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68
드레이크의 위치를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어딘가를 향해 죽어라 달리는 녀석의 뒷모습을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았다.
아마도 정체 모를 뒷배에게 도움을 요청하려는 거겠지.
가만히 두고 볼 이유는 없었다.
이대로 놈이 향하는 목적지를 소탕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는 있겠지만 굳이 그런 위험을 감수할 필요 없이 직접 정보를 캐내면 되니까.
가만히 지켜보다 근처에 아무도 없는 타이밍을 노려 땅으로 사뿐히 내려왔다.
“흐억!”
내가 앞을 가로막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꼴사납게 뒤로 나자빠지는 드레이크.
“어딜 그리 급하게 가시나?”
“이 망할 자식이···!!”
괴도 추종자를 만든 수장이라곤 믿을 수 없는 반응. 이젠 대놓고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순순히 보내주겠다더니 거짓말이었나!? 나를 우롱한 거냐!”
“오해하지 말라고. 아무 해코지 안 하고 보내줬잖아? 여기서 우연히 다시 만난 거랑은 별개의 문제지.”
“웃기지 마!!”
참 안타깝지만 본인이 못 믿는다면 어쩔 수 없지.
나는 천천히 그에게 한 발자국씩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뒷걸음질 치는 녀석.
이러니까 내가 나쁜 악당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네.
하긴 괴도를 정의의 편이라고 보기는 힘들려나. 그렇게 생각하니 나를 완전무결한 영웅으로 떠받든 이놈이 얼마나 비정상이었는지 다시금 실감하게 되었다.
“나도 너한테 나쁜 짓을 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 그냥 네가 왜 돈과 시간을 바쳐가면서까지 이런 짓을 벌였는지 궁금할 뿐이거든. 솔직하게 말해준다면 그 뒤로는 건들지 않을게. 이건 진심이야.”
어차피 드레이크를 족친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다. 녀석은 위에서 지시하는 걸 따르기만 했을 잡졸에 불과할 확률이 높으니까.
“웃기지 마! 내가 너한테 순순히 알려줄 것 같아!?”
“흠. 그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너만 손해일 텐데.”
웬만하면 좋게 좋게 가려 했건만 저쪽에서 먼저 이렇게 나오면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 고집이 과연 얼마나 이어질지 어디 한번 구경해볼까.”
딱!
손가락을 튕김과 동시에 드레이크에게 최면 마술을 걸었다.
어지간한 마법사도 벗어나기 힘든 마법을 평범한 일반인이 저항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그는 자신이 최면에 걸렸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한 채 심상 세계에 빠져들었다.
“오호.”
생각보다 굉장히 잘 구현된 공간을 둘러보며 작게 감탄했다.
아무래도 지난번 리퍼와의 전투 덕분에 최면술의 숙련도가 매우 높아진 듯했다.
예전 에반에게 사용했던 최면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라 표현해도 무방할 수준.
“뭐 뭐지···?”
갑자기 자신을 둘러싼 풍경이 완전히 달라지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드레이크.
자신이 최면에 빠졌다는 사실은 상상조차 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그 착각을 최대한 이용해줘야겠지.
“지금 네가 있는 장소가 어딘지 알겠어?”
“···고문실로 끌고 오다니. 대체 여기서 나를 어쩔 생각이냐!?”
녀석이 대답하자마자 주변의 풍경이 일렁이며 어두컴컴하고 섬뜩한 고문실로 변해갔다.
눈앞에서 공간이 아예 바뀌고 있는데도 전혀 눈치조차 채지 못하는 이질적인 상황.
그만큼 최면에 완벽하게 걸려 제대로 자각조차 못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깊은 꿈에 빠져 인지력을 완전히 잃은 상태와 비슷하다.
본인은 본인의 의지대로 움직인다고 생각하겠지만 막상 마법을 발동한 내가 드레이크의 감정과 생각마저 마음껏 지배하고 있는 셈이다.
“어쩔 생각인지는 네가 제일 잘 알지 않겠어? 지금이라도 순순히 말하는 게 어때?”
“으윽···!”
탄식을 흘리는 놈의 눈빛에 짙은 공포가 서렸다.
내 손에 스멀스멀 생기기 시작하는 겉보기에도 굉장히 흉악한 고문 기구.
녀석이 끔찍한 상상을 떠올릴 때마다 그것은 하나씩 심상 세계에 투영되어간다.
즉 본인이 자기 자신을 스스로 고문하는 것과 다름없다. 혼자선 절대 탈출할 수 없는 악순환의 무한 굴레와도 같았다.
안타깝게도 드레이크의 상상력은 매우 풍부하며 창의적이었다. 심지어 내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온갖 고문법이 상상으로 튀어나올 정도였으니까.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백기가 올라왔다.
“제발···. 살려줘. 뭐든 말할 테니까. 부탁합니다! 살려주세요!!”
“생각보다 싱겁네. 그래도 약속은 약속이니까 어쩔 수 없지. 얼른 네가 아는 모든 걸 사실대로 말해.”
드레이크는 고문실의 의자에 앉혀진 채 얘기를 술술 불기 시작했다.
밝혀진 진실은 충격적이었다.
내가 염두에 두었던 모든 시나리오를 비웃는 경악스러운 내용이었다.
“···레온하르트.”
사자의 심장이라는 이름을 지닌 그들은 일반인에겐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나 브리타니아를 주름잡는 핵심 귀족 사교 조직이다.
그리고 사실상 그들은 단 한 명의 영향력 아래 모인 중앙 권력의 핵심과도 같았다.
그 이름하여 위대한 리처드 그레이스.
가장 위대한 영웅이라 불리는 그가 이번 사건의 흑막이었다.
***
진실을 깨닫고 나니 오히려 머리가 복잡해진다.
설마 여기서 그 이름이 연관되리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는데.
당장 이제부터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막막함만 가득했다.
원래라면 드레이크부터 시작해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나가 모두 무너뜨리려 했다.
정확히 뭐가 목적인지는 몰라도 나를 이용하려 했다는 것만은 확실했으니까.
하지만 모습을 드러낸 상대의 덩치가 너무나도 컸다. 레온하르트가 얼마나 귀족 세계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지 이해한다면 그들을 적대한다는 것이 사실상 브리튼의 귀족 전체를 적으로 돌리겠다는 뜻과 마찬가지임을 깨달을 것이다.
물론 나는 이미 귀족들의 적이었다. 율리아와 같은 별종이 아닌 이상 귀족 중에 나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봐도 무방하리라.
문제는 그레이스였다. 이미 그를 적으로 돌린 적이 있지만 별일 없이 넘어갔기에 뒷전으로 미루고 있었다가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좀 이상하긴 했다. 대체 왜 누구보다 고결하다 평가받는 레온하르트의 귀족들이 남몰래 이런 일을 꾸미고 있었는가. 귀족 타도를 연호하는 혁명 조직을 만들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 이유를 나한테 엿 먹이기 위해서라고 결론짓는다면 꽤 그럴듯하게 들리지 않나.
괴도 추종자는 왕정 철폐와 귀족 타도를 외친다. 그런 이들의 지주인 괴도 역시 당장이라도 처단해야 할 위험 요소이다.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일만한 자연스러운 전개 흐름이다.
이렇게 극단적인 포지션이 되어버리면 나한테 호의적이던 사람들도 꺼림직함을 느끼고 뒤돌아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약 내 추측이 사실이라면 참 지독하리만큼 치졸하면서도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괴도 추종자라는 조직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면 나는 뭐가 원인인지도 모른 채 여론의 뭇매를 맞고 사악한 도둑으로 낙인찍혔으리라.
조금만 늦게 알아차렸어도 되돌리기란 불가능에 가까웠겠지. 한번 굳어진 사람의 마음을 뒤집는 건 매우 힘든 일이니까.
설마 이렇게 은밀히 여론전으로 밀고 나가려 할 줄이야.
몇 번을 곱씹어 생각해도 뒤통수가 얼얼할 정도였다.
상대의 정체를 깨달았으니 이제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
그런데 냉정히 말해서 정면 돌파는 무리다. 당장 라파노의 저택에서 맞닥뜨린 경비만 해도 나보다 훨씬 강한 상대였다.
아마 그레이스가 일부러 엄선해 준비해둔 실력자였겠지. 그렇다는 건 내가 정보를 캐내려 라파노에게 접근할 가능성이 있단 사실을 진작 예측했었다는 뜻이다.
그게 아니라도 어차피 드레이크가 쫓겨난 이상 그레이스의 귀에도 그 사실이 전해질 것쯤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상대는 나를 잔뜩 경계하며 방책을 세울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정면으로 무력 충돌을 감행하는 건 너무나 위험한 도박 수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나도 상대와 마찬가지로 똑같이 갚아주면 되는 거다.
최대한 치졸하고 효과적이게. 여론전에는 여론전으로 보복해야 하지 않겠는가.
때마침 괜찮은 아이디어가 떠올랐으니 굳이 뜸 들일 필요 없이 바로 움직일 생각이다.
[어떻게 할 생각이냐?]
여신님의 호기심 가득한 질문에 덤덤히 대답했다.
“그냥 제가 손에 쥔 카드를 전부 사용하려고요.”
말하자면 총력전이다. 전투를 제외한 모든 것을 쏟아부어 상대를 쓰러트린다.
그레이스 경은 아주 촘촘한 거미줄을 짜내어 먹잇감을 꽁꽁 묶어버리는 거미와도 같지만 사실 나도 그런 큰 그림을 구상하는 데에 꽤 자신 있단 말이지.
이래 봬도 현재까지 무패 신화를 자랑하는 낭만 괴도다.
과연 브리타니아의 가장 위대한 영웅이라 불리는 그레이스 경은 내 트릭을 뚫어낼 수 있을까?
조금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차근차근 하나씩 준비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할 것은 바로.
“이야 참 오랜만에 보는군! 도통 연락이 없길래 죽었나 했다네!”
“하하. 요즘 이래저래 사업을 관리하느라 바빠서 말일세.”
그의 동생인 길버트와 약속을 잡는 것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인가? 자네가 먼저 만나자고 할 줄은 몰랐는데.”
“아. 다름이 아니라···.”
나는 여유롭게 차를 홀짝이며 그에게 용건을 말했다.
“저번에 자네가 했던 그 제안. 받아들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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