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52
상황은 순식간에 정리됐다.
언제 그랬냐는 듯 드래곤의 형상은 말끔히 사라지고 그레인저 역시 힘없이 풀썩 쓰러졌다.
순간 멍하니 사태를 파악하느라 한 박자 늦게 반응하고 말았다.
삐걱거리며 고개를 돌리니 집행자가 쥐고 있는 총구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다.
“지금 총···. 쏘신 거예요?”
“네. 알려주신 약점을 공략했죠.”
태연하게 대답하는 모습을 보니 내가 잘못된 건가 싶었다.
하긴 드래곤은 총으로 잡는 게 일반적인 상식이잖아? 마법 같은 쓸데없는 쪽에 너무 몰두하느라 이런 기본적인 것도 깜빡하다니. 하하.
···그럴 리가 있겠냐고.
아무리 생각해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다.
그래. 지금이 중세 시대도 아니고 19세기 런던이니 권총이 등장한다 해서 잘못된 건 아니지.
하지만 마법 세계에서도 정점에 다다른 집행자가 권총을 챙기고 다니는 건 어딘가 이상했다.
더군다나 권총 한 방에 드래곤이 허무하게 죽어버리는 것도 말이 안 된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엔 그랬다.
“원래 총을 가지고 다니세요···?”
“아니요. 오늘 만약을 대비해서 챙겨온 겁니다. 드래곤은 마력을 통제하니까요.”
그걸 미리 염두에 뒀었다고?
그렇다는 건 그레인저가 먼저 대련을 신청하지 않았어도 어차피 싸울 예정이었다는 건가?
“설마 제 마력까지 지배할 줄은 몰랐는데 마도공학 권총을 챙겨오길 잘했군요.”
그제야 권총에 새겨진 마도공학 문양을 확인했다.
어쩐지 평범한 총인 것 같지 않더니 그런 거였구나. 마도공학 기술이라면 그런 파괴력도 대충 납득이 갔다.
한바탕 폭풍이 휩쓸고 간 것처럼 어지러운 대련장. 내 마음도 마찬가지였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집행자에게 간절한 마음을 담아 물었다.
“그럼 이제 끝난 건가요?”
“네. 직접 확인해본 결과 문제는 없는 것 같군요.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그냥 감사하다고 말 한마디 하면 땡이냐? 마음 같아서는 뭐라 항의하고 싶지만 싸우면 내가 질 게 뻔하니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취급 받고도 넘어가야 한다니 이거 서러워서 살겠나.
그렇게 생각하니 그레인저의 미친 깡다구가 좀 부럽기도 했다. 그 대가로 지금 바닥에 뻗어있긴 하지만.
그래. 역시 이대로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뭔진 몰라도 우리의 혐의가 벗겨진 이상 이 여자도 우리를 함부로 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미 저지른 잘못도 있으니 여기서 내가 강하게 항의하더라도 큰 문제가 생기진 않으리라.
막말로 그렇게 되면 어떻게든 도망쳐서 복수해야지.
이미 집행자에 스카우트 제안까지 받아본 몸으로서 그냥 곱게 가진 않을 테니까.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제가 남아있어봤자 두 분께 불편하기만 할 테니까요. 염치없지만 그레인저 학생은 부탁드리겠습니다.”
“잠깐만요.”
망설임 없이 대련장을 떠나려던 그녀를 붙잡았다.
“진짜 이대로 끝이에요? 이렇게까지 해놓고 끝까지 아무 말도 안 해주는 거예요?”
“알아봤자 위험해질 뿐입니다. 전부 두 분을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취급을 받았는데 저희를 위해서니까 그냥 넘어가라고요? 저는 몰라도 쟤가 이대로 그냥 넘어갈 성격으로 보이세요?”
“······.”
내 말에 차마 부정하지 못하고 쓰러진 그레인저를 힐끗 바라보는 집행자.
얼마 되지도 않은 시간 동안 보여준 성깔만으로도 이번 사건을 절대 가만히 넘어갈 녀석이 아니란 걸 알아차린 거겠지.
“정말로 죄송하지만 이건 제 권한 밖의 일입니다.”
“끝까지···.”
“그러니 이렇게 하시죠. 제가 부장님께 두 분의 요구를 전해드리겠습니다.”
부장이라면 내 기억 속에 있는 수염 난 아저씨 에반 레지널드를 말하는 것 같다.
최고의 해결책까지는 아니더라도 이 정도면 나름 받아들일 만했다.
그녀로서도 이게 최선이겠지. 무작정 우리에게 다 얘기해줬다가 문제라도 생기면 자신이 전부 책임져야 하는 거니까.
“알겠어요. 그럼 언제 다시 만나서 얘기하면 되나요?”
“오늘 바로 끝낼 생각입니다만.”
“···네?”
“따라오시죠. 부장님을 만나서 직접 얘기를 듣는 편이 가장 확실할 테니까요.”
아니 잠깐만.
내가 생각했던 그림은 이런 게 아니었다고. 그냥 며칠 뒤에 그녀가 다시 찾아와서 얘기해주면 그걸로 만족한단 말이야.
손을 휘저으며 제안을 거절하려던 찰나.
갑자기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그레인저가 벌떡 일어나더니 잔뜩 심술 난 표정으로 외쳤다.
“오냐! 어디 한번 얼마나 대단한 이유인지 들어나 보자!”
“자 잠깐만. 그럼 나는···.”
너 혼자 가서 많이 듣고 난 그냥 나중에 너한테 전해 들을게.
그렇게 말하고 싶었으나 의견을 표출할 새도 없이 녀석한테 붙잡혀 질질 끌려가고 말았다.
***
결국 도착해버렸다.
런던 한구석에 당당히 위치한 중앙 집행 본부.
여러모로 굉장히 특이한 존재라고 할 수 있는 공공 기관 중 하나였다.
일단 대외적인 소속은 경찰청 산하로 분류되긴 하지만 독립된 별개 기관으로 봐도 무방할 만큼 자율성이 매우 강하다.
주요 업무는 ‘신비’와 관련된 존재와 사건을 통제하며 안전 및 질서를 지키는 것.
여기서 말하는 신비는 단순히 마법만 한정된 개념이 아니다.
마녀 요정 몬스터와 같이 신화나 전설 혹은 괴담에서 등장하는 과학과 동떨어진 오컬트적인 모든 것을 아우르는 표현이었다.
당연히 평범한 일반인이 처리하기엔 불가능한 업무이기에 집행부 소속은 아카데미 출신의 마법사들만으로 구성되어있다.
그들 하나하나가 마탑에서 모셔가려면 큰절이라도 해야 할 만큼 매우 뛰어난 천재들이다.
쉽게 말해 집행자가 마법사의 최종 테크트리나 다름없는 셈이다.
“생각보다 작네요.”
그래서 당연히 본부 건물도 엄청나게 웅장할 줄 알았더니 예상과 달리 꽤 아담한 규모였다.
그레이스 본가 저택보다 작을지도? 물론 그건 반대로 저택 주제에 지나치게 커서 그런 거지만.
“인원이 그리 많지 않으니까요. 소수 정예 느낌에 가깝죠.”
우리에게 간단히 설명해주며 앞장서 안내해주는 집행자.
“여기가 본부면 지부도 있나요?”
“네. 아직은 북부 에든버러에 한 곳이 전부지만요.”
그렇구나. 스코틀랜드 쪽은 갈 일이 거의 없다 보니 먼 지역처럼 느껴졌다.
거리로 따지면 서울-부산을 왕복하는 정도려나? 그렇게 생각하니까 의외로 가까운 것 같기도.
“들어오세요.”
“오···.”
건물 안으로 들어서며 작게 감탄했다.
크기가 작은 것과 별개로 내부 시설은 상당했다. 솔직히 말해서 내 기억 속 21세기의 웬만한 건물과 비교해도 훨씬 낫다고 느껴질 정도. 영화 세트장 같은 느낌도 들었다.
특히 집행자를 상징하는 검과 방패의 문양 디자인은 멋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집행자들을 고깝게 바라보던 그레인저도 지금만큼은 순순히 감탄할 정도였다.
“돈 존나 퍼부었나 보네.”
복도에서 다른 집행자를 마주치지 않을까 했지만 정말 사람이 거의 없는지 건물에 들어서면서 지금까지 아무와도 마주치지 않았다.
“대부분 파견 업무를 나가니까요. 대기 중인 최소 인원을 제외하면 모두 나가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겁니다. 그래서 항상 집행자보다도 잡무를 보시는 고용인이 더 많죠.”
그 말대로 간간이 마주친 사람들은 새하얀 제복이 아닌 검은 계열의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복도를 지나며 최대한 꼼꼼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걸 직업병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나도 모르게 여기엔 어떤 보석이 있을지 떠올리면서 훔칠 때의 트릭을 고민하게 된달까.
물론 집행자들의 본거지이니만큼 어떤 의미로는 궁전을 터는 것보다 더 힘들지도 모른다.
“뭘 자꾸 힐끔거리냐?”
“아니. 궁금하잖아. 다른 곳도 아니고 중앙 집행 본부잖아.”
“그래서 뭐 어쩌라고.”
눈가를 가늘게 뜨며 녀석을 바라보았다.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아카데미 학생이면서 집행자한테 아무 관심이 없으면 어떡하냐.
이렇게 일을 벌여놓고 나중에 어떻게 감당할 생각인지 궁금해질 지경이다.
아무리 성적이 좋고 마법 재능이 뛰어나면 뭐 하나. 결국 일자리가 없으면 굶어 죽는 건데.
인식과는 달리 마법사는 그리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특별하긴 한데 모두에게 선망을 받진 않는다. 오히려 껄끄러워하고 피하는 경우가 많으면 모를까.
마법이라는 전공을 살려 취업하는 길은 굉장히 한정적이다.
엘리트 코스라고 한다면 집행자 마탑 궁중 마법사 아카데미 교수 정도인데 뽑는 인원이 매우 적으니 절대다수의 일반 학생은 꿈도 못 꿀 직장이고.
위에 나온 엘리트 직업을 제외하면 귀족과 부호에게 고용되어 일하는 식이 대부분이다.
그마저도 안 된다면 개인 프리랜서로 마법이 필요할 만한 일거리를 알아서 구해야 하는 꽤 고달픈 인생이 기다리고 있겠지.
이제 그레인저를 생각해보자.
이 녀석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아카데미에서도 역대 최고로 손꼽히는 재능을 가진 엘리트다.
그럼 당연히 엘리트 코스를 밟아야 하는데 그 중 마탑 궁중 마법사 아카데미 교수는 전부 학문과 이론이 매우 중요한 직업이다. 똑똑한 것과 별개로 딱 봐도 그레인저의 성향과 전혀 안 어울린다.
이 녀석의 재능을 고려하면 졸업 후에 갈 만한 진로가 사실상 집행자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만약 성질을 못 죽여서 집행부장한테 찍힌다고 생각해봐라.
그럼 취업 실패하고 곧장 백수로 나앉는 거다. 아니면 평생 성질 억누르며 억지로 마탑에 틀어박혀서 연구나 하던가.
진짜 어쩌려고 저러냐. 원작에서는 어땠더라?
생각해 보니까 내가 읽은 마지막 부분이 졸업 직전이었으니 알 방법이 없네.
그래도 원작에선 이렇게 1학년 때부터 집행자와 충돌한 적은 없었는데.
새삼 또 이상하네. 대체 그레인저의 마법과 금지된 마법이 무슨 관계가 있길래 뜬금없이 이런 이벤트가 발생한 걸까? 그걸 확인하기 위해 여기까지 찾아왔으니 명확한 답이 나왔으면 한다.
한참 생각에 잠겨있던 와중 앞서가던 집행자의 발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여기예요. 그럼 들어가시죠.”
똑똑.
“들어와.”
안에서 들리는 남성의 목소리.
기억 속에 남아있는 익숙한 음성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다들 설 연휴 잘 보내고 계신가용?
독짜님들 모두 세뱃돈 많이많이 받는 거에용!
그리고 파페포포님 후원 감사드립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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