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50
집행자를 보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궁전에서 마주쳤던 집행부장과는 다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변장의 가능성을 염두에 둘 필요는 없었다. 애초에 성별부터 다르니까.
물론 그 남자가 온다 해서 단박에 내 정체를 알아차릴 가능성은 거의 없겠지만.
새하얀 제복을 입은 여인이 우리를 마주 보며 덤덤히 입을 열었다.
“진 그레인저 학생이신가요.”
“네. 맞는데요.”
그래도 집행자 앞에서는 존댓말을 쓰긴 하는구나.
말투가 예의 바른 느낌은 아니긴 한데 이게 어딘가 싶다.
“뒤에 학생은 이름이 어떻게 되죠?”
“크로 모리스입니다.”
“네. 확인했습니다. 일단 두 분 다 자리에 앉아주시죠.”
한 명씩 따로가 아니라 동시에 진행하는 건가?
나로서야 나쁠 건 없었다. 빨리 끝나고 얼른 돌아가고 싶었으니까.
저번에도 느낀 거지만 다른 애들은 전부 하교했는데 나 혼자만 이렇게 남아있으니 좀 억울하다 해야 하나.
“우선 사건의 개요를 다시 한번 설명해주시겠어요? 먼저 모리스 학생의 얘기부터 들어보죠.”
그녀의 요구에 따라 나는 그날 벌어졌던 일을 간략히 축약해 설명해주었다.
사실 할 얘기가 딱히 많지도 않았다. 우리는 그냥 열심히 시험을 치르다 그레인저와 만나서 싸웠는데 도중에 상대가 갑자기 폭주한 것뿐이니까.
내 설명을 들으며 묵묵히 서류를 작성해나가던 그녀는 얘기가 끝나자 옆에 있던 그레인저에게도 똑같이 요구했다.
이번 사건의 당사자인 만큼 이 녀석의 진술이 제일 중요하겠지.
“저번에 다 했는데. 또 해야 해요? 그냥 그때 기록해뒀던 거 읽으면 되지 않나.”
얘도 참 대단하다. 집행자 앞에서 저렇게 깡다구를 부릴 수 있는 아카데미 학생이 얼마나 될까.
심지어 은근슬쩍 반존대까지 섞어버리네.
“사실관계를 확인하기 위해서니 협조 부탁드립니다.”
“뭐 그럼 귀찮긴 한데 어쩔 수 없죠.”
그레인저의 얘기는 아까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훨씬 더 생략되어 비어있는 구간이 많긴 했지만.
우리의 진술을 전부 들은 집행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부터는 더 자세히 질문하겠습니다. 먼저 마지막 전투에서 사용한 마법에 관해 설명해주시죠.”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그 말은 의도하고 사용한 것이 아니란 뜻인가요?”
“글쎄요. 기억이 잘 안 나서 모르겠어요.”
이쯤 되면 집행자랑 기싸움하고 싶다는 건가 했지만 아무래도 표정을 보니까 진짜 솔직하게 대답한 느낌이었다.
의외로 아무 표정 변화도 없이 서류 작성을 이어간 집행자는 뒤이어 내게 시선을 돌리고 질문했다.
“목격 증언에 따르면 그레인저 학생의 뒤에서 흐릿하게 드래곤의 형상이 나타났다고 했죠. 정확히 어떤 모습이었는지 기억나는 대로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어···. 일단 시험장 천장에 닿을 만큼 거대했고 색깔은 붉은색에 가까웠던 거 같아요.”
그때 당시를 떠올리니 아직도 섬찟한 감각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처음 드래곤이 생겨날 때는 진짜 여기서 죽는 건가 했었지.
“마지막 공격을 브레스라고 표현했는데 정확히 어떤 상황이었죠?”
“말 그대로 드래곤이 입을 벌리더니 거기에 마력이 모였어요.”
“피해 현장을 보니 방어 마법이 걸려있던 시험장의 천장을 전부 부숴버렸더군요. 그만한 마법을 어떻게 막아내신 거죠?”
세세한 점까지 물어보는 집행자의 물음에 기억을 되짚으며 대답했다.
“드래곤의 가슴팍에 있던 비늘을 공략했어요. 브레스를 쏘려는 순간에 맞춰서 터뜨려서 방향을 위로 틀었죠.”
지금 생각해도 참 아슬아슬했다. 까딱 잘못해서 브레스를 정통으로 맞기라도 했다면 지금 이렇게 멀쩡히 살아남아 무용담을 떠들지도 못했겠지.
그렇게 생각하니까 또 굉장히 괘씸하게 느껴지네. 사람을 죽일 뻔해 놓고서 사과 한마디 없이 뻔뻔하게 내 옆에 앉아서 건들거리고 있는 거잖아.
“가슴팍의 비늘이 약점이란 사실은 어떻게 알아내신 거죠?”
“그건···.”
브레스를 막은 건 나였지만 드래곤의 가슴팍이 약점이란 사실을 알아낸 것은 내가 아니었다.
“같은 팀이었던 친구가 얘기해줬어요.”
“그 학생의 이름은요?”
“샤론 혼시아요.”
집행자는 샤론의 이름을 듣자마자 서류에 무언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대화의 흐름이 조금 이상해진 것 같다. 처음에는 그냥 저번과 똑같은 일반적인 진술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얘기를 나눌수록 조금씩 위화감이 느껴졌다.
정상적인 조사라면 제일 중요한 건 그레인저의 의도성이다. 다른 사람을 해치려던 의도가 있었는지 아니면 시험 과정에서 일어난 단순 사고인지 파악하는 것이 최우선이란 뜻이다.
그런데 집행자는 그보다 그레인저가 사용한 마법 자체에만 집중하는 느낌이 있었다.
물론 그녀가 말한 대로 사실관계를 확인하기 위한 절차일 수도 있지만 그냥 넘기기엔 어딘가 찜찜함이 남았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저···. 그런데 하나만 여쭤봐도 되나요?”
“물론이에요. 편하게 말씀하시죠.”
“오늘 조사는 어떤 이유로 진행되는 건가요?”
내 질문에 순간이나마 표정이 흐트러진 상대방. 하지만 눈 깜짝할 새에 원래의 무표정으로 돌아가 제대로 읽을 수가 없었다.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일단 상대가 의심하지 않도록 밑밥을 깔아두자.
“혹시 얘가 일부러 저희를 죽이려 했다던가 그런 것 때문이면 그건 아니거든요. 저희가 봤을 때도 확실히 이성을 잃고 폭주한 상태였고···.”
“뭐냐. 뭐 잘못 먹었냐? 뺀질이 주제에 갑자기 왜 날 변호해준대?”
내가 설마 너 좋다고 그러겠니. 일단 나부터 살고 봐야 하니까 너라도 팔아먹는 것뿐이거든.
“그런 거라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레인저 학생에게 책임을 물으려는 건 아니니까요.”
“그럼 굳이 아카데미까지 오셔서 이렇게 조사할 필요도 없지 않나요···?”
“듣고 보니 맞는 말이네. 그냥 대충 끝내고 얼른 보내주시죠.”
이런 와중에도 이 녀석은 얼른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하는 건가.
어찌나 당당한지 결국 줄곧 무표정을 유지하던 집행자마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두 분은 사건의 당사자이니 알려드려도 문제는 없겠죠. 다만 절대 여기서 들은 얘기를 다른 사람에게 유출해선 안 됩니다.”
뭐지? 저렇게 얘기하는 걸 보면 뭔지는 몰라도 상당히 심각한 주제인가 본데?
“그레인저 학생이 사건 당시 사용했던 마법이 금지된 마법이 아니냐는 의혹을 받고 있습니다.”
“금지된···. 네?”
순간 내가 잘못 들은 건가 귀를 의심했지만 이내 그것이 현실임을 깨닫고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금지된 마법이 어떤 개념인지는 대충 알고 있다. 원작에서도 몇 번 등장했던 내용이니까.
이름 그대로 사용이 금지된 마법을 뜻한다고 보면 된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너무 위험하다던가 윤리적으로 용납할 수 없다는 식으로.
하지만 원작에서 그레인저가 금지된 마법을 사용했다는 설정은 등장하지 않는다. 당연히 드래곤 소환 역시 필살기로 멋있게 등장할 뿐 지금처럼 문제가 된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어떤 마법인데요?”
“자세히는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더더욱 이상했다. 일반적으로 금지된 마법은 사용법을 제외한 존재 자체는 대놓고 공개한다. 금지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그걸 배우지 않을 테니까.
마법 아카데미 학생에게 숨겨야 하는 금지된 마법?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납득이 되지 않는 얘기였다.
그레인저도 마찬가지인지 눈을 찌푸리며 시니컬하게 되물었다.
“그럼 내가 극비로 숨겨진 금지 마법을 썼다는 건가? 그거 때문에 친히 여기까지 행차하신 거고?”
“자세한 진술을 들어보니 문제가 없는 걸로 보입니다.”
“그래서. 만약 내가 금지 마법을 쓴 거였으면 체포해서 사형이라도 당했겠네? 나는 무슨 마법인지 알지도 못한 채로 그냥 죽어야 했던 거고?”
나는 그레인저의 팔을 툭 치며 작게 속삭였다.
“진정해. 너무 흥분했잖아.”
“넌 빠져. 지금 이딴 취급을 받고 진정하라고?”
대뜸 사람을 흑마법사 취급했으니 화가 나는 것도 이해는 간다만 집행자한테 저렇게 날을 세워봤자 결국 본인 손해일 뿐이다.
“집행자는 세상의 안전을 위해 움직입니다. 저희로서는 확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렇게 사람을 병신 취급해도 상관없다 이거지? 거창한 대의를 위해서 아카데미 학생 한둘쯤은 엿 같아도 그냥 받아들여라?”
제발. 이런 급전개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겁대가리를 상실한 그레인저를 말리려 했으나 그보다 한발 앞서 맞은편에 앉아있던 집행자로부터 압도적인 존재감이 뿜어져 나왔다.
단지 눈썹을 살짝 찡그렸을 뿐인데도 그 정도였다.
집행자는 하나 같이 괴물밖에 없나 보다.
“이해하기 쉽게 말씀드리죠. 만약 당신이 금지 마법을 썼더라면 지금 이 자리에 즉결 처형됐을 겁니다. 그만큼 위험한 사안이기에 확실히 확인할 필요가 있던 것뿐입니다.”
“······.”
제아무리 괴물 천재라 불리는 그레인저라 할지라도 결국 아카데미 1학년생에 불과하다.
집행자 중에는 녀석보다 더한 재능을 가진 괴물들이 득실거릴지도 모른다.
“그럼 직접 확인시켜 줄까?”
“···야! 그만해!”
“한번 맞짱 뜨자. 내 마법 보여줄 테니까.”
세상에. 이놈이 드디어 미쳤구나.
잠시 녀석을 가만히 쳐다보던 집행자가 덤덤히 대답했다.
“좋습니다. 제안을 받아들이죠.”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늘 너무 추운 거에용!!
밖에 나갔다가 꽁꽁 얼어죽을 뻔했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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