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5
“후···.”
서둘러 밖으로 빠져나오며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마녀는 장난기가 너무 심해. 한번 들를 때마다 진이 다 빠지는 기분이다.
당연히 제안은 거절했다. 그래도 진지하게 요구하지 않고 바로 넘어갔으니 다행이랄까.
몇 번이나 강조했듯 나는 순애파라고.
아무리 매력적인 여인의 유혹에도 쉽게 넘어갈 생각 따위 없다.
어쨌든 무사히 소개장을 받았으니 이제 카드에 적혀있는 장소로 가서 모방꾼을 만나면 된다. 그에게 훔칠 등대 그림의 모조품을 부탁하는 거지.
사실 모방꾼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원작에서도 등장한 적 있는 캐릭터니까. 다만 비중도 크지 않은데다 여러모로 수수께끼인 수상한 남자로 기억한다.
그런데 설마 마녀와 모방꾼 사이에 커넥션이 있을 줄이야.
둘을 연결 지어 생각하니 비슷한 점이 꽤 많다는 걸 뒤늦게 눈치챘다.
어쨌든 모방꾼의 정확한 위치를 알아낸 건 꽤 큰 수확이다. 괴도 활동에 여러모로 도움을 받기에 최적화된 인물이니 최대한 활용해야겠지.
“여기인가?”
카드에 적힌 주소와 비교하며 꼼꼼히 확인했다.
일단 적혀있는 대로면 여기가 확실한 거 같네.
생각보다 의외로 평범한 장소였다. 주택가가 늘어진 거리의 지하. 지나가는 사람이 본다면 평범한 술집 정도겠거니 생각하며 무심히 지나칠 만한 느낌이었다.
나는 계단을 타고 내려가 굳게 닫힌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잠겨있지 않던 문은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요란하게 존재감을 과시했다.
약간은 텁텁한 지하의 공기. 서늘한 냉기가 목덜미에 쭈뼛 소름을 돋게 하였다.
[심상치 않은 기운이군. 평범한 남자는 아닌 모양이다. 조심하거라.]
평소답지 않은 여신님의 진지한 경고.
확실히 만화로 봤을 때와 현실로 구현된 세상은 비교하기 민망할 정도로 차원을 달리했다.
침을 삼키고 애써 마음을 가라앉힌 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무도 안 계세요?”
“오랜만의 낯선 손님이군.”
안쪽에서 들리는 무덤덤한 사내의 목소리.
그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어두운 조명 아래 의자에 앉아있는 한 남성이 보였다.
그는 새하얀 캔버스를 앞에 둔 채로 이쪽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하하···.”
무섭다. 과장 조금 보태 순간 지릴 뻔했다.
내가 이렇게 과민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단순히 공포스러운 분위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남자의 차림새가 어떻게 봐도 정상적이진 않기 때문이다.
붕대를 칭칭 둘러 감았는데 그 수준이 지나쳐 눈을 제외하고는 아예 맨피부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이집트의 마스코트인 미라와 비견될 정도.
만약 중절모와 검은 코트를 입지 않았다면 진짜 미라와 똑같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분명 만화를 통해 생김새를 알고 있었음에도 처음 본 순간 놀라 까무러칠 뻔했다.
그나마 겉으로 큰 반응을 드러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나는 애써 여유로운 척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하하. 안녕하세요. 모방꾼 씨.”
“이거 꽤 유명한 스타가 행차했군. 요즘 세상이 자네의 이야기로 떠들썩하던데.”
“잠시 불었다 사라지는 산들바람 같은 거죠.”
“겸손의 미덕까지 갖췄다는 건가. 대단하군.”
뭐랄까. 분명 말만 따졌을 땐 평범한 덕담이 맞는데 말하는 사람의 인상이 워낙 강렬해서 그런지 신랄한 비꼬기처럼 들려왔다.
생각을 그만두고 나는 그에게 카드를 건넸다.
앞면에는 이곳의 주소가 적혀있고 반대편 뒷면에는 마녀의 간략한 소개장이 있었다.
“과연. 그녀의 고객이었나.”
“마녀 씨에겐 많은 신세를 지고 있죠.”
“확실히 괜찮은 여자지. 돈을 너무 밝히는 것만 빼면.”
하하. 그런데 왜 나한테는 돈보다 이상한 걸 자꾸 요구하는 걸까.
“그래서 괴도가 이곳까진 무슨 일이지?”
“당신에게 주문을 맡기고 싶어서요.”
“과연. 어찌 보면 모방과 괴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지.”
그가 하는 일은 매우 간단하다. 모방꾼이란 이름에 걸맞게 가짜를 만들어낸다.
사실상 한계는 없다. 그에 맞는 재료만 준비할 수 있다면 설령 무엇이든 간에 모방꾼은 창조해낼 수 있다. 그것이 가짜라는 사실만 제외하면 말이다.
“어떤 걸 모방하고 싶나? 괴도여.”
“폭풍우 치는 밤의 등대. 그게 제가 원하는 겁니다.”
“과연. 고작 그림이라면 어려운 것도 없지.”
이름을 듣자마자 오케이 사인을 던지는 모방꾼. 물론 당연하게도 공짜일 리는 없다.
“얼마면 될까요?”
“나는 돈은 받지 않네. 나와의 거래는 좀 특별하거든.”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원작에서도 주인공에게 특별한 대가를 요구하니까.
“내겐 필요한 재료가 있어. 그걸 가져와 주기만 하면 되네. 딱히 어렵지도 않지.”
어렵지 않다고?
원작을 읽었던 나로선 그 말의 뜻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다. 그가 부탁한 재료를 구하는 건 실제로 굉장히 쉬운 일인 건 사실이다.
다만 주인공이 재료를 찾으러 갈 때는 상황이 이리저리 꼬여 정말 죽을 뻔할 정도로 어려운 일로 변모해버리지만.
“저는 그림을 바로 얻고 싶은데. 재료를 먼저 가져와야만 하나요?”
“흠. 이번엔 특별히 후불로 계산해주지. 자네와는 이번 한 번으로 인연이 끝날 것 같진 않으니까.”
“하하. 감사합니다.”
좋아. 이러면 사실상 변수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가 부탁한 재료를 구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시간이니까.
“그러면 가짜가 완성되는 데 얼마나 걸리나요?”
“하루면 충분해. 내일 편한 시간에 방문하게.”
“알겠습니다.”
다행히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순조롭게 거래를 끝마쳤다.
압도적인 첫인상과 달리 생각보다 되게 젠틀한 신사였잖아.
“그러면 내일 다시 찾아뵙도록 하죠.”
작별 인사를 고하고 지하를 떠나려던 찰나. 모방꾼이 등을 돌렸던 나를 불러세웠다.
“이봐. 괴도 양반.”
“네. 무슨 할 말이라도?”
“가짜 같은 진짜와 진짜 같은 가짜. 자네라면 둘 중 뭘 선택하겠나?”
상당히 낯익게 느껴지는 질문의 내용. 그가 원작에서 주인공에게 던졌던 영문 모를 물음이었다.
그때 주인공인 레이어드는 분명 이렇게 말했었지.
자신이 진짜라고 여긴다면 그 본질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확실히 주인공다운 대답이었다.
그렇다면 나도 나다운 대답을 내놓아야겠지.
“꼭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필요가 있나요?”
“흠?”
“둘 다 훔쳐서라도 가지면 그만이니까요.”
이런 대답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지 모방꾼은 붕대 너머로 잠깐 당황했다가 이내 낮게 실소를 흘렸다.
“참으로 치졸한 대답이군.”
“그게 괴도니까요.”
“그래. 그렇군.”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인정하는 그의 안색은 꽤 밝아 보였다.
내 대답이 아무래도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조심히 들어가게. 치졸한 괴도여.”
“앞의 수식어는 빼도 괜찮을 거 같네요.”
내가 인정했다고 해도 막상 들으니까 은근 기분 나쁘네.
아무튼 그 대화를 끝으로 나는 모방꾼의 지하실을 빠져나왔다.
***
계획의 가장 핵심인 모조품도 주문을 끝냈다.
이제 모방꾼이 그림을 완성할 때까지 기다리며 트릭을 꼼꼼하게 짤 차례였다.
당연한 얘기지만 가짜 그림이 있다고 해서 뿅! 하고 그림을 훔치는 건 불가능하다.
가짜와 바꿔치기를 하든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든 일단 잠입해서 무사히 목표 그림을 훔칠 루트부터 만드는 게 우선이다.
우선 미술관의 구조를 완벽하게 파악했다.
‘확실히 박물관보다는 단순하네요.’
[아마 그곳은 이전보다 훨씬 삼엄해졌겠지.]
그럴 수밖에. 한낱 좀도둑이라 무시했던 나한테 완전히 농락당하고 전시품을 털린 굴욕을 맛봤으니 두 번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방비에 훨씬 더 신경쓸 테니까.
반대로 이번 목표인 미술관은 일개 개인이 운영하는 사립 미술관. 게다가 객관적으로 봤을 때 엄청나게 가치가 높은 미술품이 전시되어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러니 건물의 구조나 경비가 단순하고 허술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예고장을 보내면 한순간에 달라지겠지만.
경찰들이 눈에 불을 켜고 나를 찾는 상황이니 예고장을 보내는 순간 곧바로 미술관까지 달려와 철통 요새를 세워버리지 않을까.
그러니 더욱더 꼼꼼한 트릭 설계가 중요한 거고.
건물 구조 외에도 미술관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정보는 싹 훑어보았다.
“미술관 운영주는 상당한 악인인 거 같네요.”
[어떻게 할 거냐? 반환? 기부?]
“이번에는 기부로 가죠.”
굳이 그림을 돌려줄 만큼 착한 사람은 아니다. 그러면 차라리 더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게 낫겠지.
괴도라는 직업은 자본주의에 어긋나는 존재구나.
애초에 자본주의를 따지기 이전에 엄밀히 말하면 범죄자이지만.
시답잖은 생각은 그만두고 다시 트릭 설계에나 집중하자.
분명 박물관보다 훨씬 허술하니 공략할 만한 빈틈도 더 많을 것이다.
뚫어지라 도면을 노려보면서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려보았다.
그렇게 마침내. 내 머리로 짤 수 있는 최고의 루트를 만들어내었다.
“좋았어. 이제 모조품을 받고 예고장만 보내면 돼요.”
[꽤 자신이 넘치는구나.]
그야 당연하지.
솔직히 이건 천하의 셜록도 쉽게 간파해내긴 어려울 것이라고 자신한다.
“기대하세요. 이번에 미술관을 털고 나면 모든 사람이 경악할 테니까요.”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늘부터 플러스로 달립니당!
꽉 잡으세용! 부릉부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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