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63
“둘로 갈라졌다고요?”
블랑카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지하 공간이 물리적으로 두 쪽 났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구성원이 둘로 분열되었다. 즉 파벌이 생겼다는 뜻이리라.
“하지만···. 겉보기엔 괜찮아 보였는데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까 봤던 지하의 풍경을 떠올려보면 문제가 있다고 보긴 힘들었다.
이상한 점이라고 해봤자 기껏해야 드레이크의 표정이 좋지 않았던 것 정도가 전부였으니까.
“영웅님이 돌아왔으니까. 당장은 모두 기뻐하고 있긴 하지만 사실은 깊은 곳에서부터 서서히 썩어가고 있는 느낌이지.”
“대체 뭐 때문에 둘로 갈린 건데요?”
파벌이 생기려면 당연히 그만한 이유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유라면 역시 누군가 권력을 욕심내서가 아닐까.
“이유라···. 저번에 여기서 들었던 얘기 기억해?”
“네. 드레이크 씨가 너무···. 다른 쪽에 몰두하고 있는 것 같다고 하셨잖아요.”
괴도를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이용한다. 드레이크의 언행에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게 문제가 됐어. 다른 사람도 하나둘씩 눈치채버린 거야.”
블랑카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점점 드레이크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어.”
그녀의 얘기를 들으며 신중하게 판단을 내렸다. 과연 이것이 지금 내게 이득이 될 만한 요소인지를.
언뜻 들으면 상당히 괜찮게 들리기도 했다. 그들 사이에 생긴 분열의 틈을 잘만 이용한다면 드레이크를 자리에서 끌어내릴 수도 있을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고려해야만 한다. 드레이크가 이 상황을 기회로 잡아 자신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다질 가능성도 충분하다. 자신을 대놓고 반목하는 적대 세력을 색출해내 본격적인 자신만의 조직으로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지금 제일 중요한 것은 반 드레이크 세력의 구심점이 누구냐는 것이다.
“혹시 블랑카 씨도 반대편에 서신 건가요?”
얼마 전 그녀가 보였던 태도를 생각하면 그쪽에 붙는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오히려 블랑카가 반 드레이크파의 수장이어도 납득할 수 있을 만큼 그녀의 괴도에 대한 마음은 진심이었으니까.
내 질문에 블랑카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자기. 날 너무 못된 년으로 보는 거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친구를 배신할 생각은 없어.”
“죄송해요.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됐어. 고작 친목회 따위에서 배신은 무슨. 우리가 뭐 엄청 대단한 조직도 아닌데.”
웬만하면 그녀의 말에 동의하겠지만 지금의 괴도 추종자는 단순 친목회로 분류하기엔 이미 덩치가 너무 커진 상태였다.
처음에는 지나치게 넓다 싶었던 지하 공간도 오늘 봤을 때는 사람으로 꽉 차서 미어터질 정도였으니까.
매일같이 이런 모임이 열린다는 걸 생각하면 한 번이라도 발을 들인 인원이 얼마나 될지 가늠도 안 될 정도였다.
괴도 추종자는 이미 상당한 영향력을 갖춘 지 오래이며 당연히 그 안에서 벌어지는 권력 투쟁 역시 가볍게 여길 만한 일은 아니었다.
막말로 이 정도의 숫자가 전부 괴도를 위해서라면 목숨마저 바치는 광신도로 각성한다고 생각해보라. 그 순간 나라 자체가 휘청할지도 모르는 위험 세력이 탄생하는 것이다.
“아직 나를 포함해서 간부들은 최대한 중립을 지키고 있어. 우리가 어느 한 편에 서는 순간부턴 정말로 돌이킬 수 없게 될 테니까.”
현명한 선택이다. 여기선 어느 진영이든 간에 섣불리 몸을 담갔다간 반대편의 반감을 살 수밖에 없다.
가장 좋은 방법은 파벌이 더 심해지기 전에 어떻게든 유화책을 마련해 다시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겠지. 너무 이상적인 해결법이라 현실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하겠지만.
얘기를 듣던 율리아가 질문을 던졌다.
“드레이크 씨도 이런 상황을 알고 계세요?”
“당연히 알고 있지. 그래서 이만저만 고민이 많은 걸 테고. 처음에야 그냥 성향이 다른 정도로 넘어갈 수 있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극단적으로 변해가는 느낌이거든.”
“아···.”
그제야 최근 동안 들었던 의미심장한 대화 내용이 무엇을 뜻하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극단적으로 변해간다던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얘기들이 전부 지금 상황을 가리키는 말인 모양이다.
얘기를 듣고 나니 상황은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지만 이걸 어떻게 써먹어야 할지는 아직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어제 영웅님이 복귀해준 덕분에 분위기가 많이 풀어졌다는 거려나.”
“그렇네요. 결국 영웅님을 좋아하는 건 같으니까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호응에 율리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설마 율리아마저 괴도를 영웅이라고 부를 줄이야. 이제는 완전히 괴도 추종자로서 타락했다는 느낌이라 상당히 복잡미묘했다.
“그럼 일단 주동자를 찾는 게 먼저겠네요.”
얘기로 풀어나가 합의를 하든 강경책으로 조직에서 쫓아내든 간에 이대로 놔둘 생각이 아니라면 파벌을 만든 주동자부터 색출해내는 것이 최우선이다.
추종자의 규모가 생각보다 큰 탓에 무리 속에 숨어들려고 작정한다면 찾아내는 것이 꽤 어려울지도 모른다.
“물론 우리도 그러고 싶지만 그게 생각보다 쉽지 않은 거 있지. 막말로 모두 불러 모아서 대놓고 나오라 얘기할 수도 없잖아? 그랬다간 파벌이 생겼다는 걸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셈이니까.”
“애초에 그렇게 한다고 순순히 자진해서 나올 리도 없겠지만요.”
명확한 물증이 없는 한 아무리 의심이 가더라도 상대가 잡아떼면 어떻게 할 방법이 없는 상황이다.
“누군가 뒤에서 여론을 조장하는 건 확실한데 어떻게 찾아낼 방법이 마땅치가 않아.”
“방법이라···.”
한동안 고민을 거듭하다 괜찮은 아이디어가 떠올라 블랑카에게 제안했다.
“이건 어때요?”
“응? 혹시 좋은 방법이라도 있어?”
“제가 직접 반대 파벌에 잠입하는 거죠.”
내 작전을 듣고는 흥미 가득한 기색을 보이는 그녀.
“그게 가능할까?”
“저는 블랑카 씨랑 다르게 얼굴도 잘 안 알려져 있잖아요. 제가 드레이크한테 불만을 가진 척 티를 내면 상대 쪽에서 먼저 접선할 확률이 높을 거예요.”
“물론 그렇겠지만 단번에 주동자까지 만나는 건 힘들 텐데.”
“그거야 천천히 올라가면 되죠. 게다가 저는 블랑카 씨랑 친분이 있으니까 그 사실을 슬쩍 흘리면 저쪽에서도 그걸 이용하려고 하지 않을까요?”
율리아는 살짝 눈을 찌푸리며 나지막이 얘기했다.
“확실히 언니가 드레이크 씨한테 불만을 품고 있다는 거짓 정보를 흘리면 상대가 접근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간부와 엮이기 싫어서 피할 가능성도 있어요.”
“뭐든 이대로 가만히 있는 것보단 낫잖아요?”
결국 두 사람도 내 제안보다 나은 아이디어를 떠올리지 못했기에 내 작전은 무사히 통과되었다.
좋다. 이 기회를 잘만 활용한다면 생각보다 손쉽게 드레이크를 무너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괴도를 너무 좋아해서 생긴 파벌이란 건 좀 껄끄럽긴 하지만 어쨌든 조직 내에서 드레이크에게 반감을 지닌 세력이 생겼는데 이걸 이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럼 이제부터는 우리 자기만 믿고 기다려야겠네.”
“블랑카 씨.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뭔데 그렇게 목소리를 깔아? 혹시 사귀자고 할 생각?”
또 평소처럼 음담패설을 늘어놓는 그녀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만약 드레이크 씨랑 레이븐 중에서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누구를 선택하실 거예요?”
“···무슨 질문이 그래? 좀 당황스럽네.”
“혹시 모르니까요. 이번 일이 꼭 평화적으로 좋게 해결되리란 법도 없고.”
블랑카는 딱딱한 어투로 대답했다.
“질문이 잘못됐잖아. 지금 생겨난 파벌은 영웅님을 좋아하는 사람들이지 영웅님이 아니야. 그렇게 비교할 거면 파벌의 주동자가 영웅님이어야 맞지 않겠어?”
음. 내가 주동자는 아닌데 지금부터 거기에 속할 예정이긴 하거든.
그냥 확 밝혀버릴까 입이 근질거렸지만 이후의 여파를 감당할 자신이 없기에 일단 꾹 참기로 했다.
“그럼 그냥 단순 비교로 둘 중 하나만 고르자면요?”
“자기. 설마 질투하는 거야? 그래서 이렇게 꼬치꼬치 캐묻는 거구나. 맞지?”
이런 상황에서까지 저런 얘기가 나오나 싶으면서도 일단 대답을 듣고 싶은 마음에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니까 말해줘요.”
“저번에도 말했잖아. 나한테는 무조건 영웅님이 첫째라고.”
대체 왜? 그런 의문이 절로 튀어나왔다.
율리아야 그럴 수 있다고 친다. 미술관에서 왜 레이븐에게 관심을 가지게 됐는지 사연을 들었으니까.
그럼 블랑카한테도 그런 속사정이 숨겨져 있는 건가? 솔직히 한 명만으로도 겨우 이해하겠는데 둘이나 되면 조금 힘든 느낌이었다.
문득 순수한 호기심이 일어 한 가지 질문을 더 내뱉었다.
“만약 괴도를 실제로 만나면 어떻게 할 거예요?”
“그야 일단 만나자마자······.”
뒤이어 10분 동안이나 끊임없이 쏟아진 얘기는 차마 기억을 떠올릴 수 없을 만큼 끔찍하고 충격적인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지하에 직접 모습을 드러내려던 기존의 작전을 진지하게 재검토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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