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6
나는 미술관의 그림을 훔칠 완벽한 트릭을 발견하였다.
하지만 여백이 부족하여 이를 적지 않겠다.
사실 여백은 충분하다.
다만 지금은 내가 아카데미를 가야 하므로 당장 실행할 수 없을 뿐.
괴도가 활동하는 건 어디까지나 달이 뜨는 밤 시간대에 한해서다.
낮에는 선량한 아카데미의 엑스트라로 살아가면서 말이지.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
살짝 다른 점이 있다면 곁에 수다를 떠들 친구가 생겼다는 걸까.
“뭘 보냐. 찐따 주제에.”
참고로 레이첼을 보고 말한 건 아니다.
이 녀석은 친구라기엔 좀 애매하고 굳이 말하자면 악연 같은 느낌이니까.
“크로! 일찍 왔네.”
“안녕. 율리아.”
그래. 내가 말한 친구는 바로 율리아였다.
저 상냥한 말투를 보라. 불과 직전의 레이첼과 너무나 대조되지 않는가.
물론 그녀의 성격이 천사같이 착해서 누구에게나 상냥하게 대해주는 것뿐이지만.
율리아와 가볍게 잡담을 나눴다. 옆에서 턱을 괴고 시큰둥한 척하던 레이첼도 간간이 거들면서 아침 시간이 이어졌다.
“뭐? 어제 나랑 헤어지고 바로 율리아랑 만났다고?”
“응. 미술관에서 우연히 마주쳤거든.”
“찐따 주제에 이젠 바람까지 피우는 거냐?”
“뭐래.”
대체 저 근본없는 드립은 정말로 재밌으라고 치는 걸까.
[멍청한 녀석. 딱 봐도 농담인 척하는 질투잖느냐.]
멍청한 건 오히려 여신님 쪽이었다. 하렘에 눈이 멀어서 뇌가 굳어버린 모양이다.
저 양아치가 질투한다고? 차라리 율리아가 밤마다 정체를 숨기고 괴도로 활동하는 게 더 현실적이겠다.
한창 셋이서 잡담을 이어가던 와중.
앞에서 걸어오던 원작 주인공 레이어드와 시선이 마주쳤다.
저 눈빛. 굉장히 부담스럽다고.
얼마 전부터 계속 이런 상황이다. 정확히는 지난번 대련 이후부터.
아무래도 레이어드는 내가 일부러 봐줬다는 음모론을 완전히 맹신하는 모양이다.
아니 네가 세계의 주인공이 될 만큼 재능충이라 졌을 뿐인데 왜 그걸 내 탓으로 돌리는 거냐고 대체.
내가 한숨을 푹 내쉬자 율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굉장히 불길한 기운이 엄습했다.
조만간 주인공이 나를 굉장히 골치 아프게 만들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부디 단순한 기우라면 좋으련만.
어쨌거나 시간은 계속 흘러 어느새 하루의 일정을 모두 끝마친 뒤 종례 시간이 되었다.
그때 율리아가 조원 셋을 전부 불러들였다.
무슨 일인가 싶어 그녀의 말을 가만히 기다리니.
“얘들아. 할 얘기가 있어.”
생각보다 훨씬 진지한 분위기로 율리아가 입을 열었다.
“무슨 얘기길래 그렇게 무게를 잡냐?”
“이번 발표에서 추가하고 싶은 내용이 생겼어.”
아 그 얘기인가. 어제 미술관에서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확실히 그런 주제라면 쉽게 얘기하긴 힘들겠지.
“발표 내용? 그건 이미 다 정했잖아.”
“어떤 내용인데?”
샤론의 나지막한 물음.
과제물과 발표의 내용을 정리하는 것이 샤론의 역할이니 사실상 그녀 혼자 발표 내용을 정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반대로 율리아의 역할은 앞에 나서서 발표하는 것뿐. 즉 엄밀히 따지면 원래 그녀가 맡은 역할과는 거리가 있었다.
“나한테 가족만큼 가까운 언니가 있는데 그 언니가 레이븐에게 도움을 받았어.”
“···허. 뭔 도움?”
“언니가 속한 교회에 상당한 양의 액수를 기부해줬어.”
레이첼이 코웃음을 치면서 삐뚜름하게 말했다.
“이야. 훔쳐서 번 돈으로 기부까지 하고. 괴도 새끼 뒤지면 천국에 가겠네.”
“무슨 뜻인지 알아. 당연히 안 좋게 보이겠지. 그치만 언니는 정말 돈이 필요한 상황이었고 레이븐이 도와준 덕분에 무사히 해결할 수 있었어.”
당사자인 내가 바로 앞에서 들어봐도 참 어려운 문제였다.
율리아에게 잘못이 아니라고 당당히 말해주긴 했지만 당연히 잘못이라 여기는 사람들이 틀렸다고 할 수도 없었다.
“어쩐지 저번에 주제 정할 때 반응이 이상하다 했더니 진짜 괴도 추종자였던 거였네. 심지어 교회 성직자까지 괴도 추종자라니. 참 대단하다.”
레이첼의 신랄한 빈정거림에도 율리아는 전혀 기죽지 않았다.
오히려 꿋꿋하게 자신이 할 말을 끝까지 내뱉는 기개를 보여주었다.
“나는 괴도 추종자가 아니야. 그가 좋은 사람이라고 확신하지 않아. 다만 샤론이 말했던 것처럼 객관적인 정보를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을 뿐이야. 물론 너희들이 반대한다면 나도 다수결에 따를게.”
이런 상황이라면 내가 먼저 도와줘야겠지. 먼저 꺼낸 말이 있으니까.
“나는 찬성이야. 괜찮은 생각 같아.”
이제 결정은 나머지 두 사람에게 달렸다.
조용히 율리아의 얘기를 듣던 샤론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것도 레이븐이 한 일이 맞다면. 괜찮다고 생각해.”
“그러면 3 대 1로 결정된 거지?”
“야 찐따. 나 반대라고 말한 적 없거든.”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율리아의 의견에 반대하니까 방금까지 언쟁을 벌여놓고서.
“난 그냥 우리 조장 생각을 떠본 것뿐이었다고. 만약 괴도한테 치우친 감정을 품고 있으면 이번 발표 목적이랑 안 맞잖아?”
흠. 뭔가 말은 그럴듯한데···.
하필 말을 내뱉은 사람이 다름 아닌 레이첼이라 믿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어쩌면 그냥 별생각 없이 아무에게나 시비 걸고 다니는 게 재밌어서 그러는 건 아닐까.
아무튼 만장일치로 율리아의 의견은 받아들여졌다.
생각보다 수월하게 성공해서 안심한 건지 그녀의 표정이 훨씬 밝아졌다.
“다들 이해해줘서 고마워! 사실 언니한테는 미리 말해놨거든. 그래서 오늘 바로 인터뷰 진행하면 될 거야.”
벌써 세팅까지 다 끝내놨다니.
“참 실행력도 빠르네. 우리가 반대했으면 어쩌려고?”
“글쎄. 허락해줄 때까지 떼쓰지 않았을까. 헤헤.”
멋쩍게 웃으며 하는 말이 왠지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실제로 원작에서 율리아가 보여줬던 독기를 생각하면 충분히 그럴만했으니까.
성격이 착한 것과 독기가 없는 건 별개더라.
착한 사람이 화나면 훨씬 무섭다고 하는 거랑 비슷하려나.
“대신 나는 인터뷰에 빠질게. 내가 끼어들면 중립적이지 못할 수도 있잖아.”
“조별 과제에 불과한데 참 철저하네.”
“대충하는 것보단 차라리 철저하게 하는 편이 좋잖아?”
그러면 오늘도 레이첼과 인터뷰를 하러 가야 하는 건가.
어젯밤 레이첼의 급발진을 떠올리니 벌써 피곤해지는 느낌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녀석이랑은 상성이 안 맞는 거 같다.
“나도 오늘은 약속 있는데.”
“진짜?”
“뭐야. 찐따 너 너무 대놓고 좋아한다? 기분 나빠지게.”
그야 좋을 수밖에. 둘이 같이 갈 바엔 차라리 혼자 가는 게 훨씬 편하다.
“그러면 오늘은 나 혼자···.”
“나도 갈게.”
그때 샤론이 내 말을 끊고 동참을 선언했다.
“너도 오겠다고?”
“응.”
“나 혼자서도 괜찮은데. 그냥 쉬는 편이 낫지 않아?”
내 질문에 샤론은 초록색 눈동자를 빛내면서 대답했다.
“궁금하거든. 레이븐이 왜 도와줬는지.”
이 녀석도 딱 보니까 한 고집 하겠네.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파티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래. 그러면 둘이 가자.”
“오. 찐따랑 책벌레의 조합인가. 의외로 괜찮은데?”
“레이첼. 전부터 신경 쓰였는데 친구를 그렇게 부르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해.”
“윽···. 알았으니까 잔소리 좀 하지 마. 우리 엄마도 아니고.”
우리 조는 참 활기차구나.
다시 봐도 어떻게 이 멤버가 한자리에 모였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
수업이 끝나고 우리는 둘이서 율리아가 알려준 교회로 향했다.
나는 슬쩍 옆으로 곁눈질했다. 언제나처럼 무덤덤한 표정을 유지 중인 샤론.
그러고 보면 샤론이랑 단둘이 있게 되는 건 처음인가?
신비로운 분위기에 차갑고 도도한 타입의 얼음 공주.
같은 반 아이들도 다가가기 힘들어하는 특유의 아우라. 여러모로 샤론 역시 상당히 특이한 캐릭터였다.
원작에서 왜 비중이 거의 없었나 의아할 정도.
어쩌면 발매되지 않았던 뒷부분에서 뭔가 중요한 역할을 맡지 않을까?
다른 사람이 아니라 샤론이라면 왠지 그래도 이상할 건 없어 보였다.
“저기 샤론.”
“응.”
“레이븐을 고른 이유가 있어?”
사실 이전부터 계속 이걸 물어보고 싶었다. 딱히 기회가 나오지 않아서 어영부영 넘어가게 됐는데 마침 단둘이 있게 됐으니 좋은 타이밍이다 싶어 곧바로 질문을 던졌다.
“율리아가 그랬잖아. 너무 뻔한 마법사는 별로라고.”
“단순히 그 이유가 전부야? 레이븐이 다른 조는 안 고를만한 참신한 마법사라서?”
“다른 이유가 더 필요해?”
그렇게 물으면 할 말이 없긴 하다. 게다가 딱히 이상한 대답도 아니었다.
다른 조가 고르지 않을 참신한 마법사로 레이븐만 한 적격이 또 있을까. 물론 유명하지 않아서라기보단 너무 논란이 될 위험성이 크니까 피해 가는 거겠지만.
그런데 왜 나는 자꾸만 다른 생각이 피어나는 걸까.
도저히 머릿속에서 의구심이 떠나지 않았다.
샤론의 에메랄드 눈동자를 봤을 때부터 계속 들던 의심.
왜 그녀는 굳이 괴도 레이븐을 골랐는가?
혹시.
그녀가 탐정 ‘셜록’인 건 아닐까.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두둥!
과연 그녀의 정체는 뭘까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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