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51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그냥 상담실에서 적당히 진술하고 돌아가면 될 줄 알았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텅 빈 대련장에 세 사람만 덩그러니 서 있었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노려보는 그레인저와 차가운 무표정의 집행자.
둘이 서로 마주 본 상태에서 나는 어쩌지도 못하고 중간에서 눈치만 살폈다.
이미 여기까지 와서 내가 말린다고 해봤자 듣지도 않겠지.
물론 어디까지나 대련의 범주 내에서 끝나긴 할 것이다.
제아무리 집행자라 해도 뛰어난 재능을 지닌 아카데미 학생을 섣불리 건들지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 놓고 편히 구경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야. 지금이라도 그냥 없던 일로 하자고 해.”
“됐으니까 넌 심판이나 보고 있어.”
말이 통하질 않네. 집행자한테 말해봤자 무용지물일 게 뻔하니 결국 한숨을 내쉬며 멀찍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되니까 차라리 궁금하긴 했다.
집행자와 아카데미 천재의 맞대결이라.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당연히 전자의 압승이 정배였다.
아카데미 천재의 최종 테크트리가 집행자니까. 그동안 쌓아온 경험의 차이까지 고려하면 둘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실례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레인저는 일반적인 수준을 벗어난 녀석이긴 했다.
원작 주인공의 라이벌이라는 위치가 보통 재능으로 거머쥘 만한 자리는 아니니까.
게다가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주인공뿐만 아니라 그레인저까지 원작보다 성장 속도가 더 빨라졌다.
레이어드의 발도와 그레인저의 드래곤 소환.
비록 둘 다 아직 미완성 상태이긴 해도 원래라면 한참 뒤에 등장해야 할 필살기를 벌써 사용하려 했으니.
“적당히 핸디캡을 드리죠.”
“그딴 거 필요 없으니까 괜히 방심하다 쳐발리지나 말라고.”
“저한테 한 번이라도 유효타를 가하신다면 패배를 인정하겠습니다.”
“하. 저년이 끝까지 사람 열받게 만드네.”
아무래도 단단히 열 받은 듯이 표정이 마구 일그러지는 그레인저.
그와 별개로 이건 녀석한테 다시는 오지 않을 절호의 기회였다.
솔직히 아까 전까지만 해도 당연히 집행자가 이길 거라 예상했었는데 그녀가 선뜻 핸디캡을 걸어주며 상황이 달라져 버렸다.
이제는 승패가 어떻게 판가름 날지 정말로 예측이 안 갔다. 확실한 건 집행자가 아직 그레인저의 본 실력을 직접 보지 못해 방심하고 있으리란 것.
만약 그 빈틈을 파고들어 허를 찌른다면 그레인저의 승리도 불가능은 아니다. 오히려 상당히 그럴듯하게 들렸다.
얼떨결에 심판을 맡게 된 내가 시작 신호를 주었다.
“후···. 그럼 시작.”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법을 영창해 허공에 소환진을 생성하는 그레인저.
마법진에서 모습을 드러낸 성난 황소가 투레질하며 상대에게 맹렬히 돌진했다.
그때까지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시큰둥하게 정면만을 응시하던 집행자는 작게 입을 열어 주문을 외웠다.
그와 동시에 절대 막을 수 없을 것만 같던 황소가 허무하게 산산이 조각나버렸다.
마치 장난감 블록이 분리되듯이 정육면체 조각으로 해체되어 잔해들만 바닥에 풀썩 나뒹굴었다.
“와···.”
뭐 저런 사기적인 마법이 다 있대?
내가 사용했던 카드 절단 마법의 완벽한 상위호환이잖아.
아무 사전 동작 없이 그냥 주문만으로 저런 성능이라니.
공격이 실패했음에도 그레인저는 곧바로 다음 마법을 전개해나갔다.
녀석의 주변에 생겨나는 세 개의 마법진. 그러고 보니까 쟤도 만만치 않은 괴물이었지. 아무렇지 않게 삼중 캐스팅을 해대는 걸 보니 새삼 재능의 차이를 실감했다.
육해공을 아우르는 소환수의 등장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서 아까와 똑같이 주문을 외우는 집행자.
상어와 곰은 아까 황소와 똑같은 최후를 맞이했으나 상대적으로 크기가 작으며 날쌘 독수리는 완전히 분해되지 않은 채로 적을 향해 계속 돌진했다.
그것도 잠시 근처까지 접근하는 데엔 성공했으나 결국 그녀에게 닿기 직전 똑같이 큐브 조각이 되어 바닥으로 추락해버리고 마는 독수리.
하지만 거기서 힌트를 얻은 건지 그레인저는 오히려 희미한 미소를 띠며 다음 마법을 준비했다.
왠지 데자뷰가 느껴지는 건 착각인가.
분명 나도 처음에 카드 절단 마술로 대응했다가 말벌 떼에 고전했던 거 같은데.
확실히 집행자의 마법이 비슷한 메커니즘이라면 개체의 크기가 작고 양은 득실거리는 소환수에는 쥐약일 수도 있겠지.
이거 진짜 이러다 그레인저가 이기는 거 아니야?
왠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전투를 지켜보았으나 상황은 내가 예상한 대로 흘러가지는 않았다.
“죄송하지만 이런 소꿉장난은 제 취향이 아니라서요.”
싹둑.
한창 마법진이 만들어지던 찰나 아무 전조도 없이 대뜸 잘려 나가는 그레인저의 팔.
나는 그 장면을 멍하니 바라보다 뒤늦게 사태를 파악했다.
“어? 자 잠깐···!”
“걱정하지 마세요. 물리적으로 잘라낸 건 아니니까요.”
얘기를 듣고 다시 쳐다보니 확실히 이상했다.
팔이 잘렸다면 상식적으로 피가 철철 나면서 속의 뼈와 살이 다 드러나야 할 텐데 일반적인 상식과 달리 잘린 단면에는 뽀송뽀송한 살색만 보이고 있었으니까.
“······.”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상황을 정리했다.
그래. 소환수를 마구 동강 내는 사기적인 마법을 가지고 상대를 가만히 놔둘 이유는 없지.
오히려 지금까지 얌전히 지켜봐 줬던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이렇게 되고 나니까 승부의 기세가 일방적으로 쏠린 느낌이었다. 그레인저는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한 반면 집행자는 별다른 딜레이 없이 거의 즉발에 가깝게 마법을 시전하고 있었으니까.
자신의 잘려 나간 팔을 가만히 쳐다보던 그레인저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와 반대로 눈은 싸늘하게 식어버렸지만.
“하. 재밌네.”
“이 대련의 목적이 뭔지 벌써 잊으신 건 아니겠죠? 보여주실 생각이 없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끝내드리죠.”
“그래. 그렇게 원하면 보여줄게.”
진짜 지금 여기서 다시 사용하려는 건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며 곧 대련장을 가득 채우는 압도적인 기운에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면서도 녀석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흐릿하던 마력의 흐름이 형태를 잡아가더니 그때와 똑같은 용의 형상을 띠기 시작하였다.
“과연.”
그제야 시큰둥한 태도를 집어치우고 흥미 가득한 눈빛으로 그 장면을 지켜보는 집행자.
저번과 마찬가지였다.
제아무리 레플리카에 불과해도 드래곤은 마법의 주인. 모습을 드러낸 것만으로 주변 일대의 마력 흐름을 지배하며 주인의 허락 없이는 함부로 마법조차 사용할 수 없도록 지배력을 행사한다.
집행자는 낯선 감각에 놀란 건지 손을 쥐었다 펴며 작게 감탄하기 바빴다.
“대단하네요.”
아니 저렇게 여유를 부려도 되는 거야?
당장 저 드래곤한테 죽을 뻔했던 입장으로써 PTSD까지 오려 하는데. 농담이 아니라 브레스 정통으로 맞으면 진짜 흔적조차 안 남기고 잿더미가 될지 모른다.
“으윽···! 큿!”
역시 아직은 완벽히 제어할 수 없는 모양이다.
저번과 달리 곧바로 이성을 잃고 폭주하진 않았지만 딱 봐도 매우 힘들어하는 티가 역력했으니.
“저기요! 저거 좀 어떻게 해주시죠!?”
“아직 더 확인해야 합니다.”
“당신 그러다 진짜 죽어요!”
그녀의 마법이 사기적인 건 인정한다. 하지만 그것도 쓰지를 못하면 아무 의미 없는 거잖아.
드래곤의 마력 통제 앞에서는 전부 무용지물이란 뜻이다.
지난번 시험 때도 그레인저의 마법이 불완전했던 덕분에 가까스로 운 좋게 살아남은 거나 다름없었다. 그런 행운이 두 번이나 똑같이 작용해줄 거라 믿는 건 너무 낙관적인 생각이었다.
“네. 딱 브레스만 보겠습니다.”
“지금 그런 태평한 말이 나와요?”
이 여자도 지금 보니까 상당히 미친 사람이다.
“드래곤의 약점은 가슴팍의 비늘이라고 했던가요.”
“그렇긴 한데···. 마법을 못 쓰면 노릴 수도 없다고요!”
저 무시무시한 용가리한테 맨몸으로 접근할 수도 없고 마법은 아예 봉인돼버렸으니 약점을 알아도 공략할 방법이 없었다.
“괜찮으니까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진짜로요? 믿어도 되는 거죠?”
“네.”
확답을 듣고 나서야 어느 정도 안심할 수 있었다.
그래. 명색이 집행자인데 문제없겠지. 그녀 정도의 실력자라면 드래곤의 마력 통제에서도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나 보다. 당연히 진짜 드래곤이었다면 말도 안 되겠지만 지금은 어디까지나 레플리카 소환수에 불과하니까.
“그런데 신기하군요. 설마 제 마력까지 봉인시킬 줄은 몰랐는데 말이죠.”
“···어 네? 뭐라고요?”
잠깐만. 방금 분명 그냥 지나쳐선 안 되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내 착각이겠지? 잘못 들은 거겠지?
애써 부정해봐도 똑똑히 듣고 말았다.
지금 그녀도 나와 마찬가지로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일반인 상태라는 불편한 진실을.
그러면 위험한 거잖아. 이렇게 넋 놓고 있어도 되는 거야?
앞에 있는 드래곤은 이미 숨결을 잔뜩 모아서 당장이라도 브레스를 뿜으려 하는데?
여기서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 건가···.
억울하다. 나를 죽음으로 내몬 철천지원수의 이름조차 알지 못한 채 이렇게 허무히 죽어야 한다니.
“저게 바로 브레스군요. 과연 엄청난 마력이네요.”
“하하···. 이제 저희는 그 엄청난 마력에 최후를 맞이하는 거고요.”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마지막까지 태연한 집행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제 확인도 끝났으니 대련은 여기까지 하죠.”
“잠깐. 그건···.”
그게 왜 거기서 나와?
내가 뭐라 하기도 전에 품에서 꺼낸 물건을 망설임 없이 사용해버리는 그녀.
탕!!
대련장에 총성이 울려 퍼졌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총 앞에선 모두 평등한 거에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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