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84
어두운 밤을 비추는 은은한 달빛.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아있는 거대한 철의 구조물.
그 앞에서 한 금발의 여인이 테이블에 앉아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눈을 감고서 기분 좋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그녀. 한밤중이란 것만 제외하면 한 폭의 그림같이 아름다운 티타임 장면처럼 보였으리라.
다만 그 풍경 가운데서 한 가지 더 이질적인 요소가 있다면.
테이블 위 찻잔 옆에 놓인 영롱한 수정구슬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예언의 마녀는 차를 마시면서 한 번씩 구슬을 힐끔거린 뒤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그러기를 잠시 반대쪽 비어있던 의자에 누군가 다가와 자연스럽게 착석했다.
차를 마시던 금발 여인과 비교해도 전혀 꿀리지 않는 붉은 웨이브 머리의 미녀였다.
“이 나라도 오랜만에 와보네.”
“항상 그 답답한 가게에만 틀어박혀 있지 말고 가끔은 나와서 여유를 즐기는 게 어때요? 남은 시간도 거의 없는데 최대한 즐겨야죠.”
오자마자 쏟아지는 잔소리에 마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반응이 재밌다는 듯이 쿡쿡 웃던 예언의 마녀가 눈을 게슴츠레 뜨며 말했다.
“거짓말을 잘하시던데요.”
“···뭘.”
“시치미 떼실 생각이에요? 학회에 대해 모른다고 그를 속였으면서.”
마녀는 대답하지 않고 자신의 앞에 놓인 차를 홀짝거렸다.
예언의 마녀가 말한 대로였다.
그녀는 마도공학회가 어디에 있는지 잘 알고 있다. 애초에 처음 소개해주고 멤버십 가입을 제안한 것도 그녀였으니까.
“다른 방법이 없는걸.”
“저도 당신을 탓하려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잘 선택했다고 칭찬 드리고 싶은걸요.”
호의적인 말에도 불구하고 마녀의 표정은 상당히 어두웠다. 마치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고 있다는 것처럼.
예언의 마녀는 찻잔을 내려놓고 수정구슬에 손을 뻗으며 중얼거렸다.
“이제부터 시작이네요. 과연 괴도 씨는 자신에게 닥칠 운명을 바꿀 수 있을까요? 아니면 결국 예언대로의 최후를 맞이할까요.”
“······.”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종말의 마녀.”
눈을 내리깐 붉은 머리의 여인.
종말의 마녀는 끝내 아무런 답을 내놓지 못했다.
***
일단 무작정 마도공학 정거장까지 와버렸다.
문제는 수중에 티켓이 없다는 것. 여태까지는 마녀의 가게에서 값을 내고 받아왔었는데 오늘은 어째선지 문을 닫아놓고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여태껏 단 한 번도 그녀가 가게를 닫은 모습은 보지 못했었는데. 특별한 이유도 적어놓지 않은 채 사라져버리니 살짝 걱정되기도 했다.
그래도 아마 별일 아니겠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마녀이지 않은가. 내가 그녀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만큼 우스운 일도 없으리라.
그보다는 여기에 집중하기도 벅찬 상황이었다. 마녀의 도움 없이 티켓을 구해야 열차에 탑승할 수 있을 텐데 그 방법을 도무지 모르겠다는 사소한 문제에 봉착해 있었으니까.
아니 상식적으로 정거장에 매표소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억울한 마음을 담아 주변을 두리번거려도 광활한 정거장은 벤치를 제외하곤 텅텅 비어 있었다.
한숨을 내쉬며 그나마 유일한 구조물인 열차 노선도나 구경했다.
과연 일반적인 열차와는 궤를 달리한다는 건지 국경을 초월해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는 노선.
그렇지만 지금은 아무 의미도 없는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차라리 무임승차를 해볼까? 다소 황당한 계획이었으나 곰곰이 생각할수록 꽤 그럴듯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어차피 지난번에 보니까 열차에 승무원이 따로 배치되어있는 것도 아니고 티켓을 사용해야 열차의 문이 열리는 구조이긴 했지만 그거야 내 마법을 사용하면 가뿐하게 넘어갈 수 있었다.
만에 하나 무임승차가 문제가 된다 해도 오히려 그걸 역이용해 학회 측과 만나는 기회로 써먹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티켓값이야 나중에 얼마든지 배상하면 그만이니까.
“진짜 괜찮은데?”
괜찮은 수준이 아니라 지금 당장으로선 이보다 더 나은 방법이 없어 보였다.
조금 과격한 수단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원래 혁신에는 과감한 결단이 필요한 법이다.
좋아. 해버리자.
그렇게 결론을 내린 뒤 열차가 정거장에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잠시 후 저 멀리 터널에서부터 마도공학 열차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을 발견했다.
언제 봐도 참 매력적인 디자인이었다. 특히 마도공학을 상징하는 태엽 위의 마법진은 볼 때마다 감탄이 나올 지경.
천천히 속도를 줄여나가던 열차는 정거장 앞에서 완전히 정차했다. 역시 저번과 마찬가지로 개찰구에 티켓을 넣기 전까진 문이 열리지 않는 듯했다.
“흠···.”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미리 준비해두었던 마법을 사용했다.
이걸 여기서 사용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체내의 마력이 쑥 빠져나가며 마법이 시전되자 천천히 내 몸이 압력기로 꾹 누른 것처럼 두께가 얇아져 갔다.
이윽고 완전히 2D 종이 인형이나 다름없게 변해버린 내 모습을 잠시 만족스럽게 내려다보았다.
이게 바로 괴도의 트릭이지.
열차 문의 틈을 잠시 눈대중으로 살피다 조심스레 팔부터 집어넣었다. 종이처럼 얇아졌는데도 비좁다고 느껴질 만큼 빡빡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못 들어갈 정도는 아니었다.
“됐다···!”
결국 무사히 무임승차 하는 데 성공했다.
이걸 뿌듯해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 하는 건지 헷갈렸으나 그런 사소한 문제는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열차 안은 텅텅 비어있었다. 만약 안에 손님이 있어서 내가 하는 짓을 실시간으로 지켜봤다면 상당히 민망했으리라. 생각만 해도 끔찍한 광경이었다.
티켓이 없으니 당연히 지정 좌석도 없다. 어차피 남는 게 자리다 보니 적당히 근처에 있는 창가 자리에 털썩 앉아 기지개를 쭉 켰다.
[참 뻔뻔하구나. 이리도 서슴없이 범죄를 저지르다니.]
“애초에 괴도 짓도 범죄거든요?”
[흠. 반박할 수가 없군.]
당연히 못 하겠지. 사실이니까.
애초에 여신이 먼저 범죄를 제안한 순간부터 그녀가 내 행동에 뭐라 딴지를 걸 대의명분은 존재하지 않았다.
첫 단계는 무사히 넘겼으나 아직 끝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부터가 진짜 막막한 단계라고 봐야 할 것이다.
잊을 수 없는 특이한 행색의 카우보이를 만나야 한다. 하지만 그가 과연 언제 어디에서 탑승할지는 전혀 알지 못한다. 오늘 하루종일 기다려도 못 만날 가능성이 훨씬 클 것이다.
물론 그가 아닌 다른 승객이 탑승할 수도 있으니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단 이렇게라도 시도하는 것이 훨씬 낫겠지. 부디 학회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을 만나야 할 텐데.
일이 잘 풀려서 어찌어찌 학회와 연이 닿는다면 그 이후부터는 어떻게 해야 할까?
또 거기서 끝이 아니라 내가 바라는 이동 수단을 얻어내기 위한 협상 과정도 순탄하게 풀리리란 보장은 없었다.
참 산 넘어 산이구나. 절로 막막함이 들어 한숨을 푹 내쉬던 찰나 창밖에 펼쳐진 풍경은 잠깐이라도 그런 상념을 씻어내게 해주는 청량함을 가득 담고 있었다.
푸르게 펼쳐진 하늘과 새파랗게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바다인지조차 헷갈릴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에 작게 감탄하며 창밖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벌써 브리튼의 해안선을 넘어 프랑크 왕국을 향해 바다를 횡단하려 하고 있다.
프랑크의 파리는 가봤지만 그 이상은 가보지 못했기에 오랜만에 여행하는 기분으로 두근거림을 느꼈다.
그런데 이 열차는 종점이 어디였더라? 아까 정거장에서 봤던 노선도를 떠올리려 했지만 그때는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시간만 때웠던 터라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열차 안에 노선도는 안 나와 있나? 자리에서 일어나 노선도를 찾으려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달리는 열차에서 일어나면 위험할지도 모른다네.”
“으헉!”
갑자기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비명을 삼키고 말았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언제부터 저기에 앉아있던 거야? 건너편 자리에 앉아서 여유롭게 신문을 읽고 있는 사내의 모습을 확인한 나는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곳엔 내가 찾아 헤맸던 카우보이 복장에 가면을 쓴 남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보는군. 그동안 잘 지냈나?”
“···네. 그쪽도 지난번과 똑같은 걸 보니 잘 지낸 것 같네요.”
“뭐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
지금 봐도 참 의문투성이에 수수께끼 같은 남자였다. 대체 뭐 하는 사람일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그보다 지금 제일 중요한 건 이거였다.
“언제부터 거기 계셨던 거예요? 분명 처음에는 없었는데···.”
“이런. 질문이 조금 잘못된 것 같군.”
질문이 잘못됐다고? 그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 카우보이는 신문을 접으며 내 쪽을 빤히 응시하기 시작했다.
“언제부터 여기 있었냐가 아니라 왜 여기에 있는 거냐고 물어봤어야지.”
“···네? ···왜 여기 계신 건데요?”
왠지 모를 불길함을 느끼며 떨떠름하게 묻자 그는 낮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야 자네가 무임승차를 하지 않았나.”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그냥 콜라보다 제로콜라가 맛있어용..!
그냥 콜라는 끈적끈적한 설탕물이에용!!
다들 깔끔하고 건강에도 좋은 제로콜라를 마시도록 하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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