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58
“지금 이 안에 괴도가 있는 것 같아요.”
갑작스러운 폭탄선언에 모두의 시선이 소녀에게로 향했다.
이 가운데 괴도 레이븐이 있다?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당장이라도 찾아내 잡아야 하겠지만 문제는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소녀의 주장을 무작정 믿기엔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총재는 흥미가 깃든 눈빛으로 셜록에게 질문했다.
“불이 꺼진 뒤에 아무 변화가 없었으니까요.”
다소 이해하기 힘든 답변에 가젯이 눈살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그건 저희가 대처를 완벽하게 했기 때문이에요. 왜 그게 녀석이 여기에 있다는 근거가 되는 거죠?”
“괴도는 자신이 목표로 한 지역을 완벽히 파악한 뒤에 움직이는 스타일이에요. 당연히 금고 내부에 조명이 꺼졌을 때를 대비한 대응책이 마련됐다는 것도 눈치채고 있었겠죠. 그런데도 굳이 불을 꺼버렸다는 건···.”
“시선을 돌리기 위한 연막작전이라는 건가?”
총재의 깔끔한 정리에 셜록은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했다.
“어느 정도 일리는 있지만 너무 끼워 맞춘 느낌이 강한데. 자네 말대로 연막작전이 사실이라 해도 결국 금고 안에 괴도가 있다는 증거는 없는 거 아닌가?”
꽤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셜록과 꽤 자주 합을 맞춰왔던 가젯으로선 그녀의 직감 자체가 상당히 예리하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고작 그런 대답으로는 총재의 의문이 완벽하게 해소될 수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고 설명을 이어갔다.
“지금 금고 안에 있는 총인원 수는 14명.”
“···불이 꺼진 사이에 숫자가 바뀌었나?”
“아니요. 숫자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대로였어요.”
얘기가 이어질수록 의문이 풀리긴커녕 더 쌓여만 가는 기분이었다.
대체 셜록은 뭘 말하고 싶은 건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가젯이 지금이라도 탐정 친구를 말려야 하나 고민하던 와중 셜록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여기에서 저희 둘을 제외한 12명은 전부 은행 내부 인원이겠죠.”
“흠. 그렇지.”
“그래서인지 처음 봤을 때부터 한 가지 공통점이 느껴지더라고요.”
어느덧 모두가 숨을 죽인 채 소녀의 얘기에만 주의를 집중하기 바빴다.
“다들 돈 냄새가 깊게 베여있어요. 이 금고 안을 비롯해 은행 전체에 널린 게 지폐다 보니 여기서 일하는 직원들의 체향에도 자연스레 섞이게 된 거겠죠.”
“오···.”
가젯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었다.
자신은 얘기를 듣는 지금 순간에도 딱히 돈 냄새가 뭔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언뜻 얘기를 들어보니 꽤 그럴듯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 한 명. 이 중에서 같은 냄새가 전혀 베여있지 않은 사람이 있어요.”
셜록은 그대로 손을 들어 범인을 지목했다.
“안 그런가요. 총재님?”
“······.”
“어느 누가 감히 총재를 의심할 수 있겠어요. 특히 자신들을 선뜻 도와주고 호의적인 태도를 나타내는 사람을요.”
그녀가 가리킨 손가락 끝을 멍하니 응시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가젯.
아까 전 금고 문 앞에서 있던 가드와의 충돌과 직접 금고까지 찾아온 태도에 호의를 품었던 자신을 떠올리게 되었다.
가젯은 이를 아득 갈며 자신의 안일함을 자책했다.
총재가 아니라 국왕이 행차하더라도 철저하게 변장을 확인했어야 했다.
지위가 높을수록 오히려 더더욱 의심했어야 하는 건데 멍청하게 덥석 믿어버린 것이다.
철컥!
가젯은 즉시 상대에게 총구를 겨누며 경고했다.
“변장을 확인하겠습니다. 괴도가 아니라면 얌전히 수사에 협조해주십시오.”
“지금 내게 총을 들이미는 건가? 감당할 수 있겠나?”
“책임은 제가 집니다.”
갑작스레 급변한 상황에 어쩔 줄도 모른 채 머뭇거리는 주변인들.
가젯은 조준한 상태로 천천히 손을 뻗어 총재의 얼굴에 가까이했다.
그 순간.
“하하. 재밌네.”
분명 똑같은 입에서 흘러나왔음에도 아까와는 전혀 다른 음성.
그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깨달은 가젯은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괴도 레이븐!”
“오랜만이야. 예쁜 형사 누님.”
능글맞은 인사를 듣자마자 그녀는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탕!
금고 안을 가득 메우는 총성과 함께 발포된 공포탄.
하지만 탄환은 적에게 명중하지 못하고 무심히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워워. 진정하라고.”
순식간에 자리에서 사라진 괴도.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아도 혼란에 휩싸인 경비병들만 보일 뿐 괴도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위잉! 위잉!
어느샌가 울리기 시작한 마력 탐지기.
레이븐이 마법을 사용했다는 뜻이었다.
“감쪽같이 속을 줄 알았는데 설마 냄새로 찾아낼 줄은 몰랐네. 역시 대단한데?”
“내가 원래 감각이 예민한 편이라.”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카드를 쉽게 꺼내도 되는 건가? 다음부터는 변장할 때 냄새까지 신경 쓸 텐데 말이야.”
레이븐의 능청스러운 질문에 셜록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괜찮아. 어차피 넌 오늘 잡힐 테니까.”
“그거참 무섭네.”
변장을 들킨 탓일까 아니면 처음부터 이럴 목적이었던 걸까?
녀석은 딱히 몸을 숨기거나 특별한 트릭을 사용하지도 않고 그냥 정면 돌파해서 보석을 탈취했다.
문제가 있다면 그걸 눈앞에서 지켜보면서도 제지할 수단이 없다는 것이다.
‘이 녀석이 원래 이런 느낌이었나···?’
한 달 만에 재회한 괴도는 예전과는 조금 달랐다.
그때는 눈앞에서 잡을 뻔하다 아깝게 놓쳐서 얄미운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저걸 어떻게 막아야 하나 막막한 기분이 앞섰으니까.
어느샌가 정신을 차려보니 허공에 두둥실 떠 있는 레이븐의 손에 에메랄드가 쥐어져 있었다.
“이건 내가 챙겨갈게. 참고로 총재 아저씨는 옥상에서 자고 있을 테니 알아서 챙겨줘. 그럼 이만!”
레이븐은 상큼하게 작별을 고하며 금고 밖으로 나가려 했지만.
쾅!!
“죄송합니다만 보내드릴 수는 없습니다.”
소란을 눈치챈 집행자가 괴도의 앞을 막아섰다.
***
‘하하···.’
속으로 마른 웃음을 삼키며 난처함을 느꼈다.
설마 이 여자를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이건 상당히 위험할지도.
그녀가 얼마나 강한지는 지난번 그레인저와의 대련을 지켜보며 대충 확인했다.
심지어 그게 전부가 아니라 에반의 말에 따르면 드래곤을 길동무로 데려갈 만한 한방도 존재할 확률이 높다.
여러모로 상당히 위험한 상대이지만 그렇다고 나도 그냥 당해줄 생각은 없었다.
집행자가 등장하는 것 정도야 처음부터 예상하던 바였다.
저번에는 아예 집행자 중 최강이라 부를만한 에반 레지널드가 직접 행차하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이렇게 중앙은행에 예고장을 보내고 당당히 훔치러 온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 있기 때문이다. 설령 집행자가 상대라 하더라도 보석을 훔쳐낼 자신이 있었다.
바닷속에서 온갖 고생을 하며 인어공주까지 만난 뒤에야 획득한 천년 진주.
그렇게 개고생한 보람이 있다는 듯 흡수한 힘은 생각보다 훨씬 대단했다.
지금은 망설임 없이 단언할 수 있다. 내가 아카데미 1학년생 중에선 최강이라고.
설령 그레인저라 할지라도 내가 이긴다. 드래곤 소환이 아무리 사기적이라 해봤자 소환하기 전에 때려눕히면 그만 아닌가.
물론 집행자와 정정당당히 승부를 본다면 당연히 지겠지.
하지만 이건 룰을 지켜야 하는 결투가 아니다. 안 싸워주고 도망가면 그만이란 뜻이다.
눈앞의 상대에게 집중했다.
캐서린은 금고의 문을 가로막은 채 나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가 입을 열어 무언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이 주문이란 걸 깨닫고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
슉!
“읍···?”
빨간 손수건이 재빠르게 날아가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살짝 눈이 커진 캐서린은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내뻗었다.
쉭-!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직전까지 내가 있던 공간이 싹둑 베여버렸다. 언제 봐도 참 살 떨리는 마법이다. 아무리 물리적인 절단이 아니라 해도 내가 저런 모습이 되어버렸다고 상상하면···.
지난번 그레인저와의 대련을 눈여겨보며 그녀의 약점을 대략 파악해뒀다.
저 사기적인 마법의 유일한 단점은 타겟팅이 아니라는 것. 즉 능력만 된다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다는 거다.
거기다 그녀는 마법을 쓸 때마다 내게 시선을 고정한다. 아마도 시야 내에 원하는 공간을 잘라내는 마법인 거겠지.
그렇다면 지금처럼 연막을 통해 시야를 차단하면 어떨까?
“큿···!”
연막 너머에서 들리는 혀 차는 소리.
좋아. 예상대로 잘 흘러가고 있다.
“한눈팔지 마시죠.”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셜록의 차가운 목소리.
뿌연 연막 사이에서 밝게 빛나는 초록색 눈동자.
그러나 이 또한 내 계산 내에 있던 변수였다.
즉시 미리 준비해뒀던 마법을 발현하여 내 몸을 바꿔치기했다.
내가 있던 자리엔 얄미운 피에로 박스가 통통 튀고 있으며 나는 역으로 셜록의 뒤를 잡는 데 성공했다.
“그 눈동자. 아무리 봐도 똑같단 말이야.”
그녀의 목에 카드를 겨눈 채 얘기를 꺼내려 했다.
“역시 너···.”
탕!!
그때 들려오는 총성.
반응할 새도 없이 정확히 내 이마를 꿰뚫는 감각.
반동에 밀려 뒤로 쓰러져가는 시야 속에서 새하얀 제복을 입은 까만 선글라스의 남자가 건치를 드러내며 환히 웃는 모습이 보였다.
“가자. 진실의 방으로.”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주인공이 죽어버렸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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