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8
순간 방 안에 고요한 적막이 감돌았다.
물론 샤론의 말뜻이야 이해한다. 솔직히 나도 우연이라고 생각하니까.
하지만 수녀님이 깊이 고민하며 내린 결론을 너무 대놓고 반박하니 그림이 이상할 수밖에. 본인이 어떻게 생각하든 자유지만 그걸 입 밖으로 꺼내는 건 다른 문제였다.
“네. 그럴 수도 있어요. 아마 우연일 가능성이 크겠죠.”
테리시아는 생각보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자칫 기분이 상했을 수도 있는데 그녀가 자애롭게 넘어가 준 모양새였다.
샤론도 뒤늦게 자신의 말이 지나쳤음을 깨달았는지 살짝 당황해하다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아니에요. 아무렇지도 않은걸요. 보통 그게 정상적인 반응일 테니까요.”
복잡한 감정이 섞인 웃음. 분명 수녀님도 많이 고민했었겠지. 직접 일을 겪은 당사자니 율리아보다 훨씬 내적인 갈등이 심했을 것이다.
“그러면 수녀님은 레이븐이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글쎄요. 다만 평범한 도둑과 다른 건 확실하겠죠. 단순히 돈이 필요해 물건을 훔친 거라면 돈을 굳이 나눠줄 이유도 없을 테니까요.”
반박하기 힘든 논리정연한 주장이었다. 실제로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저 돈을 훔치는 것만이 목적이라면 수고스러운 행동을 할 필요는 없었겠지.
‘설마 여신의 부탁을 받은 거라곤 상상도 못 하겠죠.’
[괴도의 멋짐을 모른다니. 참 불쌍한 녀석들이로다.]
“······.”
수녀님의 대답을 듣고 샤론은 말없이 무언가를 깊게 생각했다.
준비된 질문은 끝이었다. 정보도 충분히 얻었으니 이제 마무리 지을 시간이다.
“오늘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뭘요. 오히려 얘기를 들어줘서 제가 더 고맙죠.”
“혹시 인터뷰 내용을 공개해도 괜찮을까요?”
“네. 그 대신 부탁 하나만 들어주실 수 있나요?”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물론이죠. 저희가 들어드릴 수 있는 선이라면요.”
“제 인터뷰를 사용할 때 아이가 앓았던 병에 관해서도 사람들에게 알려주세요. 그 병이 얼마나 위험하고 아픈지 그러므로 많은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도요.”
율리아의 천사 같은 성격이 어디서 비롯된 건지 알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도 다른 사람을 먼저 걱정하다니. 정말로 대단한 사람이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네. 수녀님도 푹 쉬세요.”
우리는 인터뷰를 끝마치고서 오래된 교회를 나섰다.
아까부터 줄곧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는 샤론. 저 상태에선 굳이 말을 걸어봤자 별 반응이 없을 것 같았기에 조용히 걷기만 계속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응?”
갑작스러운 물음. 나는 당황하여 샤론을 바라보았다.
얘가 나한테 먼저 말을 걸어오는 건 사실상 처음 아닌가? 그런데 뭘 어떻게 생각하냐는 건지 모르겠다.
“뭐를?”
“너도 레이븐이 착하다고 생각해?”
“아. 그 얘기였구나.”
마지막 인터뷰 내용이 아무래도 꽤 신경이 쓰이나 보다.
이걸 어떻게 대답해줘야 좋으려나. 내가 괴도 레이븐인 이상 객관적으로 평가하기란 불가능에 가깝겠지. 그러면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수녀님이 말한 대로면 괜찮을 수도 있다고 봐.”
“그게 기도의 응답 같은 게 아니라 단순히 우연이라 해도?”
“그건 중요한 게 아니지.”
나는 손가락을 휘휘 저으면서 얘기했다.
“때마침 괴도가 놓고 간 돈으로 병든 아이를 치료했다. 그게 기막힌 우연이라고 해도 결국 괴도가 돈을 교회 앞에 놓고 갔다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잖아?”
“그건···.”
“아이의 치료와 별개로 괴도는 분명 선행을 베푼 건 맞다는 거지.”
그냥 원작에 나오는 착한 사람이니까 돈을 주면 알아서 잘 쓰겠거니 줬는데 설마 기가 막히게도 그렇게 이어질 줄은 몰랐다. 그래도 어쨌든 선행을 베푼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괴도는 주인이 있는 물건을 훔쳤어. 그건 나쁜 짓이잖아.”
“맞아. 그건 나쁜 짓이지.”
괴도라는 직업이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다. 아무리 좋게 포장하고 원래 주인을 나쁘게 깎아내려도 결국 남의 재산을 훔치는 건 엄연한 범죄였다.
“나는 모든 걸 흑백으로 나눌 수는 없다고 생각해. 좋은 게 있으면 나쁜 것도 있는 거야. 그리고 사람마다 그걸 판단하는 기준은 다를 수밖에 없고. 누구에겐 레이븐이 나쁜 도둑이 될 수도 있는 거고 반대로 누구에겐 고마운 은인이 될 수도 있지.”
말하자면 괴도 레이븐이란 존재는 흑백 사이에 애매하게 걸쳐있는 회색 존재인 셈이다.
내 생각을 전부 들은 샤론은 고개를 푹 숙이고 땅을 내려다보았다.
곧 그녀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난 역시 인정할 수 없어.”
***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느냐?]
인터뷰를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괴도 레이븐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이제는 내 전용 좌석이나 다름없어진 시계탑의 꼭대기. 이곳에선 브리타니아의 수도인 런던의 전경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샤론은 역시 레이븐을 싫어하는 느낌이었죠?”
[그런 걸 신경 쓰고 있었던 거냐? 네가 스스로 말하지 않았더냐. 평범한 사람이 괴도를 싫어하는 것쯤이야 당연한 일이라고.]
그래. 그렇게 말했었지.
하지만 샤론의 태도는 일반적인 느낌과는 사뭇 달랐다. 단순히 평범한 사람들처럼 범죄자니까 싫다는 수준을 뛰어넘은 것 같은.
“증오 같았거든요.”
증오는 가치관이 아닌 감정의 영역이다. 마치 내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는 듯이 집요하게 추격하고 끝까지 악인이란 생각을 떨치지 못한다.
[그래서 괴로운 것이냐?]
“그 정도는 아니에요. 그냥 신경 쓰이는 정도?”
[네 말대로 사람들의 생각은 저마다 다르다. 그러니 너를 증오하는 아이가 하나 있더라도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
“물론 그렇기야 하겠지만요.”
[그러면 직접 보여주는 건 어떻겠느냐?]
“뭘요?”
[네가 나쁘지 않다는 것을. 다른 도둑들과 달리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말이다.]
참 아리송한 표현이었다.
나쁘지 않은 도둑이라니. 세상에 과연 그런 게 있기나 할까.
그래도 여신님의 의견은 나쁘지 않게 들렸다. 내 활동이 널리 알려지면 알려질수록 사람들은 의아해하며 혼란에 빠질 것이다.
일반적인 도둑과 달리 황금을 탐하지 않는 괴상한 도둑.
괴도 레이븐의 명성은 지금보다 훨씬 퍼져나가 대륙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들겠지.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하다.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가 알게 되리라.
괴도 레이븐의 이름을.
“이제 슬슬 시작하죠.”
난간에서 일어나 목표 지점을 응시했다.
탐욕스러운 부호가 운영하는 사립 미술관. 목표는 ‘폭풍우 치는 밤의 등대.’
오늘은 예고장만 놓고 올 생각이다. 덤으로 가는 길에 주문했던 모조품도 챙겨가야겠지.
시계탑에서 내려와 미술관으로 향했다.
역시 박물관과 비교하면 허술하다 싶을 정도로 느슨한 경계. 딱히 마법을 쓸 필요도 없이 가볍게 잠입에 성공하였다.
예고장은 어디에다 놔둬도 사실 큰 상관은 없다. 어차피 누군가 발견해서 읽고 하루 만에 모두에게 알려질 테니까.
그래도 이왕이면 최대한 눈에 띄게 배치하는 편이 좋겠지.
말하자면 일종의 쇼맨십 혹은 퍼포먼스다. 괴도만의 특색을 살리기 위해선 이런 세세한 점도 꼼꼼하게 신경 써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장인정신인가.
[그래서 어디 놔둘 생각이냐?]
‘저기요.’
[오호라. 그거 재밌겠구나.]
성공만 한다면 예고장만으로 많은 화제를 끌어모을 것이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무리 느슨하다고 할지라도 내부에는 역시 마력 감지기가 부착되어 있었으니까.
‘저걸 무력화시킬 수만 있으면 진짜 편해질 텐데.’
진심으로 트릭을 짤 때 가장 거슬리는 방해물이다. 저 기계만 없애면 마법을 이용해 훨씬 눈에 띄면서 다채로운 트릭을 선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 마녀한테 물어보면 되는 거 아니더냐?]
‘아무리 그래도 마녀 씨한테 그런 물건까지···. 어쩌면 있을 수도.’
원작에서 보여주었던 경이로운 장사 수완을 생각하면 충분히 있을 법했다. 진짜 나중에 시간 될 때 들러서 확인해봐야겠는걸.
아무튼 지금 당장은 무리였기에 마법을 쓰지 않고 손수 움직여서 예고장을 놔둘 수밖에 없었다.
참고로 내가 노리는 목표는 바로 조각상이었다.
정확히는 하늘을 향해 손을 뻗는 조각상의 손에다 예고장을 들려주려는 것이다.
그 퍼포먼스 하나를 위해 지금 나는 천장에 매달려 움직이고 있었다.
‘윽···! 이게 뭔 개고생이야!’
[원래 예술은 고통이 수반되어야 하는 법이다.]
‘도와주지도 않을 거면 조용히 계세요!’
[흥. 옆에서 응원해주는데도 잔소리질이라니. 실망이구나.]
갑자기 왜 또 츤데레 모드가 됐대. 아무튼 여신님의 쫑알거림을 애써 무시하며 스파이더맨처럼 천장을 기어서 이동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기척을 내지 않는 한 굳이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볼 사람은 없다는 거겠지. 게다가 지금은 관람객도 받지 않고 소수의 경비만 돌아다니는 야밤 시간대니까.
‘후! 성공!’
무사히 조각상의 손에 예고장을 꽃은 다음 유유히 미술관을 빠져나왔다.
“아이고 허리야.”
[저런. 허리는 남자의 생명이거늘. 앞으로 여러 부인을 다스려야 하니 소중히 여기도록 하려무나.]
“시끄러워요. 제발.”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사실 괴도 레이븐 말고 나쁘지 않은 도둑이 또 있답니당!
과연 누굴까용?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