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85
등골이 오싹해졌다.
내 감각을 피해 옆자리에 앉아있던 걸로도 모자라 내가 한 짓까지 전부 알고 있다니.
그렇다는 건 눈앞의 사내가 평범한 인물은 절대 아니라는 뜻이겠지.
아마 이 열차와 관련된 존재 즉 내가 찾던 사람일 가능성이 매우 컸다.
가면을 쓰고 있어 표정을 읽을 수 없으니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일단 정중하게 사과부터 하자. 뭐가 됐든 티켓 없이 무임 승차한 것은 잘못이 맞으니까.
“죄송합니다. 변명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돈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라 티켓을 구하는 방법을 몰라서 불가피하게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배상이라면 얼마든지 하겠습니다.”
“흠.”
돌아온 것은 의미심장한 감탄사뿐이었다.
뭔가를 더 원하는 건가? 반응이 시원찮은 탓에 살짝 불안함을 느끼며 구구절절 사연을 덧붙였다.
“사실 제가 이번에는 단순히 열차를 이용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이 열차를 관리하는 마도공학회와 비즈니스적인 얘기를 나눠보고 싶어서···.”
“지난번 열차에 탑승할 땐 어떻게 티켓을 구했었나?”
말을 끊고서 훅 들어온 질문에 살짝 머뭇거리다 솔직하게 대답했다.
“마녀에게 샀습니다.”
“과연.”
의외로 별다른 반응 없이 순순히 납득하는 듯한 상대.
마녀의 가게에 대해 알고 있어서 그런 건가?
하기야 마녀의 가게가 많이 안 알려져 있다 해도 알아내면 목숨이 위험해지는 식의 엄청난 비밀까지는 아니니까. 그보단 아는 사람만 아는 숨겨진 맛집 같은 느낌에 가까웠다.
카우보이 사내는 혼자 고개를 끄덕이다 대뜸 내게 물었다.
“자네는 괴도 레이븐이 맞나?”
“···어. 음. 그게.”
뭐지. 너무 허무하게 정체를 들켜버리니 오히려 위기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설명하기 어려운데 말하자면 개꿀잼 몰카에 당해버린 것 같달까.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흘러나올 지경이었다. 이렇게 쉽게 들킬 거면 정체를 숨기려는 노력도 아무 의미 없는 거 아닌가?
이미 상대는 내 정체를 확신하는 듯했으니 인제 와서 발뺌해봐야 별 소용이 없어 보였다.
“네. 어떻게 알아차리신 거죠?”
“그건 비밀일세. 대신 힌트를 주자면 지난번에 처음 마주쳤을 때부터 짐작은 하고 있었지.”
그러고 보니 이 남자를 처음 만났을 때가 새록새록 떠올랐다.
분명 뤼팽의 모습으로 변장하고 있었는데도 단번에 내 본모습을 꿰뚫어 봤었지.
어쩌면 상대의 본질을 파악하는 특수한 능력이 있는 게 아닐까?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럼 그쪽은···.”
“편하게 기관장이라 부르게.”
기관장. 그 호칭이 수수께끼 같던 사내의 정체를 단번에 밝혀주었다.
그와 동시에 왜 아무도 없는 열차 안에 그가 탑승해 있는지 내가 무임승차 했다는 사실을 너무나 당연하게 눈치챈 것인지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피어나는 의문도 존재했다.
“저번에는 중간에 내리시지 않으셨나요? 분명 프랑크푸르트에서···.”
“음. 그거야 손님인 척하려 적당히 지어낸 말이었지. 어차피 자네는 파리에서 내렸으니 내 거짓말을 눈치챌 리도 없으니.”
“아하.”
하기야 내가 먼저 열차에서 내렸으니 상대가 어디에서 내렸는지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단지 그와 얘기하면서 목적지가 프로이센이라 했으니 당연히 그럴 것이라 믿었을 뿐.
순간 대화가 끊기면서 살짝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아차. 이럴 게 아니라 얼른 돈부터 건네줘야지. 얼마든지 배상하겠다는 얘기는 빈말이 아니었기에 실제 티켓값보다 훨씬 넉넉하게 돈을 챙겨왔었다.
“얼마로 드리면 될까요? 티켓값에 사죄하는 마음으로 더 얹어서 드리겠습니다.”
“딱히 그럴 필요는 없다네.”
“···네? 필요 없다고요?”
이건 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이었기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기관장을 쳐다보았다.
“아까 자네가 말하지 않았나. 돈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라 티켓을 구하는 방법을 몰라서 그런 거라고.”
“그랬었죠. 근데 그게 무슨 문제라도 되나요···?”
“똑같은 얘기라네. 우리가 티켓을 파는 건 돈보다도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한테만 판매하거든.”
자격이라니. 그러니까 급이 맞는 손님만 태우겠다는 건가?
정확히 어떤 조건으로 자격이 정해지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범죄자는 탈락이겠지. 하물며 일반 도둑도 아니고 사회에 대혼란을 일으키는 괴도라면 절대 받아들여 주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마녀는 자격을 갖췄다는 거야? 솔직히 말해서 마녀도 일반적인 인식이 좋은 편은 절대 아닐 텐데. 당장 마녀사냥이란 단어가 어떤 뜻인지만 생각해도 느낌이 오지 않는가. 괴도나 마녀나 도긴개긴 수준이었다.
나는 진심으로 궁금해져서 기관장에게 물어보았다.
“어떤 자격인가요?”
“음. 얘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일단 자리에 앉지.”
우리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는 텅 빈 열차 칸. 저번처럼 같은 좌석에 붙어 앉았지만 분위기는 그때와 사뭇 달랐다. 당시에는 그냥 특이한 손님 정도로 생각했기에 그가 말을 걸 때마다 귀찮기만 했는데 지금은 상황이 역전되어버렸다.
“우선 자네의 얘기를 먼저 듣고 싶군. 아까 듣자 하니 학회와 비즈니스적인 얘기를 나누고 싶다 했나?”
“네. 이미 제 정체까지 들켰으니 그냥 솔직하게 말하죠. 저는 괴도로 활동하는 동시에 재단도 운영하고 있어요. 그런 입장에서 마도공학은 지금 이렇게 몇몇 특정 소수만 사용하기엔 너무 아까운 기술이란 생각이 들었거든요.”
나름 진지하게 얘기한 거였으나 기관장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괴도가 그렇게 말하니 참 아이러니하구먼.”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도 이건 진심이에요. 제가 괴도로 활동하는 데도 말 못 할 사정이 있다고요.”
“물론 그렇겠지. 나도 자네의 말을 믿네.”
전혀 안 믿는 눈치인데. 그래도 어쩌겠나. 사실 저런 반응이 당연한 것을.
반대로 내가 그의 입장이었어도 똑같이 코웃음 치며 비웃었으리라.
“거기에 더해 겸사겸사 제가 괴도로 활동하면서 발생하는 공간적 제약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조금은 있고요.”
“브리튼 내에서만 노니 근질근질한가? 하긴 세계에 보물이 얼마나 많은데 고작 한 나라에서만 만족하긴 힘들겠지.”
“···역시 힘들까요?”
도둑질을 위해 기술을 쓰게 도와달라니. 내가 말하고도 이처럼 뻔뻔한 요구가 또 어디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기관장은 불쾌한 티를 보이긴커녕 씩 미소를 지었다.
“낭만 넘치는군. 나는 응원해주고 싶다네. 원래 세상에는 이런 사고뭉치도 한둘 있어야 살아가는 재미가 있는 법이니까.”
“그럼 받아들여 주시는 건가요?”
이유가 조금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긴 하지만 뭐가 됐든 상대의 반응이 긍정적이라는 것은 아주 좋은 신호였다.
“미안하네만 나는 그 정도의 결정권은 없어. 어디까지나 열차를 움직이는 기관장에 불과하니까. 학회에 가서 부회장을 만나 직접 얘기를 건네는 편이 빠를 거야.”
부회장이라. 살짝 아쉽긴 해도 이것만으로 어딘가. 처음 어떻게 할지 몰라 막막했던 것보단 지금이 훨씬 나은 상황이었으니.
“물론 그 전에 자격부터 검토받게 되겠지만.”
“···아까도 말씀하시던데 대체 자격의 기준이 뭔가요?”
“아주 간단해.”
그는 잠시 멈칫했다 천천히 얘기했다.
“한 소녀를 죽일 수 있는가.”
“······네?”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소녀를 죽이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존재인가. 그것이 바로 자격 조건이라네.”
말뜻을 이해하고 나자 기분 나쁜 불쾌함이 온몸을 뒤덮었다.
사람을 죽이라고?
그것도 여자아이를?
만약 농담이었어도 그냥 넘어갈 수 없었겠지만 그렇게 말하는 기관장의 목소리는 장난기 하나 담겨있지 않은 진지한 어투였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 했다.
마도공학회가 얼마나 능력이 뛰어나든 간에 이런 사이코 집단이란 것을 알았다면 처음부터 엄두도 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움직이기도 전에 그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자네의 여신도 그 소녀의 죽음을 바라고 있을 걸세.”
“···뭐?”
아니 어떻게···.
지금껏 수많은 사람을 상대해왔지만 여신님의 존재를 눈치챘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호수의 정령과 같은 초월자가 아닌 이상 그 어떤 강자라도 예외는 없었다.
그렇다면 눈앞에 있는 기관장은 대체 어떤 존재란 말인가?
그보다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여신님도 소녀의 죽음을 바란다니. 그게 대체 무슨···.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얘기에 나는 여신님에게 직접 물어보려 했다.
‘여신님? 저게 무슨 소리예요? 아니죠? 그냥 헛소리잖아요. 네?’
[···나는 네게 선택을 강요하지 않는다. 네가 하기 싫다면 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빙빙 돌리지 말고 정확히 얘기해주세요. 정말로 저 말이 맞아요? 여신님도 제가 누군가를 죽이길 바라냐고요!’
여신님은 한참 동안 침묵을 유지하다 나지막이 대답을 내뱉었다.
[···그래. 그 말대로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늘 저녁으로 김치찜을 먹었어용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