 비슷해.”
적당히 둘러대자 레이첼은 콧방귀를 끼며 시선을 거뒀다.
“에휴. 친구 버리고 노니까 재밌던? 너 나중에 그러다 후회한다? 우리처럼 예쁜 미녀랑 어울릴 기회가 얼마나 있을 줄 알고.”
“넌 네 입으로 스스로 미녀라고 하면 안 쪽팔려?”
“내가 왜? 미녀가 미녀라고 하는데.”
참 대단한 자신감이다. 차마 그 말에 반박하지 못한다는 것이 더 얄미웠다.
“우리 부잣집 아가씨야 말할 것도 없고.”
“그건 맞지.”
“야. 나한테는 뭐라 하더니 왜 율리아는 바로 인정하냐?”
진짜 몰라서 묻는 걸까. 율리아가 미녀라는 말에 반박하는 사람이 있겠냐고.
물론 레이첼도 외모만 따지자면 예쁜 건 사실이지만 인상이나 분위기가 좀 무섭다 보니 취향을 많이 타는 스타일이랄까.
아무튼 내 취향으로 따지자면 둘 중에선 율리아가 더 예쁘다고 생각한다.
이미 몇 번이나 밝혔듯이 나는 청초하며 상냥한 천사 같은 여자가 좋단 말이지.
그런 의미에서 율리아는 내 이상형에 가장 가까운 존재이긴 하다.
괴도 레이븐을 향한 광신적인 팬심만 없었다면 참 완벽했을 텐데.
“응? 나 불렀어?”
마침 주변을 지나가던 율리아가 대화 속에 이름이 언급되자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이 새끼가 너···. 읍!”
“하하. 아무것도 아니야.”
뭔가 이상한 말을 하려 했던 게 분명한 레이첼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고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핥짝.
“으악!”
“퉤. 맛없네.”
순간 등골에 소름이 끼쳤다. 얘가 드디어 미쳤나?
그런데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성질을 부리는 레이첼.
“어쭈. 내가 그동안 좀 봐주니까 많이 컸다? 이제 내 입에 막 손도 들이밀고. 조금만 더 있으면 아주 그냥 덮치겠어?”
“반에서 이상한 소리 좀 하지 마!”
“그럼 단둘이 있을 때는 해도 된다는 뜻?”
세상에. 오늘로써 확실해졌다.
이 녀석은 여신님과 동급으로 분류될 만큼 단단히 미친 여자라는 것을.
대체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던 청초하고 수줍음 많던 레이첼은 어디로 사라져버린 걸까? 그리움에 눈물이 앞을 가리려 한다.
율리아는 그런 우리의 실랑이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멋쩍게 웃었다.
“둘이 되게 친해 보이네.”
“엥? 내가? 얘랑? 야. 아무리 그래도 할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있지.”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거든.”
“너 자꾸 기어오를래. 앞으로 오냐오냐해주면 안 되겠어.”
어쩌다 이런 처지가 됐을까. 그래도 지금이 빙의한 직후의 친구가 아예 없던 시절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 생각을 다시 재정립해야 할 때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내 지난날들을 돌아보던 와중 살짝 열린 뒷문 틈새로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이 서로 마주 보며 얘기를 나누는 모습을 발견했다.
‘왜 쟤네 둘이···?’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신선한 조합에 눈이 퍼뜩 뜨였다.
내가 느끼는 감정은 강한 불안감이었다.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는 몰라도 절대 좋은 신호가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나 잠깐 화장실 좀.”
그냥 놔둬선 안 된다는 결론을 내리고서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로 향했다.
내가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동시에 이쪽으로 향하는 두 사람의 시선.
은발과 금발. 나란히 서 있으니 아주 한 폭의 예술 작품이 따로 없다.
어디까지나 겉모습만 따졌을 때의 얘기일 뿐 둘의 실체를 아는 나로선 이보다 끔찍한 장면이 없단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내 얼굴을 확인한 그레인저가 씩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반에 있잖아. 왜 없다고 구라쳤냐?”
그러자 맞은편에서 샤론이 냉랭한 무표정을 한 채 전혀 주눅 들지 않고 대답했다.
“거짓말한 적 없어. 나도 안에 있는지 몰랐으니까.”
“하.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응. 그렇게 생각해.”
살벌하다. 나도 모르게 다시 뒤돌아 도망치고 싶을 만큼 분위기가 살벌했다.
대충 얘기를 들어보니까 그냥 내가 등장하지 않는 편이 더 좋았던 걸지도.
샤론이 내가 반에 없다고 말하면서 적당히 그레인저를 돌려보내려 했던 것 같은데 하필 내가 뒷문을 열고 당당히 나타난 탓에 상황이 묘해져 버린 듯했다.
그나저나 이 녀석은 또 무슨 일일까?
중간시험에서 거하게 사고를 친 이후로는 잠잠해졌길래 한동안 기억에서 잊고 잘 지냈는데.
게다가 왜 하필이면 나를 굳이 콕 집어서 부른 거지? 뭔가 불안했다.
“야. 뺀질이.”
“오 오랜만이네? 하하.”
적당히 친근한 척하며 어물쩍 넘어가려 했는데 아무래도 그 태도가 녀석의 심기를 거슬러버린 듯했다. 눈을 팍 찌푸리며 싸늘한 표정이 되어버린 그레인저.
“뒤질래. 어디서 친한 척이야.”
그러자 샤론이 우리 사이를 가로막으며 다시 녀석과 대치했다.
“시비 걸 생각이면 그냥 돌아가.”
“···하. 진짜 어이가 없네. 하다 하다 이런 년한테까지 무시당할 줄이야.”
그건 듣는 내가 기분 나쁜데. 샤론이 뭐 어떻다고 너 같은 싸가지한테 ‘이런 년’ 취급을 받아야 해?
“너희. 운 좋게 협동 시험에서 한번 이겼다고 우쭐해진 모양인데. 내가 제대로 나섰으면 무조건 이겼어.”
“그럼 제대로 좀 하지 그랬어.”
“···뭐?”
나는 피식 웃으며 친절하게 다시 말해주었다.
“그러게 좀 제대로 했으면 좋았잖아. 안 그래?”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날씨가 또 추워지네용..
다들 몸 조심하는 거에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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