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69
길버트는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자신의 눈앞에 앉아있는 신사의 의중을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솔직히 의외로군. 답이 없길래 거절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꽤 고민했지. 저번에도 말했다시피 귀족을 컨설팅한다는 게 가벼이 볼 일은 아니니.”
그 말 자체는 길버트도 동의하는 바였다.
뤼팽은 본인을 소개하길 프랑크 왕국에서 건너온 몰락 귀족 출신이라고 했다.
사실상 귀족이란 직위는 허울에 불과하며 사업으로 성공한 평민이나 다름없는 처지다 보니 귀족을 상대해야 한다는 것이 마냥 편하지만은 않으리라.
단순히 귀족을 고객으로 대접하는 것이 아니라 컨설팅.
즉 귀족에게 조언을 해줘야 한다는 뜻이다.
심지어 길버트가 데려온 귀족은 일반적인 하급 귀족도 아니며 무려 하인즈의 자제들 아닌가.
그러니 뤼팽이 제안에 답도 주지 않은 채 잠적해도 조금 실망스러웠을 뿐 딱히 원망하지는 않은 것이었다.
“다만 막연히 고민만 한다고 이리 오래 걸린 건 아니라네. 제단이 막 설립된 시기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거든.”
“그렇다는 건 이제는 여유가 생겼다는 말인가?”
“그런 셈이지. 더하여 자네가 얘기한 귀족 컨설팅의 체계도 갖춰놨고.”
꽤 만족스러운 답에 길버트는 씩 미소를 지었다.
하긴 지금껏 봐온 뤼팽은 고작 이 정도에 겁을 먹고 도망칠 겁쟁이는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덥석 낚아채는 야심가의 기질을 지녔으니.
“좋아. 그렇게까지 자신 있게 얘기하는 걸 보니 한번 믿고 맡겨도 되겠군.”
“당연하지만 이건 자선 사업과는 별개의 영역이라네.”
“그래. 결과만 낸다면야 돈은 얼마든지 내겠네.”
그가 귀족 컨설팅의 최종 목표로 제안한 것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는 귀족 사교계에서의 성공.
둘째는 자본가로서의 성공.
즉 돈과 명성을 동시에 거머쥐도록 도와달라는 어찌 보면 조금 무리한 요구.
하지만 그만큼 성공했을 때의 보상 역시 넘치도록 뒤따라오리란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길버트 그레이스가 누구인가?
당장 혈족 순위가 낮은 방계라 할지라도 그레이스라는 이름이 지닌 파급력은 무시할 수 없다.
그런 대귀족 가문의 서열 3위.
그레이스를 떠받치는 3개의 기둥 중 하나이자 지금은 퇴역했다지만 브리타니아 군의 전설로 추앙받는 대장군.
쉽게 말해 길버트를 인맥으로 만든 것만으로도 충분히 합리적인 거래라 불러도 될 정도였다.
더군다나 귀족 컨설팅이 여기서 끝날 리 없다.
제대로 성공만 거둔다면 입소문이 퍼지며 다른 귀족들도 슬그머니 찾아올 테니까.
그러다 보면 어느샌가 귀족 사회의 중심에 파고들 수 있으리라.
뤼팽이 노리는 것 역시 그러한 효과였다. 지금부터 가장 위대한 영웅을 상대해야 할 그이기에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우호적인 귀족 인맥을 만들어야 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한편 길버트 또한 마찬가지로 나름의 목적이 숨겨져 있었다.
비록 지금은 하인즈의 쌍둥이를 컨설팅 고객으로 추천했지만 사실 그가 진정으로 바라는 컨설팅 대상은 따로 있었으니까.
‘이 녀석의 수완이라면 우리 조카한테도 도움이 되겠지.’
율리아 그레이스.
지금은 마법 아카데미에 다니고 있는 길버트의 하나뿐인 조카.
성실하고 올바르며 지혜로운 아이이지만 그의 형이 워낙 딸바보인 탓에 금지옥엽 키우느라 귀족 정세에 너무 무지한 것도 사실이다.
어느덧 성인이 다 되어가는 나이임에도 사교계에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물론 길버트도 귀족들 특유의 허례허식 가득한 문화가 별로 마음에 들진 않지만 그렇다고 작위를 놓고서 평민으로 살아갈 수는 없지 않은가.
특히 그레이스라는 성을 지닌 이상 좋든 싫든 조카도 귀족으로서의 삶을 배울 필요가 있었다.
‘어떻게 해야 고민하던 참에 마침 잘 됐지.’
너무 비밀스러워서 조금 수상쩍은 면도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뤼팽이 범상치 않은 능력을 갖추고 있음은 분명했다.
이 남자라면 자신의 조카를 믿고 맡겨도 괜찮지 않을까?
그렇다고 섣불리 결정할 수는 없기에 먼저 테스트해보려는 것이었다.
만약 뤼팽이 귀족 컨설팅을 훌륭하게 해낸다면 그때는 자신의 조카를 맡겨도 괜찮으리라.
서로의 생각과 이해가 맞물린 끝에 둘은 손을 맞잡았다.
“그러면 고객분들과 직접 만나서 또 얘기를 나눠봐야겠군.”
“내가 자리를 마련해주겠네.”
“그렇게 하세나.”
***
며칠 뒤 첫 고객들과의 식사 약속 날이 되었다.
그동안 두 사람에 관해 간단히 정보를 수집해 보았다.
스테판 하인즈와 스텔라 하인즈.
쌍둥이 남매로서 나이는 현재 16살이라고 한다.
하인즈 가는 백작 가문으로서 전쟁에서의 공로를 통해 작위를 수여 받았다고 한다.
쉽게 말해 정통성이나 돈보다는 무력에 강점을 지닌 가문이라 보면 편하다.
거기에다 하인즈의 가주인 케이틀린 하인즈는 무려 집행자의 차장으로 활동하고 있을 만큼 뛰어난 무력을 갖추고 있다.
청렴결백하며 올곧은 인물이란 평가를 받지만 그런 성향 때문인지 사교계에 진출해 명성을 쌓는 데엔 큰 욕심이 없어 백작 가임에도 영향력은 그리 높지 않다는 평가를 받는다.
“흠···.”
여러모로 일반적인 귀족과는 다른 모습. 덕분에 어떤 솔루션을 제공해 컨설팅을 설계해야 할지 꽤 고민이 됐다.
일단 내 고객은 엄밀히 따지면 가주인 케이틀린 본인이 아닌 그들의 자녀인 쌍둥이들이다.
따라서 이번 식사 자리에서 충분한 대화를 통해 두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지 파악하고 그에 맞춰 단계를 밟아가야겠지.
예약했던 식당의 방 안에서 두 사람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자 얼마 지나지 않아 한눈에 보기에도 닮은 남녀가 동시에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인사 한번만으로 극명하게 대조되는 두 사람의 성격.
쾌활한 소년과 무뚝뚝한 소녀.
밝은 갈색 머리와 각자의 매력이 잘 드러나는 이목구비를 제외하면 생판 남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이리 와서 앉게.”
“네!”
그래도 지난번 첫 만남 때 간단히 인사를 나눴던 덕분에 그리 어색하지는 않았다.
오늘은 중간에 중재해주던 길버트 없이 셋이서만 만나는 거다 보니 조금 걱정했었는데.
이유라고 한다면 맞은편에 앉아서 싱글거리는 저 녀석 덕분이겠지.
그야말로 친화력 만렙이라 불러도 될 만큼 낯가림이 전혀 없는 듯했다.
오빠 쪽이 스테판.
여동생이 스텔라.
둘의 이름을 다시 한번 되새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얘기를 주도해갔다.
“부디 메뉴가 입맛에 맞았으면 좋겠군.”
“아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 어머니가 요리를 워낙 못 하셔서 음식을 딱히 가리지 않거든요!”
의외의 발언에 묘한 눈길로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하인즈 백작께서 직접 요리를 하시나?”
“네. 다른 집안일은 몰라도 요리는 남에게 맡겼다간 언제 독살당할지 모른다고.”
“흠···.”
내가 떨떠름한 기색을 드러내자 스텔라는 새초롬한 표정으로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어머니는 군인 출신이니까요.”
“길버트 님과 친해진 것도 그래서였고요!”
대충 어떤 느낌인지 감이 잡혀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그런 캐릭터가 있긴 하지.
숨이 턱 막힐 만큼 꼿꼿하게 올곧은 사람 말이다. 부러질지언정 절대 구부려지지 않는 강직함은 장점이면서 단점이기도 하니까.
그런데 막상 아들딸은···.
좋게 봐줘도 딱히 어머니를 닮은 것 같지는 않은데.
그나마 여동생인 스텔라에게서 딱딱함이 느껴지긴 하지만 군인 정신이라기보단 귀족의 프라이드에 가까운 느낌인 거 같고.
“오늘 이렇게 자네들을 부른 이유가 뭔지는 들었을 걸세.”
“그럼요! 저희를 부자로 만들어주신다면서요!”
“누구도 무시하지 못하는 귀족이 되게 해주실 거라 들었어요.”
대답에서부터 남매가 원하는 것이 극명하게 갈림을 눈치챘다.
한쪽은 물질. 다른 한쪽은 명성.
쌍둥이를 갈라놓아 하나씩 줄 수도 없는 노릇이니 결국 둘 다 원한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나쁘지 않다. 오히려 좋았다.
이번 한 번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의뢰를 계속 받으며 ‘귀족 컨설팅’을 입소문 나게 할 생각이니만큼 첫 단추를 잘 끼우는 것이 중요했다.
그런 의미에서 눈앞의 쌍둥이는 최적의 조건을 갖춘 상태였다.
하인즈 가문은 백작가다. 비록 지금은 가주의 무관심으로 귀족 사회에서 변두리로 밀려나 있었지만 몸을 일으키기만 한다면 주변에 끼칠 영향력은 상당할 수밖에 없다.
쉽게 말해 잠재력이 높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걸 얼마나 끌어내느냐는 별개의 문제였다.
무엇보다 귀족 직위가 전쟁의 공로로 받은 명예 작위에 가까워 그 외의 것이 매우 빈약했다.
예를 들어 재력이나 영지 혹은 사병 등등 같은 것들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무작정 명성을 올리고 싶다 해서 쉽게 될 리가 없다.
막말로 뭐라도 가진 게 있어야 그걸 자랑하며 귀족들에게 부러움을 사지 않겠는가?
“지금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사업 모델을 정하는 거라네.”
“사업 모델이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스테판과 눈을 찌푸리는 스텔라.
“저는 천한 장사 일에 손댈 생각 없어요.”
“오해하지 말게. 돈을 벌기 위한 사업이 아니니.”
“그러면요?”
“정확히 말하면 돈은 목적이 아니라 사업 과정에서 뒤따라오는 수반에 불과할 걸세. 이 사업이 성공하면 돈뿐만 아니라 명성 또한 드높여질 테니.”
그제야 들어볼 마음이 생겼는지 슬쩍 상체를 앞으로 숙이는 새침데기 소녀.
“그래서 그게 무슨 사업인데요?”
나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늘은 몸이 좀 안좋네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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