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74
“그러니까···. 네 친구가 되어달라고?”
녀석이 장황하게 늘어놓은 부탁을 한 줄로 요약하여 되물었다.
그러자 놈은 끔찍한 소리를 들은 것처럼 인상을 한껏 찌푸리며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뒈질래?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어!”
“그런 뜻 아니었어?”
“친구인 척 연기하라 했지 누가 너 같은 뺀질이한테 제발 친구가 되어달라 애원했냐고!”
결국 그게 그거잖아.
내가 내용을 제대로 이해한 게 맞다는 사실을 깨닫고서 자연스레 의문이 차올랐다.
대체 왜? 설마 이 녀석한테 이런 부탁을 듣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그것도 심지어 다른 사람도 아닌 당사자의 부모 앞에서 친구인 척을 해달라니.
“최소한 이유라도 알려줘야지. 왜 굳이 너희 집까지 가서 어머님께 나를 친구라고 소개해야 하는 건데?”
부탁을 들어주는 게 물리적으로 어려운 건 아니지만 내가 납득하기 전까진 그냥 들어주기도 애매한 부탁이었다. 멋모르고 친구 관계를 인정했다가 나중에 그게 어떤 식으로 돌아올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하물며 진 그레인저의 가족이라니. 원작에서도 딱히 등장한 적 없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런 뜬금없는 이벤트 역시 작중에서는 전혀 언급된 적 없었고.
그레인저는 머리를 긁적이다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아카데미에서 가정통신문을 보내서 엄마가 저번 사건을 알게 됐어. 심각한 문제인 거 아니냐고 자꾸 물어봐서 네가 내 친구인 척하고 적당히 둘러대란 말이야.”
이윽고 밝혀진 사건의 진실에 의문이 해소되며 황당함이 밀려들었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어? 그걸 사건의 피해자인 나한테 부탁하는 게 맞는 거야?
그나저나 가만 생각하니 왜 이런 장면이 원작에서 나오지 않았는지 짐작이 갔다.
애초에 그레인저가 드래곤을 소환한 것부터가 내 존재로 인해 발생한 나비효과였으니 그로부터 비롯한 가정통신문 역시 마찬가지인 것이다.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했다. 사실 굳이 부탁을 들어줄 이유는 없지만 작중에선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은 그레인저의 가족이 어떨지 호기심이 들었다.
“알았어. 그냥 적당히 편들어주면 되지?”
“그래도 뺀질이라 그런지 이해는 잘하네. 괜히 쓸데없는 소리 지껄이면 뒤진다?”
과연 저게 부탁하는 사람의 태도가 맞는 걸까.
레이첼의 매운맛이라고 평가해도 될 정도의 거친 성질에 혀를 내두르며 뒤늦게 후회했다.
괜히 받아들인 것 같다. 지금이라도 거절하면 받아들여 주려나?
답은 너무나 뻔했기에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
수업을 마친 뒤 약속한 대로 그레인저와 함께 녀석의 집으로 향했다.
단둘이 걷는 하굣길은 생각보다 어색하지 않았다.
“아니. 멍청아! 그냥 언급 자체를 하지 말라고!”
“그럴 거면 나를 왜 부르는 건데? 그냥 깔끔하게 사고였다고 얘기하면 되지!”
“네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건 얘기할 필요 없잖아!”
“나도 엄연한 피해자거든!?”
···대신 의견 차이가 좁혀지지 않아 열이 좀 오를 뿐.
아예 사건에 대해선 언급조차 하지 말고 모른 체하며 둘러대라는 녀석과 그냥 사고였으며 피해자인 내가 용서했으니 괜찮다고 얘기하려는 나의 대립.
물론 주도권은 내 쪽에 넘어와 있었다.
“자꾸 그러면 나 그냥 간다? 그래도 괜찮아?”
“큿···!”
그레인저의 입을 다물게 만드는 데 성공할 때쯤엔 어느새 목적지에 다다른 이후였다.
‘생각보다 소박하네.’
딱히 그레인저라는 가문의 이름을 들어본 기억은 없다.
즉 그냥 평민 출신이거나 귀족이라 해도 명망 높은 가문일 확률은 낮을 것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기 전 뒤돌아 나를 노려보던 그레인저는 잠시 머뭇거리다 경고했다.
“넌 엄마가 묻는 말에만 적당히 대답하면 되니까 쓸데없이 나불거리지 마라. 알겠냐?”
어째서인지 살짝 떨리는 녀석의 붉은 눈동자. 확실하진 않으나 그 속에 담긴 감정은 불안감처럼 보였다.
뒤이어 문이 스르르 열리며 놈은 자신의 귀가를 알렸다.
“엄마. 나 왔어.”
“진. 왔구나.”
안쪽에서 들려오는 차분한 음성에 우리는 그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뒤이어 거실에 앉아 차를 마시는 한 여인을 발견하고는 나도 모르게 감탄이 튀어나왔다.
새하얀 백발이 바닥에 닿을 만큼 치렁치렁 내려와 있었다.
눈을 감고 차의 향을 음미하는 여인은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고풍스러우면서 우아한 미를 드러내고 있었다.
우리의 인기척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리고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는 그녀.
매혹적인 황금색 눈동자가 이쪽을 가만히 응시하더니 싱긋 고이 접어들었다.
순간적으로 두근거릴 만큼 충격적인 미모였다. 정말로 다 큰 자식이 있는 유부녀가 맞는 건지 의문이 들 정도. 알고 보니까 어머님이 아니라 누님이라던가 반전이 있는 건 아니겠지?
“혹시 옆에는 저번에 말했던 그 친구니?”
“응. 얘한테 얘기 들으면 이제 귀찮게 걱정하지 마.”
“알았단다. 귀찮게 해서 미안하구나.”
얘는 자기 엄마한테도 틱틱대는 건 여전하네. 그래도 말투만 조금 그럴 뿐이지 대놓고 성질을 내거나 하진 않는 듯했다. 만약 그랬다면 나한테 이런 부탁을 하지도 않았겠지만.
“친구도 괜히 귀찮게 해서 미안해.”
“아니에요. 어머님이 너무 미인이셔서 오히려 잘 왔다고 생각 중이었던걸요.”
“어머. 그러니?”
진심을 담아 아부의 말을 던지자 옆구리에 느껴지는 따가운 통증.
그레인저가 눈을 부릅뜨며 입 모양으로 살벌한 경고를 던졌다.
‘뒤지고 싶냐?’
살기가 번들거리는 눈빛을 보자니 아무래도 농담이 아니라 진심인 모양이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서 마른침을 삼키던 찰나 다행히 어머님이 타이밍 좋게 먼저 얘기를 걸어오셨다.
“친구는 이름이 어떻게 되니?”
“아 저는 크로 모리스예요. 편하게 불러주세요.”
“···쯧.”
작게 혀를 차며 아쉬워하는 녀석의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크로는 정말 착하고 바른 친구인 것 같구나. 이럴 게 아니라 모처럼 아들의 친구가 놀러 왔는데 대접해줘야지.”
“굳이 신경 안 써주셔도 괜찮아요.”
“괜찮기는. 사실 진이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후로 친구를 데려온 건 이번이 처음이란다. 이런 특별한 날을 기념하지 않으면 안 되잖니?”
이 사람. 상냥하게 웃으면서도 은근히 자기주장이 확고한 타입이네.
그나저나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후 처음이란 건 그전에는 데려온 친구가 있었다는 걸까?
“진. 그래서 말인데 바로 앞 가게에서 케이크 하나만 사 오지 않을래?”
“아 뭘 그렇게까지 해. 얘한테는 그냥 적당히 차나 끓여줘도 충분해.”
“나도 오랜만에 달달한 게 당겨서 그런단다. 안 되겠니?”
“···알았어. 사 오면 되잖아.”
질색하던 그레인저가 순식간에 얌전해졌다. 예상치 못한 모습에 떨떠름히 녀석을 쳐다보고 있으려니.
“고마워! 그럼 엄마는 크로랑 얘기 좀 나누고 있을 테니까 느긋하게 갔다 오렴.”
놈은 눈빛으로 마지막까지 경고를 남기며 집을 떠났다.
그렇게 둘만 남게 된 거실에서 쭈뼛쭈뼛 맞은편 자리에 앉아 어머님과 얘기를 나눴다.
“그 어머님···?”
“어머. 그냥 편하게 누나라고 불러도 된단다.”
아니요. 그랬다간 제가 녀석한테 찢겨 죽을지도 몰라요.
“진한테 얘기는 대충 들었어요. 어머님께서 뭘 걱정하시는지 알겠지만 정말 아무 문제 없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어서요.”
굳이 어물쩍거릴 필요는 없다는 판단하에 미리 준비해둔 얘기를 그녀에게 들려주었다.
쉽게 말해 나는 그 자리에 있던 피해자이며 그날의 일은 모두 사고였고 녀석의 진심 어린 사과를 받고 오히려 친구가 되었다는 적당히 꾸며낸 이야기였다.
일부러 친한 척하느라 어색하게 이름으로 부르는 게 조금 고역이었지만. 나름 깔끔하게 잘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그녀도 내 얘기를 듣고 안심한 모양이었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찻잔을 들어 올리는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보면 내심 긴장했던 걸지도.
“그랬구나···. 정말 다행이네. 혹시 심각한 일은 아닐까 많이 걱정했거든.”
“진도 그것 때문에 어머님이 걱정하진 않으실까 되려 걱정하더라고요.”
“우리 아들을 너무 못 믿은 건가 미안해지네. 사실 당연히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괜히 걱정되더라고.”
의외로 그레인저 가의 모자지간은 매우 돈독한 듯했다. 이런 어머니의 밑에서 어떻게 그런 싸가지가 자랐나 싶을 정도로. 게다가 집에서는 또 순한 양이 되어버리니 황당할 따름이다.
“진이 원래 사교적이고 밝고 모두랑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잖아. 그렇지?”
“···네? 어 음. 그렇죠···?”
내가 아는 그레인저의 성향과는 너무 상반되는 표현들인데.
설마 집에서는 그런 아들인 척 연기해왔던 건가? 그래서 집에 오기 전부터 나한테 그렇게 경고했던 거고?
“게다가 이런 말 하면 좀 꼴불견이긴 해도 내 아들이 덩치도 꽤 있고 남자답게 잘생겼잖니. 그래서 당연히 학교에서도 큰 문제 없이 잘 지낸다고 생각했거든.”
“······.”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아니지.
앞서 언급했던 성격이야 꾸며낼 수도 있고 개인마다 생각의 차이가 있을 테니 그러려니 했는데 외모는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너무 괴리감이 심하잖아.
덩치? 컸다면 애초에 여자처럼 생겼다는 생각도 안 들었겠지. 농담이 아니라 뒤에서 세게 끌어안으면 부서지지 않을까 걱정될 만큼 작고 여리여리한 체구였다. 외모야 입 아프게 떠들 필요도 없었고.
자기 아들을 너무 왜곡된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닐까?
무슨 마음인지 대충 이해는 가지만 좀 지나치다 싶은 생각도 들었다.
괜히 불편한 주제를 계속 이어나갈 필요는 없단 생각에 화제를 돌려보았다.
“그나저나 진은 외동인가요? 누나라던가 여동생이 있으면 어머님을 닮아 예쁠 거 같은데. 하하.”
“······.”
나름 분위기를 풀기 위한 농담이었는데 그녀의 반응이 어딘가 이상했다.
입가에 미소는 그대로였으나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은 느낌. 대답은커녕 아무런 반응도 없이 가만히 나를 응시하기만 하니 오싹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내가 폭탄을 건드린 건가?
애써 당혹감을 잠재우며 우선 자리를 피해야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하 하하! 혹시 진의 방이나 구경해봐도 괜찮을까요!? 남자끼리니까!”
“그러렴. 나는 진이 가져올 케이크에 어울리는 차를 끓이고 있을 테니 여유롭게 구경하다 나오렴.”
“넵!”
허겁지겁 도망치듯 거실을 빠져나와 그레인저의 방으로 피신했다.
방문을 닫고 나서야 긴장감이 쫙 풀리며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나저나···.
방 안이 되게 휑하다. 옷걸이에 걸린 옷들이 아니었다면 빈방으로 착각하지 않았을까.
그야말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가구를 제외하고선 어떤 것도 찾아볼 수 없는 황량한 방 안.
“아.”
그러다 유일한 흔적인 책상 위에 놓인 작은 액자를 발견하고 그리로 다가갔다.
‘가족사진인가?’
사진 속에 있는 인물은 총 세 명이었다.
가운데에서 양옆의 두 사람을 꼭 끌어안고 있는 지금보다 젊은 어머님.
그리고 양옆에 있는 건 상당히 어려 보이는 아이들이었다.
그 사진을 멍하니 바라보다 그냥 넘어갈 수 없는 강렬한 위화감에 멈칫하고 말았다.
‘뭐지···?’
이 사진은 무언가 이상했다.
액자를 들어 올려 더 자세히 확인하려던 순간.
“거기서 뭐 하냐?”
아무런 인기척도 내지 않고 들어온 그레인저가 내 뒤에 서 있었다.
녀석의 시선은 내가 들고 있는 액자에 고정되어 있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조금 늦었어용!
대신 평소보다 분량을 많이 챙겨왔으니 봐주는 거에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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