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49
“지금 뭐라고 했냐?”
내 도발에 살기 넘치는 눈빛으로 노려보는 그레인저.
살 떨리는 대치가 한동안 이어지던 와중 녀석이 먼저 작게 혀를 차며 침묵을 깨트렸다.
“쯧. 됐다.”
어라. 생각보다 너무 순한 반응인데?
당연히 미친개처럼 왕왕 짖으면서 날뛸 줄 알았더니 아무렇지 않게 넘길 줄이야.
하기야 아무리 녀석이라 해도 학생들이 지나다니는 복도에서 대놓고 덤벼들지는 않겠지.
게다가 지난 중간시험 사건 때문에 교사들도 상당히 눈치 준 걸로 알고 있으니.
그렇게 되니 괜히 내가 더 멋쩍어져 버렸다.
“음···. 그나저나 나한테는 무슨 볼일이야?”
생각해보면 이 녀석이 굳이 나를 만나러 반까지 찾아올 이유가 없는데 말이지.
심지어 다소 껄끄러운 관계인 샤론에게 말을 걸면서까지 나를 찾은 거잖아.
설마 또 싸우자면서 결투 신청을 하러 온 건 아니겠지?
녀석은 어울리지 않게 우물쭈물하다 겨우 말을 꺼냈다.
“너. 수업 마치고 나랑 좀 같이 가자.”
“어?”
난데없는 요구에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 살짝 뒷걸음질 쳤다.
“진짜 결투 신청이었어···?”
“뭔 헛소리냐. 내가 너 같은 약골이랑 결투를 왜 해?”
그건 그거대로 좀 기분이 나쁜데 말이지.
이래 봬도 1학년 중에서는 한 손에 꼽힌다고 자부할 수 있다. 특히 지난번 얻은 천년 진주의 힘을 전부 흡수하면서 한 단계 더 훌쩍 성장했으니까.
물론 그걸 감안해도 아직 그레인저한테 확실히 이긴다는 확신은 없었다.
인정하기 싫어도 이 녀석은 그냥 압도적으로 강하다. 그러니까 원작에서 주인공의 라이벌이 될 수 있던 거겠지만.
그런데 결투 신청이 아니면 얘가 나한테 이런 얘기를 꺼낼 이유가 없는데?
“다짜고짜 그렇게만 말하면 어떻게 알아. 이유까지 설명을 해줘야지.”
“하···. 뺀질이 주제에 진짜 바라는 것도 많네.”
아니 이게 내가 쿠사리 먹을 일이야?
그나저나 얘랑 이렇게 허물없이 얘기를 나누고 있으니까 어쩐지 기분이 이상하네.
아무리 사고라고는 하지만 고작 며칠 전에 이 녀석의 폭주로 죽을 뻔하지 않았나.
“···저번 그 일 진술 때문에 너희 중 아무나 데려오래서.”
“진술? 그건 그날 전부 끝냈잖아.”
다른 애들은 전부 시험 마치고 놀러 가는데 우리만 아카데미에 남아서 진술하느라 얼마나 억울했는데. 그걸 또 해야 한다고?
“그때는 아카데미 내부 진술이고. 이번에는 다른 놈들이라던데.”
“다른 놈들? 누군데?”
그레인저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집행자 말이야.”
“···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름에 잠깐 당황했으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집행자는 이면에서 벌어지는 신비와 관련된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
즉 마법 아카데미 또한 집행자의 활동 범주에 속한 집단이란 뜻이다.
쉽게 비유하면 저번에는 학교 측에서 자체적으로 조사한 거고 이번에는 경찰들이 직접 학교에 찾아와서 사건을 조사하는 셈이다.
이게 그 정도로 심각한 문제였던가?
하긴 시험 도중에 학생이 4명이나 죽을 뻔했으니 그럴 만도 하겠네.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지. 솔직히 집행자와는 악연이 있다 보니 좀 껄끄럽긴 했지만 이런 상황에서 진술을 거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말하려던 찰나 옆에서 얘기를 듣고 있던 샤론이 말을 가로챘다.
“왜 크로야?”
“또 뭐. 뭐가 불만인데.”
“다른 애들도 있잖아. 왜 크로만 데려가?”
얘네는 왜 말을 섞기만 하면 서로 으르렁거리는 거냐. 겨우 풀어졌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다시 싸늘해지기 시작했다.
“아무나 데려오면 된다고 하길래 데려가는 건데 문제 있냐?”
“그럼 나랑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나한테 부탁할 수도 있었잖아.”
“내가 왜 너 같이 싸가지 없는 년한테 부탁해야 하는데?”
미쳐버리겠다. 그레인저야 원래 저런 성격이니 그렇다 쳐도 왜 샤론까지 날을 세우며 굳이 싸워주는지 이해가 안 된다.
팽팽한 신경전 속에서 그레인저가 갑자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설마 너 지금 질투하냐?”
이건 또 뭔 소리래.
이쯤 되면 녀석이 걱정될 정도다. 설마 드래곤 마법의 부작용 때문에 머리가 어떻게 된 건 아닐까.
샤론은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침묵으로 무시해버렸다.
진짜 무슨 사고의 흐름을 거치면 저런 결론이 나오는 걸까.
샤론이 내게 그런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떠나서 대체 왜 남자한테 질투심을 느끼냐고.
이 이상 더 둘을 붙여놓았다간 내가 더 못 버틸 것 같았기에 중간에 끼어들어 상황을 정리했다.
“알았어. 수업 마치고 같이 갈게. 이제 됐지?”
“···오냐. 기다리고 있어라.”
우리 둘을 번갈아 바라보다 김이 샜다는 듯 콧방귀를 끼며 돌아서는 그레인저.
미련 없이 복도 반대편으로 떠나는 뒷모습을 잠시 쳐다보다 샤론에게 시선을 돌렸다.
“우리도 이제 들어가자. 수업 시작하겠다.”
“괜찮겠어?”
“응? 아 나도 쟤는 좀 불편하긴 한데.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
아하. 그래서 일부러 나서줬던 건가. 아무래도 내가 그레인저를 불편해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런 뜻은 아니었지만. 괜찮다면 됐어.”
응? 그게 아니었다고?
그럼 무슨 뜻인가 궁금했지만 더 물어볼 새도 없이 샤론은 반으로 쌩하니 들어가 버렸다.
참 알다가도 모를 성격이다. 그래도 나를 걱정해준 건 맞아 보이니까 이걸 고맙다고 해야 하려나.
샤론을 뒤따라 반 안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으니 레이첼과 율리아가 고개를 들이밀며 물었다.
“뭐야. 왜 둘이 같이 들어와?”
“복도에서 만났어.”
“씁···. 뭔가 수상한데. 저번에 둘이 동시에 빠진 것도 그렇고. 역시 뭐 있는 거 아니야?”
레이첼은 저번부터 그러더니 나랑 샤론을 엮는 데에 맛 들였나 보다.
설상가상 율리아까지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옆에서 추궁해오기 시작했다.
“얼핏 보니까 둘이 복도에서 꽤 오래 있던 거 같은데. 무슨 얘기 했어?”
그걸 또 어느 틈에 봤대. 물론 나도 복도에 샤론이랑 그레인저가 서 있는 걸 보고 나갔던 거긴 하지만.
뭐 딱히 숨길 내용도 아니었으니 그냥 떳떳하게 밝히기로 했다.
“진짜? 집행자가 아카데미에 온다고?”
“우와···.”
집행자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감탄을 내뱉는 두 사람.
어찌 보면 이런 반응이 당연한 거였다. 아카데미에 다니는 학생이라면 누구나 집행자를 향한 선망을 품고 있을 테니까.
“그럼 너 집행자한테 잡혀가는 거야?”
“내가 피해자인데 왜 잡혀가겠냐. 이 바보야.”
“뭐? 바보? 이게 진짜 자꾸 까부네?”
그래. 내가 너무 직설적으로 말하긴 했지. 레이첼은 단지 뇌가 좀 순수할 뿐인데.
“우리도 같이 가야 하는 거 아닐까?”
“글쎄. 걔 말로는 우리 중에서 한 명만 따라가면 된다는 것 같던데.”
“근데 그 새끼는 왜 하필 너를 콕 집어서 골랐대?”
“그건 나도 모르지.”
추측해보자면 우리 넷 중에선 내가 유일한 남자이니까 그나마 제일 편해서이려나?
사실 걔가 그런 걸 신경 쓸 성격은 아닌 것 같지만 정확한 이유는 본인만 알고 있겠지.
율리아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우리도 같이 가줄까?”
“됐어. 저번처럼 오래 걸릴 수도 있는데 뭐하러 다 같이 가. 시간 아깝게.”
“응···. 그럼 알겠어.”
어째선지 약간 아쉬워하는 듯한 율리아를 뒤로 하고 다시 수업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어느덧 종례 시간이 되었다.
여느 때처럼 담임 선생님의 짧고 간결한 종례가 끝난 뒤에 복도로 나가 보니 그레인저가 벽에 기댄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번 사건에 대한 소문이 퍼진 탓인지 녀석을 보고 웅성대는 우리 반 아이들.
지금 다가갔다간 괜히 나까지 같이 묶여서 화젯거리가 될 게 뻔해서 잠깐 머뭇거렸다.
“야. 뺀질이. 빨리 안 튀어오냐?”
“···일찍 마쳤나 보네.”
녀석이 먼저 나를 정확히 보면서 말을 건 덕분에 어쩔 수 없이 그리로 다가갔다.
“응? 뭐가.”
“종례 말이야. 우리 반이 제일 일찍 마쳤을 줄 알았는데 먼저 기다리고 있었잖아.”
“그냥 빠졌는데?”
“어?”
내가 되묻자 오히려 왜 그러냐는 듯이 쳐다보는 녀석.
“뭘 꼬라봐.”
“그렇게 마음대로 빠져도 되는 거야?”
“수업도 아닌데 뭔 상관이야. 그리고 담임도 내가 조사받으러 가야 하는 거 아니까 이해하겠지.”
“말도 안 하고 그냥 나왔다는 거네.”
“시끄럽고 빨리 가기나 하자.”
새삼 느끼는 거지만 참 대단한 녀석이다.
레이첼의 진화 버전이라고나 할까. 어쩜 저렇게 막 나갈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우리는 다른 아이들의 시선을 한눈에 받으며 복도를 걸어갔다.
그나저나 설마 아카데미 안에서 집행자와 마주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내 정체도 그렇고 집행자와는 여러모로 악연이 있다 보니 껄끄럽긴 했다.
에반 레지널드. 내가 아는 유일한 집행자를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너의 재능을 올바른 방향으로 써라. 내가 너를 집행자로 키워줄 테니.’
지금 돌이켜봐도 참 어처구니없는 제안이었다.
만약 내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어떻게 됐을까? 괴도 레이븐이 아니라 집행자 레이븐으로서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었을까.
인제 와서 생각해봤자 아무 의미 없는 가정이지만.
그런데 설마 이번에 찾아온 집행자가 그 아저씨는 아니겠지?
“여기네. 들어간다.”
벌컥!
상담실이라 적힌 문 앞에서 멈춰 서자마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문을 열어버리는 그레인저.
그리고 방 안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새하얀 제복의 집행자와 정확히 눈이 마주쳤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늘은 고민이 많아지는 하루네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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