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76
지나는 내 손길을 받아들였다.
그럼에도 반신반의하는 눈치는 변함없었지만 이전과 비교하면 훨씬 유순해졌다고 봐도 무방하리라.
“그래서 뭘 어떻게 할 생각인데? 방법도 생각 안 하고 그냥 도와준다는 거면 뒤진다.”
음. 유순해졌다고 해야 할까.
틱틱대는 건 오히려 더 심해진 것 같기도 하다.
“일단 어머님의 상태를 정확하게 알아야 해. 대충 예상은 가지만.”
아마 아들을 잃은 충격으로 인한 정신질환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기억과 관련된 해리성 장애와 관련되어있을 확률이 높겠지.
문제는 내가 전문적인 의사가 아니다 보니 정확한 치료법을 제시하긴 힘들다는 거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전문의와 상담을 받으며 약물 치료를 병행하는 거겠지만 지금은 그런 시스템이 잘 구축된 21세기가 아니었다.
역사적으로 정신질환이 체계적으로 연구되고 치료법이 개발된 시점은 비교적 최근이다.
즉 19세기 런던에서 정신질환 환자는 그냥 미쳐버린 광인 정도로 취급될 뿐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차선책이라도 시도하는 수밖에.
전문적인 치료를 할 수 없다면 그녀가 스스로 상처를 이겨 내고 극복할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와주어야 한다.
물론 말처럼 쉽지는 않을 것이다. 정신질환은 단순히 환자가 마음먹기에 따라 완치할 수 있는 가벼운 문제가 아니니까.
하지만 그녀는 선천적인 문제가 아니라 아들을 잃은 슬픔이 트라우마가 되어 마음이 무너진 것에 가까우니 아픔을 딛고 이겨 낸다면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을 거라 믿는다.
그러므로 궁극적인 목표는 어머님이 현실을 마주하도록 도와주는 것.
이런 내 목표를 지나에게도 최대한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 주었다.
“···괜히 그랬다가 지금 상태에서 더 충격을 받으면?”
“그러니까 네 역할이 중요한 거야. 아까 했던 얘기 못 들었어? 어머님께 중요한 건 진뿐만이 아니야.”
그녀는 분명 ‘아이들’ 덕분에 남편을 잃은 슬픔을 이겨 낼 수 있다고 했다.
아들뿐만 아니라 딸도 똑같이 소중하다.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그 사실을 지나는 여태 알면서도 모른 체해왔던 것이다. 아니 어쩌면 정말 몰랐던 걸지도 모르지.
분명 아들을 잃었다는 슬픔은 감당하기 힘들 만큼 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아직 그녀에겐 사랑해 마지않는 딸이 남아있으니 이번에도 분명 이겨 낼 수 있으리라.
심지어 그 딸은 오로지 엄마를 위해 성별까지 바꿔 자신을 지우고 10년 가까이 제 오빠를 연기하며 살아올 만큼 착하고 상냥하지 않은가.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힘들어하시면 네가 옆에서 도와드려야 해. 어머님께 남은 유일한 존재가 너니까.”
그녀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망설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좋아. 그럼 처음에는 내가 천천히 얘기를 꺼내 볼게. 만약 많이 불안해 보이시면 바로 멈출 테니까 네가 진정시켜드려. 한 번에 전부 밝히는 게 아니라 조금씩 단계를 밟아나가는 거야.”
너무 오랫동안 어머님을 혼자 두는 것도 좋지 않으니 슬슬 다시 돌아가야겠지.
간단하게 계획을 세우고 방을 떠나려던 찰나 지나가 내 옷깃을 잡으며 불러세웠다.
“왜?”
“그···. 고맙다고.”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하는 녀석.
이제 보니까 내가 대체 왜 그녀를 남자라고 생각했나 의아할 정도였다.
그야 원작에서 남자라고 등장했으니까 당연히 그런 줄 알았지. 생각해보면 자기가 본인 입으로 남자라 밝히고 교복을 남학생용으로 입고 있을 뿐 공식 설정에서 남자라고 단언한 적은 없는 것 같기도 했다.
설마 남장여자였다니 상상도 못 했다. 원작에선 대체 이런 엄청난 반전을 언제 밝히려고 그렇게 꼭꼭 숨기고 있던 걸까.
‘잠깐만. 그러면 주인공도···?’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1초 만에 고개를 내저었다.
다른 건 전부 제쳐두고 그냥 외모로만 따졌을 때도 레이어드는 무조건 남자가 맞다.
그레인저와 달리 짧은 머리에 남자답게 시원한 인상에다 체격까지 다부지니 여자일 리가 없다.
만에 하나 개연성이 박살 나 주인공마저 남장여자라고 한다면···.
그냥 차라리 정체를 숨긴 채 평생 남자로 살아가길 바랄 것 같다. 그 외모로 여자는 진짜 아니야.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뒤로 한 채 녀석에게 대답해주었다.
“뭘. 친구 사이에 이 정도쯤이야.”
장난스레 던진 농담에 인상을 팍 찌푸리는 그녀.
아무래도 바로 직전에 나를 비웃으며 친구라고 착각이라도 했느냐던 본인의 빈정거림이 떠올라서가 아닐까.
나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뜻으로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준 뒤에 방을 나섰다.
[후후. 후후후···.]
‘뭐예요? 갑자기 나타나선 음침하게 웃기만 하고.’
[아주 만족스럽구나! 네가 너무나 자랑스럽단다.]
‘뭔 소린지는 몰라도 그거참 다행이네요.’
내가 어머님을 도와준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걸까?
역시 조금 별난 구석이 있긴 해도 여신님은 선한 신인 모양이다.
거실로 나와 보니 여전히 자리에 앉은 채 이마를 짚으며 힘들어하는 어머님이 보였다.
“어머님? 괜찮으세요?”
걱정스레 묻자 애써 미소를 지어내는 그녀.
“그냥 가벼운 두통이란다. 가끔 이럴 때가 있어.”
내 뒤를 따라 자리에 앉은 지나는 그런 어머님의 모습을 보는 것조차 불편한지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어떻게 얘기를 시작해야 좋을까. 너무 단도직입적으로 꺼냈다간 방금처럼 패닉에 빠져 악화할 위험이 있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그녀도 인지하지 못하면서 자연스레 딸의 존재를 인식해나갈 필요가 있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본인이 내놓은 대답에 스스로 괴리감을 느끼며 의문을 품는 것이다.
일단 일상적인 이야기를 이어가자. 그러다 기회가 보이면 조금씩 시도해보는 거다.
“그럼 어머님은 진이 아카데미에 있는 동안에는 혼자 쓸쓸하지 않으세요?”
“물론 그렇긴 하지. 그래도 책을 보거나 화단을 가꾸는 데 열중하면 금방 시간이 지나니 괜찮아.”
“그래도 혼자 있으면 외롭잖아요. 혹시 재혼은 생각 안 해보셨어요?”
다소 자극적인 주제에 어머님은 살짝 놀란 눈이 되었고 지나는 옆에서 눈을 부라리며 복화술로 나지막이 경고했다.
“야. 미쳤어?”
“진정해. 이것도 전부 계획이니까.”
“···이상한 소리 하면 진짜 뒤진다.”
다행히 어머님은 그다지 기분이 나쁜 눈치는 아니었다. 오히려 요염한 미소를 띠며 내게 장난스레 물었다.
“어머. 혹시 나한테 관심이 있는 거니?”
“하하···. 컥!”
멋쩍게 웃다 옆구리에 날아온 공격에 헛숨을 내쉬었다. 금방이라도 사람 하나 죽일 듯한 살벌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는 지나.
“미안해서 어째. 지금 나는 누군가랑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은 없어. 아까도 말했지만 나한테는 아이들이···.”
왔다. 정확히 내가 기대했던 대로 흘러간 대화에 예의주시하며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자신의 말에서 위화감을 느꼈는지 중간에 말을 멈추고 인상을 찡그리는 어머님.
하지만 이 정도로는 부족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뒤이어서 끈질긴 유도 끝에 몇 차례 반응을 더 끌어내 보았으나 결과는 비슷했다.
점점 위화감이 커지며 멍하니 있는 시간도 길어지긴 했지만 그마저도 유의미한 변화라고 보긴 힘들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날이 어둑해지고 있는 상황.
아무래도 오늘 당장 해결하기엔 여러모로 무리인 듯했다.
“이제 슬슬 가봐야겠네요.”
“모처럼 왔는데 저녁 먹고 가지 그러니?”
“처음 놀러 오는 건데 식사까지 하고 가면 너무 민폐일 것 같아서요. 다음에 오면 그때 차려주세요.”
“그래. 부담 갖지 말고 언제든지 놀러 오렴. 진 친구가 가는데 앞까지 마중이라도 나가주는 게 어떠니?”
어머님의 잔소리에 툴툴대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지나.
“엄마가 말 안 해도 그러려고 했거든.”
“참. 어릴 때는 안 그랬던 애가 커서는 왜 이리 쌀쌀맞은지.”
“···그게 누구 때문인데.”
작게 중얼거린 혼잣말을 옆에서 들으며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어쩌면 이 녀석이 싸가지 없게 자란 것도 이런 복잡한 가정사가 배경이 된 건 아닐까.
물론 그런 거랑 상관없이 원래 천성이 그랬던 걸 수도 있지만.
아무튼 현관을 나서서 해가 진 저녁거리를 녀석과 단둘이 걸었다.
“···다른 애한테 소문내면 뒤진다.”
“이런 걸 누구한테 말해. 어차피 말해봤자 믿지도 않을걸.”
학년 최고의 천재이자 불량생이 알고 보니 남장여자였다니.
게시판에 대자보로 붙여도 믿는 사람 하나 없지 않을까 싶다.
그 뒤로는 딱히 별말 없이 조용히 길을 걸었다.
참 뭐라 설명하기 힘든 복잡한 분위기가 우리를 감싸고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이렇게 되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었는데. 아마 그건 옆에 있는 그녀도 마찬가지겠지.
“우리 집까지 따라오려고? 너도 이제 돌아가서 쉬어. 많이 피곤할 텐데.”
“하. 역겨우니까 상냥한 척하지 말아 줄래? 뺀질이 주제에.”
“······.”
대체 왜 내가 욕을 얻어먹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나름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내 착각이었던 것뿐인 걸까?
“야.”
“응?”
“···둘이 있을 땐 이름으로 불러도 되니까. 그냥 그렇다고.”
“음. 너도 뺀질이 말고 이름으로 불러주면 생각해볼게.”
내가 싱글벙글 웃으며 말하자 즉시 썩은 표정으로 혀를 차며 뒤돌아 떠나버린다.
나는 그녀의 등 뒤에다 대고 소리쳤다.
“조심히 들어가! 지나.”
그러자 그녀는 우뚝 멈춰서더니 이내 후다닥 달려 도망쳤다.
“뺀질이 주제에···!”
이해할 수 없는 말만 남긴 채로.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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