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81
이어진 점심시간.
우리 반은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휴식의 달콤함을 마음껏 즐겼다.
축구에서 우승을 거머쥔 덕분에 현재 점수는 당연히 1등. 오후에 큰 이변이 없는 이상 유력한 1학년 우승 후보까지 올라온 상태였다.
이런 성과를 거두게 해준 첫째 공로자는 당연하게도 레이어드였다.
큰 키와 탄탄한 몸매 남자답게 시원한 호감형 외모 특별히 모나지 않고 모두에게 친절한 성격으로 원래부터 반의 중심에 있던 녀석. 쉽게 말해 남자 버전 율리아라 봐도 무방했다.
그러니 자연스레 축구에서의 활약상으로 모두의 관심을 끄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특히 여자애들의 시선에서는 꿀이 뚝뚝 떨어지는 수준. 누가 주인공 아니랄까 봐 참 대단한 광경이었다.
나야 평소와 똑같이 늘 어울리던 애들만 곁에 있었지만.
사실 이것만 해도 어디인가? 처음 입학했을 때는 정말 아무도 내 이름조차 모를 정도로 심각한 아싸였는데.
“크로. 완전 멋있었어!”
그런 내 마음을 눈치채기라도 했다는 듯이 상냥한 말을 던져주었다.
그러자 레이첼도 평소답지 않게 순순히 칭찬을 건넸다.
“좀 하던데? 마지막 골은 솔직히 인정.”
그리고 과묵하던 샤론조차 입을 열었다.
“수고했어.”
거창한 감상평은 아니어도 나름 진심이 배어든 말처럼 들렸기에 솔직히 기분이 좋긴 했다.
그래. 이게 어디냐.
원래 친구란 좁고 깊게 사귀어야 하는 법이다. 절대 인싸가 되지 못한 아싸의 합리화가 아니란 말이다.
그때였다.
“저기 잘 봤어···!”
내게 총총 다가와서 쑥스러워하며 말을 거는 여학생.
이전까지 단 한 번도 대화를 나눠본 적 없던 같은 반 아이였다.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조금 당황하면서 떨떠름하게 말을 받아주었다.
“어 응. 고마워.”
“그 마지막에 멋있었어···!”
자기 할 말만 남긴 채 쌩하니 사라져버리는 상대방.
그러니까···. 저 친구 이름이 뭐였더라? 하도 교류가 없다 보니 같은 반 아이인데도 이름이 금방 떠오르질 않았다.
그 뒤로도 점심시간 동안 몇 차례 비슷한 구도가 반복되었다. 남녀 비율을 따지면 반반 정도로 골고루 내게 다가와서 한마디씩 건네고 사라지길 몇 번.
이제는 나름 익숙해져서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래도 마지막에 골을 넣었던 게 나름 인상에 남았던 모양이다. 확실히 내가 생각해도 꽤 극적인 타이밍에 들어간 골이라 임팩트가 있긴 했으니까.
설마···. 나 이러다 인싸가 되어버리는 건가?
벌써 김칫국을 시원하게 마시고 있던 와중 왠지 싸늘한 한기가 느껴져 뒤를 돌아보니 탐탁지 않은 눈빛을 보내는 여자애들이 있었다.
“좋겠네? 축구로 인기도 많아지고.”
“입꼬리가 올라간 것 좀 봐. 그렇게 좋아?”
여기서 긍정해버리면 끔찍한 최후가 기다리고 있으리란 직감이 들었다.
재빨리 손을 좌우로 흔들며 격렬하게 부정했다.
“아니. 이런 걸로 좋아할 리가 없잖아!”
“웃기시네. 여자애들이 멋있다고 하니까 좋아 죽으려 하더만.”
“누가 들으면 여자애들만 온 줄 알겠네. 남자애들도 똑같이 왔거든?”
내 반박에 율리아는 충격을 먹은 표정으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설마 남자한테 설렌 거야···?”
“···대체 왜 얘기가 그렇게 되는 건데.”
미치고 환장하겠다. 어쩌다 내가 게이 취급까지 받게 되었단 말인가.
이 자리에서 맹세컨대 나는 살면서 단 한 번도 남자에게 설레본 적 없다.
···음. 솔직히 지나를 처음 봤을 땐 조금 두근거리긴 했지만 걔는 결국 남장여자라고 정체가 밝혀졌으니 노카운트다.
내가 필사적으로 억울함을 어필하고 있던 와중 조용히 있던 샤론이 이쪽을 힐끔 바라보다 툭 폭탄을 터뜨려 버렸다.
“그러고 보니 아까 축구 할 때.”
“응? 그때 왜?”
“앞에서 너랑 레이어드가 잘 어울린다고 누가 그랬어.”
“······.”
누구냐. 대체 누가 그런 끔찍한 발상을 떠올린 거냐고!
“아까 너한테 처음 왔던 애야.”
걔였냐! 수줍게 다가와서 얘기하는 기억 속 모습과 괴리감이 너무 심했다.
그런 쪽에 취향을 가진 여자애가 실제로 있을 줄이야. 솔직히 좀 충격이었다.
충격에 휩싸여 멍하니 있던 가운데 레이첼이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
“와···. 너 그런 취향이었냐?”
“아니거든.”
“씁. 수상한데. 생각해 보니까 좀 이상하긴 했어. 우리같이 예쁜 미녀들이랑 같이 다니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게 말이 안 되잖아.”
이제 더는 반박하기도 지친다. 내가 한 일이라곤 축구에서 열심히 뛴 것뿐인데 신께서는 왜 이런 시련을 내려주는 걸까.
[음? 불렀느냐?]
‘···아니요.’
이해했다. 신이란 존재가 이렇게 글러 먹었으니 세상도 망할 수밖에.
부조리한 현실에 절망하고 있으니 그제야 여자애들도 내 눈치를 살피며 장난을 그만두었다.
그렇게 점심시간이 끝나고 다시 시작된 체육 대회.
오후 일정은 달리기를 비롯해 다양한 종목이 준비되어 있었다. 한번에 다섯 반이 전부 참여하다 보니 오전의 축구보다 훨씬 템포가 빠르게 진행됐다.
당연히 우리 반의 대표 선수는 레이어드였다. 오전에 그렇게 뛰어놓고도 전혀 지친 기색 없이 쌩쌩한 모습을 보면 기가 찰 정도였다. 괜히 주인공이 아니란 건가.
“이미 우승은 확정인 것 같은데.”
“우승하는 건 좋은데 너무 압도적으로 잘하니까 재미가 없네.”
그런 말이 나올 만큼 레이어드의 독주는 끝날 줄 모르고 이어졌다. 이쯤 되면 녀석을 상대하는 다른 반 선수들이 불쌍해질 지경.
이런 사태를 방지하려면 애초에 중복 참전이 불가능하도록 막아놨어야 할 텐데 제대로 각 잡고 준비한 대회도 아니고 조촐한 운동회 수준에서 그런 것까지 일일이 신경 쓸 리가.
게다가 중복 참전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이렇게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출전할 거라곤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으리라. 일반인의 체력으론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너무 일방적이다 보니 흥미도 떨어지고 어차피 다음 경기도 레이어드가 나가서 학살하겠거니 지레짐작하던 중.
“응? 여자종목?”
여학생만이 출전 가능한 단거리 육상이 다음 종목이었다.
“어떻게 해?”
우리 반은 혼란에 휩싸였다. 너무나 당연시 여겨지던 레이어드의 출전이 막혀버렸을 때의 다음 플랜을 생각해두지 않았던 것이다.
오죽했으면 레이어드를 여장시켜 보내야 한다는 주장이 튀어나올 정도였다. 당연히 율리아의 선에서 단호하게 기각되고 말았지만.
결국 유일한 방법은 현실을 수긍하고 출전할 여학생을 뽑는 수밖에 없었다.
의외로 의견은 막힘없이 하나로 모였다.
“하? 내가 왜?”
문제는 장본인이 전혀 내키지 않아 한다는 것뿐.
레이첼은 팔짱을 끼며 시큰둥한 태도로 대답했다.
“귀찮아. 어차피 내가 안 나가도 우승은 거의 확정이잖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워낙 벌어둔 점수가 많아서 고작 한 경기 망친다고 크게 문제 될 리는 없었으니.
“그래도 확실하게 해야지. 뭣보다 이왕 하는 거 이기면 좋잖아?”
“내가 나간다고 무조건 이기리란 보장이라도 있어?”
“음···.”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게 보장해도 될 만큼 레이첼의 피지컬이 우수하긴 했다.
레이어드와 달리 그녀의 전투 방식이 신체 능력과 깊은 연관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냥 순수하게 운동 신경이 좋은 이들이 있지 않은가. 레이첼이 정확히 그런 부류였다.
아마 마법이 아니라 체육 쪽으로 진로를 정했어도 대성하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이제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얼른 트랙으로 가서 준비하지 않으면 실격패 될 가능성도 있었다.
“크로. 네가 설득해봐. 네 말은 잘 듣잖아.”
“···쟤가?”
금시초문인데. 오히려 누구보다 내 말을 제일 안 듣는 녀석이라고.
뭐라 항변하고 싶었으나 율리아에게 떠밀려 어쩔 수 없이 레이첼의 앞에 섰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빛이 마치 포식자가 사냥감을 지켜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크흠. 한번 헛기침을 한 뒤 최대한 자연스레 부탁해보았다.
“그 레이첼? 눈 딱 감고 한 번만 뛰어주면 안 될까?”
“알았어.”
“물론 싫을 수 있지. 그래도···. 응? 뭐라고?”
“알았다고.”
예상과 달리 너무나 쉽게 튀어나온 수락의 답변에 어리둥절하며 눈을 깜빡였다.
아니 이렇게 흔쾌히 받아들일 거면 아까까지 뭐하러 튕긴 거야?
이해가 안 되는 상황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찰나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털며 말했다.
“대신 이걸로 빚은 갚은 거다.”
“빚?”
“그럼 이 누나가 갔다 올 테니까 열심히 응원이나 하라고.”
빚이라니. 아무리 기억을 되새겨도 떠오르지 않아 패닉에 빠지고 말았다.
그냥 농담으로 꺼낸 말인가? 아니면 나도 모르는 새에 또 뭔가를 저질러버린 건가?
레이첼이 직접 알려주지 않는 이상 결코 찾을 수 없는 문제를 가지고 끙끙대기를 한참 트랙에 선 그녀는 가볍게 몸을 풀고는 누구보다 빨리 달려 결승선을 통과했다.
그와 동시에 우리 반의 우승이 확정되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서 마침내 체육 대회를 폐회할 시간.
모두가 그토록 궁금해하던 특별한 보상이 체육 선생님의 입을 통해 정체를 드러냈다.
“오늘의 우승 상품은 바로···!!”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뮹뮹인 거에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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