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54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방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그의 입에서 나온 내용을 천천히 곱씹어보았다.
괴도 레이븐이 드라칸 소속이다. 대체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조차 막막한 헛소리.
짓궂은 농담으로 치부하기엔 에반의 표정이 너무나도 진지했다.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그 헛소리를 진지하게 믿고 있는 느낌이었다.
처음에는 당혹감으로 가득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섭섭함이 밀려들었다.
솔직히 말하면 여태까진 눈앞의 남자에게 꽤 호의적인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괴도와 집행자라는 적대 관계에 놓여있지만 그와 별개로 내 실력과 재능을 순수하게 인정해주고 스카우트까지 했으니까.
그때 스카우트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아마 에반은 나를 최대한 두둔해줬을 것이다.
내가 마법을 진지하게 공부하기 시작한 것도 그가 나를 인정해줬기 때문이었다.
물론 거짓말로 속이고 도망친 것은 나였으니 당연히 괴도에게 좋은 감정을 갖긴 힘들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내가 그런 악의 집단에 소속되었을 거라고 철석같이 믿는단 건 실망스러웠다.
아까 본인 입으로 주르륵 나열하지 않았던가?
납치 감금 살인 등은 물론 학살과 전쟁 유도 등등. 절대 용납할 수 없는 반인륜적 악행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놈들이다.
아무리 내가 괴도로서 받는 비난은 받아들인다지만 그런 쓰레기들과 똑같은 존재로 엮이는 것은 그냥 넘어갈 수 없다.
“그것도 제보자가 알려준 건가요?”
“그래.”
“근거는요? 소속원 명단이라도 확인한 거예요?”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하자 에반은 차가운 눈빛으로 경고했다.
“지나친 호기심은 독이 될 뿐이다. 그쯤에서 멈춰라.”
하지만 나는 멈추긴커녕 반박을 속사포로 쏟아부었다.
“이상하잖아요. 드라칸은 제보자가 알려주기 전까진 집행자도 전혀 모를 만큼 자신들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길 극도로 꺼리던 조직 아닌가요? 그런데 괴도는 정반대로 일부러 자신의 모습을 모두에게 알리고 주목받길 원했잖아요. 정말 괴도가 드라칸 소속이면 체포되는 즉시 조직의 정체마저 탄로 날 수도 있는데 그런 위험성을 감수하겠냐고요.”
옆에서 그레인저의 떨떠름한 시선이 느껴졌다.
늘 조용히 있던 애가 갑자기 왜 이렇게 흥분했나 의아한 거겠지.
나도 안다. 이렇게 대뜸 괴도를 변호하는 모습이 얼마나 이상하게 비칠지 정도는.
그럼에도 여기선 어떻게든 에반의 마음을 돌려놓아야만 했다.
만약 집행자가 괴도를 드라칸 소속이라 확정 짓고 세상에 공개하기라도 한다면 그걸로 괴도로서의 내 인생은 끝나고 만다.
사람들의 지지가 없다면 괴도는 존재할 수 없으니까.
그 순간부터 나는 아무 특별함도 없는 도둑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내 말 몇 마디만 듣고 곧바로 오해를 바로잡을 거라곤 기대하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의심의 싹을 틔울 수 있다면 지금 당장은 그걸로 충분하다.
“그건 확실한 이유가 되지 못해. 녀석이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반드시 괴도로 활동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을지도 모르니까.”
“물건이 필요했던 거라면 조용히 훔치면 돼요. 굳이 레이븐처럼 요란하게 시선을 끌 필요가 있었을까요? 괴도로 활동해야 하는 이유가 대체 뭔데요?”
나와 에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얼마 전 옥스퍼드 대학에서 보유하고 있던 고대 유물 하나가 사라졌다.”
“······.”
“제보자의 증언에 따르면 본래 드라칸이 그 유물을 탐냈으며 그걸 훔친 범인은 괴도 레이븐이라고 하더군.”
가슴이 싸늘하게 식는 느낌이었다.
증언이 너무나도 자세하고 정확했다.
방금 에반이 내뱉은 말 중에는 거짓이 섞여 있지 않았다. 실제로 천사의 나팔은 옥스퍼드 대학에 있었으며 드라칸은 그걸 노렸고 내가 나팔을 훔쳤으니까.
어떻게 그걸 전부 알아차린 거지? 천사의 나팔을 훔칠 때는 아무도 모르게 최대한 은밀히 진행했다. 심지어 드라칸 녀석들도 내가 훔쳤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으리라. 알았다면 여태껏 조용히 넘어왔을 리가 없으니.
그런데 아무도 몰라야 할 비밀을 눈치챈 사람이 있단다. 반대로 나는 상대에 대해 짐작 가는 것이 전혀 없었다.
이렇게 압도적인 무력감은 처음 느껴보는 기분이다. 하물며 나보다 훨씬 강한 지크프리트나 에반과 싸울 때조차 지금처럼 무기력하진 않았다. 싸워서 이길 수는 없더라도 도망칠 자신은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누군지도 모를 ‘제보자’란 놈한테서 도망칠 수도 없었다.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는데 어떻게 도망간단 말인가.
그럼에도 나는 억지로 입을 열었다. 여기서 이대로 침묵해버리면 괴도가 드라칸이란 사실을 인정하는 꼴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오히려 반대일 수도 있지 않나요?”
“흠. 그게 무슨 뜻이지?”
“제보자는 괴도가 유물을 훔쳤다고만 했지 드라칸에게 넘겨줬다고 하진 않은 거잖아요. 그렇죠?”
사실 제보자가 어떻게 말했는지 나는 전혀 모른다. 어쩌면 그냥 내가 드라칸과 한패라고 뻔뻔하게 거짓말을 늘어놓았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방금 들은 소름 끼칠 만큼 정확한 정보력을 듣고서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제보자는 한 치의 거짓말도 섞지 않았다는 것을. 아마도 객관적인 사실만을 제공해줬을 확률이 높다.
옥스퍼드에 드라칸이 원하던 유물이 있었다.
그 유물을 괴도 레이븐이 훔쳤다.
이 정보를 입수한 집행자 측에선 당연히 둘이 협력 관계라고 결론 내릴 수밖에 없을 테니까.
사실 논리적인 근거보단 직감에 기댄 도박 수였으나 지금으로선 이런 수가 아니면 기울어진 판을 뒤집을 방법이 없었다.
“그러니까 레이븐은 드라칸 소속이 아니라 오히려···.”
“적대적인 관계일 수도 있다는 건가?”
“가능성은 있지 않나요?”
다행히 에반은 내 말을 아예 무시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팔짱을 낀 채 잠깐이나마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모습을 보여줬으니까.
“물론 그럴 가능성이 아예 없진 않겠지. 하지만 일반적으로 미뤄봤을 때 범죄자들끼리 힘을 합치는 게 그럴듯하지 않나?”
“만약 괴도가 드라칸 소속이라면 왜 절도 이상의 범죄는 저지르지 않은 걸까요? 드라칸은 목적을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녀석들이라면서요.”
너무 대놓고 괴도의 편을 들어줬던 탓일까 옆에 서서 얘기에 끼어들지 않던 캐서린의 눈가가 살짝 찌푸려지는 모습이 보였다.
여기서 슬슬 멈춰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신문으로 봤어요. 레이븐이 공주를 일부러 놓아줬다고.”
“···그래. 그때 난 현장에서 직접 녀석을 봤었지.”
내가 원하던 흐름대로 주제가 자연스레 넘어가자 주먹을 꽉 쥐었다.
“직접 보셨다면 저희 중에 집행자님께서 제일 잘 아시겠네요. 괴도가 어떤 사람일지.”
“이상한 녀석이었다. 제정신인가 싶을 만큼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있는 것 같았으니까.”
음···. 내가 그런 이미지였나?
물론 괴도로서 낭만을 중요시하긴 하지만. 그래도 나름 상식적인 지성인이라 자부하고 있었는데.
당장 옆에 있는 그레인저랑 비교하면 극명하게 드러나잖아.
“놈은 마법에 재능이 있었다. 그리고···. 생각만큼 악랄해 보이진 않았지. 그래서 갱생하고 집행자가 되어볼 생각은 없냐고 제안했었다.”
그 얘기에 그레인저는 물론 캐서린마저 상당히 놀란 듯했다.
그녀에게 한 번도 얘기한 적 없었나 보다.
“녀석은 나를 속이고 목표물을 훔쳐 달아났지만 의외로 생각보다 화는 나지 않더군. 사실 놈이 집행자에 아무 관심이 없다는 걸 어렴풋이 알았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어째선지 몰라도 놈은 괴도 일에 진심인 듯 보였으니까.”
이렇게까지 자세한 얘기를 듣게 될 줄은 몰랐는데.
슬그머니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적어도 에반은 내가 완전히 악인이라고 단정 짓지 않은 느낌이었으니까. 오히려 내 얘기를 듣고 난 뒤부터 상당히 혼란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의심 선상에서 바로 사라지진 않겠지만 그래도 괜찮다.
내가 드라칸 소속이라고 확신하는 것과 그럴지도 모른다고 경계하는 건 천지 차이니까.
책상을 툭툭 두드리던 에반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무슨 뜻인지는 알겠다. 확실히 네 말도 일리가 있어.”
하지만 내게로 향하는 시선은 처음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무뚝뚝하면서 차갑게 식은 눈빛.
“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다. 괴도 레이븐은 여전히 드라칸 소속으로 간주하며 조사를 이어간다.”
“···어째서요? 방금 당신이 직접 말했잖아요. 생각보다 악랄해 보이지 않았다고!”
“집행자는 개인의 시선이 아닌 정해진 사실만을 놓고 움직여야 하니까.”
지극히도 타당한 논리였기에 뭐라 할 수조차 없었다.
“이렇게까지 감싸는 걸 보면 넌 아마도 괴도 추종자겠지. 최근에는 좀 주춤하다 싶어도 여전히 여기저기 널려있더군.”
“그게 잘못인가요?”
“글쎄. 우리도 상부의 결정이 내려질 때까진 보류하기로 했다. 섣불리 건드렸다간 더 반발만 살 테니 말이다.”
괴도 추종자들은 최근 사회의 골칫거리로 손꼽히고 있다.
그렇지만 처음 생긴 사례인데다 워낙 수가 많다 보니 정부로서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것이 현재 상황.
지금은 그 덕분에 이렇게 노골적으로 변호해도 의심의 눈길을 받지 않게 됐으니 다행이라 여겨야 하려나.
“네 생각은 잘 알겠지만 다른 사람도 그렇게 생각할까?”
“선입견에 휩싸이지 않고 증거들만 놓고 보면···!”
“그럼 내가 하나만 더 알려주마.”
내 말을 끊은 에반이 덤덤하게 말했다.
“괴도 추종자라면 네가 제일 잘 알겠지. 최근 괴도는 활동하지 않고 잠적 중이다. 맞나?”
“···네.”
“그리고 괴도의 잠적 시기는 제보자가 알려준 드라칸의 잠적 시기와 엇비슷하지.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하나?”
“그건···.”
머리가 멍해졌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이건 주인공이 잘못했네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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