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60
탕!!
혼란스럽던 금고 안에 가득 울려 퍼진 총성.
가젯은 소리의 근원지로 고개를 돌려 새롭게 등장한 집행자를 바라보며 승리를 직감했다.
정확히는 몰라도 그의 공격이 괴도에게 성공적으로 먹혀든 것 같았으니.
하지만 뒤이어 벌어진 상황은 도저히 그녀의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흐름 전개였다.
분명 총성과 함께 뒤로 쓰러지던 레이븐은 어느샌가 멀쩡히 서서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으며 그와 반대로 웃으며 등장했던 집행자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거친 숨을 내뱉고 있었으니까.
‘뭐지? 내가 뭘 놓친 건가?’
아니.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봐도 뭔가를 놓친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지금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새로운 집행자가 등장한 지 단 1초 만에 전투가 끝난 듯한 모습이 연출되고 있잖는가.
의문에 휩싸여있던 와중 오로지 캐서린만이 상황의 진실을 깨닫고 경악하였다.
“리퍼. 당신이···. 안에서 진 겁니까?”
믿을 수 없다. 하지만 지금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자신의 추측이 사실이라 알려주고 있었다.
리퍼의 마법은 굉장히 특수하다. 평범한 상황에선 아예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기에 일반인과 별 다를 바 없는 수준이지만 그의 개성 마법인 죽음의 세계로 상대를 끌고 갈 경우 얘기는 달라진다.
단 한 명에게만 사용할 수 있는 데다 현실에 물리적 피해조차 입히지 못하고 심지어 재사용 대기 시간도 매우 길지만 그런 단점들을 덮어버릴 만큼 내면세계 속에서의 리퍼는 압도적이다.
그 안에 한 번 갇히는 이상 집행자 중 최강이라 불리는 에반마저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죽음의 세계에서 리퍼는 이름 그대로 사신이 되어 상대의 영혼을 조금씩 갉아먹는다.
그 악랄하면서도 확실한 전투 방식에 저항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
이것이 리퍼가 집행자 중에서 대인전의 결전 병기로 평가받는 이유이다.
따라서 집행자들은 이전부터 괴도 레이븐을 상대할 카드로 리퍼를 생각해뒀었다.
제아무리 미꾸라지처럼 잘 도망치는 놈이라 해도 내면세계로 끌고 가기만 한다면 거기서 벗어날 수는 없으니까.
그녀는 리퍼가 출동하는 것을 확인한 순간부터 승리를 확신했다. 확실히 직접 마주한 레이븐은 생각보다 뛰어난 실력자였으나 리퍼와의 상성이 너무나도 안 좋았으니 말이다.
그런 캐서린의 생각을 비웃듯 예상과는 정반대의 광경이 펼쳐져 버렸다.
무릎을 꿇고 있는 쪽은 리퍼였으며 오히려 괴도는 제자리에 우뚝 서서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둘 사이엔 명확히 승패가 갈린 상태였다.
“대체 어떻게···?”
캐서린 또한 죽음의 세계에 들어가 본 경험이 있다. 어디까지나 대련에 불과했기에 적당한 선에서 멈추긴 했지만 그 안에서 리퍼를 이긴다는 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집행자 내에서 예상했던 괴도의 능력 내에선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는 건 자신들의 예측이 틀렸다는 거겠지. 리퍼와의 일대일 전투에서 순수하게 승리를 거뒀다는 건 못해도 에반과 동급 혹은 그 이상.
‘잡을 수 없다.’
그런 확신이 캐서린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적어도 지금 당장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리퍼가 이미 리타이어한 이상 그는 전투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남은 전력이라 해봤자 자신과 일반인들이 전부.
겨우 이 정도로 어설프게 막으려 했다간 오히려 자신들이 당하고 말 것이다.
조사된 바에 따르면 괴도가 살생을 저질렀다는 기록은 없으나 그녀는 본인의 목숨을 쉽게 배팅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언제나 신중을 거듭하는 캐서린이 보기에 지금은 얌전히 물러나야 할 타이밍이었다.
어차피 상대도 에메랄드를 손에 넣었으니 굳이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전투를 반기지는 않으리라.
그녀는 재빠르게 판단을 마친 뒤 아무 조건 없이 옆으로 비켜 길을 열어주었다.
“뭐 지금 뭐 하는···!?”
갑작스러운 돌발 행동에 경악한 가젯이 뭐라 소리치려 했으나 그보다 한발 앞서 레이븐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감이 좋으시네요.”
“···오늘의 빚은 잊지 않겠습니다.”
“이런. 본의 아니게 또 다른 여인의 마음을 애달프게 해버렸네요.”
능글맞게 헛소리를 지껄이는 괴도 레이븐.
가젯은 이를 바득 갈며 캐서린에게 소리쳤다.
“진심입니까!? 이렇게 그냥 보내겠다고요?!”
“저로서도 어쩔 수 없습니다. 승산이 없는 싸움에 판돈을 걸어봤자 전부 잃을 뿐이니까요.”
“으윽···!!”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조금 탐탁지 않기는 해도 능력만큼은 인정했던 집행자가 그것도 둘씩이나 되면서 이렇게 얌전히 패배를 받아들인다니. 심지어 제대로 싸워본 것도 아니고 동료 한 명이 뜬금없이 쓰러지니 곧바로 겁쟁이처럼 꼬리를 말아버렸다.
당연하게도 가젯은 이대로 얌전히 수긍할 수 없었다. 그녀는 구석에 찌그러져 있던 은행 보안 직원에게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어이! 당장 내려가서 총력 지원 요청해!”
“어 네···?”
“지금 당장!!”
“네 넵!!”
자신의 상관이 아님에도 카리스마에 굴복해 후다닥 바깥으로 뛰어가는 경비.
“나머지는 지원이 올 때까지 놈의 발목을 붙잡는다! 무슨 일이 있어도 놓쳐선 안 돼!”
생전 처음 보는 여자가 명령을 내리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자신들로서도 괴도를 놓칠 경우 닥칠 후폭풍이 두려웠기에 정신을 차리고 제압을 시도하려 했다.
레이븐은 한숨이 뒤섞인 웃음을 내비치며 말했다.
“정말. 어쩔 수 없네요.”
어느새 사방으로 둘러싼 경비들이 일제히 괴도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손가락을 한번 튕기자 동시에 빛나는 사슬에 묶여 제압되고 만다.
애초에 숫자가 아무리 많다 해도 일반인은 마법사를 상대할 수 없다. 가젯 역시 인정하기는 싫지만 머릿속으로는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번에도 또다시 저 괴도에게 패배하고 말았다는 것을.
저벅저벅.
그때 레이븐의 앞으로 천천히 걸어와 앞을 막아서는 한 소녀.
셜록과 정면으로 대치한 괴도는 자연스레 입가에 진심 어린 미소를 피워 올렸다.
“막을 생각인가?”
줄곧 존대를 써오던 레이븐이었으나 셜록에게만큼은 편하게 말을 놓으며 친근하게 얘기를 걸었다.
“그러지 않아야 할 이유라도 있어?”
“혼자서는 버거울 텐데.”
“상관없어.”
그녀의 초록색 눈이 또 한 번 번뜩였다.
레이븐 역시 그런 셜록의 투지가 마음에 들긴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궁금하기도 했다.
왜 굳이 이렇게까지 하는가?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자신에게 이렇게나 집착에 가까운 태도를 보일 이유가 없어 보였으니까.
서로의 정체에 대한 눈치싸움을 미뤄두고 생각하자면 셜록은 탐정이고 레이븐은 괴도일 뿐이었다. 즉 직업적으로 대립할 뿐 개인적인 원한이나 인연이 있다고 보긴 힘들었다.
그렇다면 역시 그녀가 샤론이기 때문일까?
자신이 동급생인 크로 모리스라 의심하고 있어서 집요하게 자신을 잡으려는 걸까?
레이븐에 생각에 잠겨있던 와중 셜록이 먼저 공격을 시도했다.
‘총?’
어디서 꺼낸 건지 모를 권총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었다.
살짝 눈가를 좁히며 총구를 쳐다보던 괴도는 입을 열었다.
“설마 고작 그런 철 덩어리로···.”
탕!
말을 끊고 날아오는 총알을 가뿐하게 피하는 레이븐.
하지만 예상과 다른 상황이 펼쳐진 탓에 그의 눈이 크게 뜨이고 말았다.
분명 자신을 스쳐 지나갔을 총알이 궤적을 틀어 뒤에서 다시금 제게로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팅.
괴도의 뒤에서 카드가 방패처럼 총알을 막아내었다.
겉으로는 여유로운 미소를 유지하면서도 속으로는 가슴을 쓸어내리는 괴도.
조금만 방심했더라면 그대로 뒤통수가 뚫릴 뻔했다.
“······.”
표정을 굳힌 레이븐은 상황이 생각만큼 좋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분위기 자체는 여전히 주도권을 잡고 있으나 막상 생각해보면 강력한 상대인 캐서린도 멀쩡한데다 리퍼가 언제 다시 깨어날지도 모르니 시간이 끌릴수록 점점 불리해질 것이다.
무엇보다 셜록이 변수였다. 그녀가 정확히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없으니 섣불리 덤벼들기엔 너무 위험했다.
궤적을 바꾸다 못해 아예 반대 방향으로 거슬러 돌아온 탄환.
정확히 어떤 마법인지는 몰라도 저런 총알이 계속 날아온다면 시선이 분산될 수밖에 없으며 그런 상태로 집행자 둘을 상대하는 건 불가능했다.
음. 도망쳐야겠다.
그런 결론을 내린 레이븐은 일부러 한껏 과장된 몸짓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뺏었다.
“오늘 제 복귀 무대를 빛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 답례로 멋진 걸 보여드리죠.”
괴도가 양팔을 쫙 펼침과 동시에 금고에 쌓여있던 돈들이 까마귀 떼로 변하더니 허공으로 힘차게 날갯짓해댔다.
뜬금없이 펼쳐지는 마술쇼에 모두가 넋이 나가 있던 와중 까마귀 떼는 곧 레이븐의 주위로 몰려들더니 아예 그를 뒤덮기 시작했다.
검은 물결에 뒤덮여 모습조차 보이지 않게 된 레이븐은 마지막으로 작별을 고했다.
“그럼 아디오스.”
천천히 작은 공처럼 줄어드는 검은 물결.
이내 증발하듯 사라지자 금고 안은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한 침묵에 잠기게 되었다.
레이븐은 마술과 함께 무대에서 퇴장했다.
그가 사라진 허공만을 멍하니 응시하던 가젯은 밀려드는 허망함에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늘도 주인공의 승리인 것이에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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