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64
셋이서 계획을 세운 뒤 다시 지하로 돌아왔다.
얘기했던 대로 내가 드레이크에게 불만을 품은 척 연기해 반대 파벌에 잠입할 예정이다.
그러기 위해선 상대 쪽에서 먼저 접근할 수 있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실 방법은 간단했다.
대놓고 드레이크와 충돌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그쪽에서도 깜빡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을 테니.
“정말 괜찮겠어?”
“됐어요. 사정은 나중에 설명하면 이해해주겠죠.”
리얼한 연출을 위해서라는 핑계로 드레이크에겐 얘기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해놨다.
사실 이건 단순한 연기만은 아니었다. 이 기회를 활용해 과연 드레이크가 어떤 속셈을 품고 있는지 대충이라도 긁어내 볼 심산이었으니까.
우리가 대립하는 장면을 다른 사람들도 지켜봐야 하니 대놓고 성큼성큼 드레이크가 앉아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다가오는 나를 발견하곤 반갑게 인사하는 드레이크.
보아하니 저번 라파노의 저택에 침입했던 게 나라는 사실은 전혀 모르는 듯했다.
“도일! 얼굴 한번 보기 힘들군! 잘 지냈나?”
“네. 요즘 일이 바빠서 시간 내기가 힘들더라고요. 그래도 어제 그런 일이 있었으니 오늘은 꼭 와야겠다고 생각했죠.”
“하하. 당연히 그래야지. 무려 영웅께서 한 달 만에 복귀한 기념일이지 않나.”
그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고 옆자리에 앉은 다음 슬슬 밑밥을 뿌려 보았다.
“그런데 기쁜 날치고는 표정이 좀 어두워 보이시네요.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응? 내 표정 말인가? 이렇게 기쁜 날에 그럴 리가. 조명이 오늘따라 좀 약한가 보지.”
“그런 거라면 다행이지만요. 역시 제가 들은 내용이랑은 상관없는 거였네요.”
일부러 어물쩍 말을 넘기자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내 어깨를 툭 두드리는 드레이크.
“음? 무슨 얘기를 들었길래 그러나. 사람 궁금하게 해놓고 그냥 넘어갈 생각은 아니겠지?”
“아니 딱히 좋은 내용은 아니라서 굳이 얘기할 필요까지는···.”
“괜찮으니까 말해봐. 어서.”
반응을 보니까 생각 이상으로 상당히 초조한 모양이다. 혹시라도 내가 반대 파벌에 꼬드김을 당했을까 봐 노심초사하는 것이 대놓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다면 바라는 대로 해줘야지.
“누가 그러는데 드레이크 씨는 괴도 레이븐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자기 목적을 위한 이용 수단으로 쓰는 거라고···.”
“누구? 누가 그러던?”
내가.
“글쎄요. 이름은 듣지를 않아서 잘 모르겠네요.”
“얼굴은 봤을 거 아니야! 인상착의라도 말해봐!”
바로 옆 테이블에서 힐끔거릴 만큼 어느샌가 목청을 키워 소리치는 드레이크.
그럴수록 나는 마음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태연자약하게 연기를 이어나갔다.
“죄 죄송해요. 제가 아직 사람들 얼굴을 다 못 익혀서···.”
“하아···. 그래. 그럴 수 있지.”
겨우 이성을 되찾은 건지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텐션을 가라앉히는 녀석.
미안하지만 이대로 끝내기엔 아직 어그로가 부족하단 말이지.
지금부터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순수함을 연기하며 드레이크의 속을 잔뜩 긁을 차례였다.
“그···. 아니죠?”
“도일. 이러면 정말로 섭섭한데. 내 진심이 어떤지 누구보다 잘 알잖나. 저번에 셋이서 나눴던 담화를 벌써 잊은 건가?”
“저도 당연히 아니라고 믿어요. 그러니까 너무 과민하게 받아들이실 필요 없다고 생각해요. 그럴수록 오히려 더 수상하게 보이거든요.”
살짝 눈가를 좁히면서 나를 빤히 쳐다보는 드레이크.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은 가운데 옆에 앉아있던 알프레드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하하! 오랜만에 만났는데 뭐 이런 칙칙한 얘기나 하고 있어? 자자 다들 한 잔씩 마시면서 기분 좋은 얘기만 나누자고!”
눈치 하나는 백 단이네. 이대로 놔두면 드레이크가 폭발할 듯싶으니까 곧장 중재에 나서다니.
여기서 한 발짝 물러서고 다음 기회를 노리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지금은 조금 무리해서라도 끝까지 가보기로 했다. 적의 정체도 제대로 모르는 상황에서 언제까지고 뒤로 미룬다고만 해서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으니까.
“딱 봐도 대충 짐작이 가요.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고 있죠? 제게 말을 건 사람도 아마 드레이크 씨한테 불만을 가져서 그런 걸 테고요.”
“그렇다면?”
“해결해야죠. 가만히 놔두면 알아서 사라진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오히려 점점 덩치를 불려가서 조직 자체를 와해시킬 거예요. 그 전에 싹을 뿌리 뽑아야죠.”
최대한 극단적인 주장으로 상대를 자극한다. 어차피 드레이크는 내 말에 따라서 함부로 움직일 수 없다. 블랑카가 말했던 대로 중심에 있는 자가 지금의 상황을 언급하는 순간 괴도 추종자 내의 분열이 공식적으로 인증되는 꼴이니까.
말하자면 움직이지 못하는 상대를 보고 ‘나 잡아 봐라’하며 놀리는 꼴이었다.
“마침 영웅님이 복귀하면서 사람들도 마음이 들떴을 테니 지금이 기회에요. 괴도를 한껏 찬양한 다음에 당당하게 말하는 거예요. 최근 친구 사이에서 분열을 일으키려는 자가 있는 것 같은데 그런 얄팍한 속셈은 통하지 않는다고. 지금 당장 자수하지 않으면 철저하게 찾아내서 추방해 버리겠다고 경고하는 거죠.”
만약 내 말대로 한다면 멸망으로 향하는 직행 코스를 타는 것이다.
상대 파벌은 그럴듯한 명분을 챙긴 상태다. 리더인 드레이크가 정말 괴도 레이븐을 좋아하지 않고 수단으로만 이용한다면 당연히 괴도 추종자로선 불만을 제기해야 하는 문제니까.
그런데 무작정 반대 파벌을 권력에 미친 놈들로 깎아내리고 선전 포고를 내뱉는다면?
그 순간 괴도 추종자라는 조직은 두 번 다시 하나로 뭉칠 수 없게 될 것이다.
드레이크 역시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다. 한 조직을 통솔하는 리더라면 이 정도쯤은 특별한 지식이 없어도 직관만으로 위험하단 걸 깨달으리라.
그럼 당연히 내가 말도 안 되는 제안을 늘어놓으며 대놓고 도발하고 있단 사실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겠지.
당장 옆에 있는 알프레드도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지 않은가.
“신입. 방금 얘기는 선을 좀 세게 넘었어. 그건 드레이크가 알아서 할 일이야.”
“어 그런 건가요···? 죄송해요. 저는 그냥 머릿속에 떠오른 아이디어가 괜찮아 보여서 제안한 것뿐인데···.”
어떠냐. 아주 얄미워 죽을 것 같지? 어디 한번 대놓고 들이받아 봐.
사람들 앞에서 네가 얼마나 다혈질인지 자랑해보란 말이야.
드레이크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주억거리기 시작했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군.”
“···어?”
감탄사는 내가 아니라 알프레드가 뱉은 것이었다.
하지만 나도 똑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을 만큼 예상 밖의 상황임은 분명했다.
이걸 참는다고? 지금껏 봐왔던 녀석의 성격대로라면 미친 황소처럼 들이박을 줄 알았는데.
내가 너무 드레이크를 과소평가했던 건가?
“그래. 그렇게 하면 되겠어. 정말로 너는 천재로군!”
···아니면 내가 상상한 것 이상의 바보인 건가?
설마 내 제안을 진짜 좋은 의미로 받아들인 건 아니겠지?
정말이라면 나야 좋긴 하지만 만약 드레이크가 내 말대로 움직인다면 그다음부터는 내가 굳이 손쓸 필요도 없이 조직은 알아서 무너질 것이다.
대체 드레이크가 무슨 생각인지 몰라 혼란에 휩싸여있던 와중 놈은 내게 친근한 태도로 어깨동무까지 하며 얘기했다.
“바로 당장 시작해야겠어.”
“···정말로요?”
“물론. 그 대신 도일 네가 직접 해줄 수 있겠나?”
잠깐만. 이게 무슨 소리지?
“하하. 아무래도 내가 스스로 결백을 주장해봤자 믿기는 힘들지 않겠나. 다른 일꾼들도 나랑 너무 오래 지냈다 보니 진실성을 의심할 게 뻔하고.”
그제야 나는 드레이크의 의도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반면 너는 여기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 중립적인 위치에서 말할 수 있는 데다 본인이 직접 생각해낸 제안이니 훨씬 유창하게 친우들을 설득할 수 있을 테고 말이야.”
“아니 그게···.”
지금 이 녀석 나한테 전부 덤터기를 씌울 생각이잖아.
“설마 본인이 그렇게 말해놓고 한 입으로 두말하는 건 아니겠지? 괴도 추종자의 화합을 위해 지금 나서야 한다고 네가 방금 그러지 않았나.”
“물론 그렇게 말하긴 했는데 제가 앞에 나가서 얘기한다고 누가 들어나 줄까요···? 아니면 드레이크 씨의 대리인 신분으로 얘기만 하는 거라면야···.”
어차피 지금은 말하는 사람이 누구냐보다도 그 내용이 누구의 뜻인지가 더 중요한 상황이다.
즉 내가 앞에 나가서 어그로를 끌더라도 전부 드레이크가 원한 거였다고 화살을 돌려버리면 비슷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지. 그러면 다른 친구들이 뭐라고 생각하겠나? 내가 앞으로 나가서 얘기할 용기도 없어서 다른 친구한테 떠넘기고 겁쟁이처럼 숨었다고 비웃을 게 뻔하잖나.”
그거 맞잖아. 이 새끼야. 지금 나한테 전부 떠넘기고 본인만 살겠다는 거잖아.
이건 거절해야 한다. 설령 드레이크와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는다고 해도 여기서 덤터기에 쓰여버리면 되돌릴 방법이 없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녀석의 손길을 뿌리치려는 순간.
불현듯 머릿속에 이 상황을 역으로 이용할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다가.
“알겠어요. 제가 할게요.”
덥석 드레이크의 제안을 받아들여 버렸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뒷치기의 뒷치기의 뒷치기에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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