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9
“왔군. 기다리고 있었다네.”
예고장을 미술관에 놔둔 뒤 모방꾼의 지하로 향했다.
“그림은 완성되었나요?”
“물론. 직접 보게나.”
그의 곁으로 다가가 캔버스에 그려진 ‘폭풍우 치는 밤의 등대’를 바라보았다.
“어떤가?”
“···대단하네요.”
진심이었다. 순간 할 말을 잃고 넋을 놓은 채 감상해버렸을 정도.
처음 미술관에서 작품을 봤을 때의 감동이 똑같이 밀려드는 듯했다.
“그렇게 평가해주니 고맙군.”
하지만 자세히 보니 역시 진품과 다른 점이 느껴지기도 했다.
특히 이 그림엔 ‘빛’이 보이지 않았다. 여신님이 말했던 ‘보석’을 결정짓는 찬란한 빛이 빠지자 마치 미완성 작품인 것만 같았다.
물론 빛의 유무만으로 평범한 사람이 진품과 모조품을 구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이 가짜 그림은 내가 원하는 대로 완벽하게 만들어 준 것이다.
“다만 말했듯이 공짜는 아니라네. 자네는 대가로 내 부탁 하나를 들어줘야겠어.”
“물론이죠. 부탁이 뭔가요?”
모방꾼은 내게 무언가를 가져와 달라고 부탁했다.
예상했던 대로 원작에서 주인공에게 했던 부탁과 똑같은 내용이었다.
“알겠습니다. 대신 이번 일을 끝낸 다음 가져와도 괜찮을까요?”
“물론. 어차피 내게 남은 건 시간뿐이니. 여유롭게 기다려주지.”
“하하. 감사합니다.”
무사히 거래를 끝마친 뒤 그림을 챙겨 집으로 돌아갔다.
이제 준비는 끝났다. 바로 내일 미술관을 털 것이다.
***
<괴도의 또 다른 예고장!>
<발칙한 도발! 손을 뻗는 동상에 들려 있던 예고장.>
<경찰의 확신에 찬 선언. 레이븐의 장난질은 여기까지.>
역시 다음 날 아침이 되자마자 예상했던 풍경이 펼쳐졌다. 온갖 매스컴에선 괴도 레이븐의 범행 예고에 관한 이야기만이 가득했다.
[이제 적어도 이 나라에서 너를 모르는 사람은 없겠구나.]
‘글쎄요. 아직은 한참 멀었죠.’
생각해보면 이번이 겨우 5번째 범행이다. 저번 박물관 때가 워낙 이슈가 크게 돼서 체감이 잘 될 뿐 잠시 시끌벅적하다 잠잠해질 순간의 화젯거리로 남지 않기 위해선 꾸준한 퍼포먼스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도 확실히 오늘따라 유독 시끄럽긴 했다. 아마도 경찰 쪽에서 엄격 대응을 예고하며 반드시 잡을 거라 선언한 탓인 모양이다.
아카데미에 등교했을 때 역시 상황은 비슷했다. 떠들썩한 아이들의 이야기 주제를 들어보면 모두 괴도 레이븐에 관한 말이 한가득하였다.
우리 조원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아주 난리네.”
“화려하게 터뜨렸으니까.”
“조장님. 이래도 괴도가 착한 사람이라 생각해?”
레이첼의 물음에 율리아는 덤덤하게 맞받아쳤다.
“평범하게 나쁜 도둑이라면 화려한 예고 같은 건 하지 않아.”
“동감해. 녀석은 평범하게 나쁜 도둑이 아니라 괴상하게 미쳐버린 도둑인 거지.”
“······.”
잠깐만. 왜 그 말에는 반박하지 않는 거야?
설마 율리아도 내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말에 동감하는 거야?
아니 그야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딱히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이왕 변호해줄 거면 끝까지 해줄 수도 있는 거잖아.
“참. 그러고 보니 어제 인터뷰는 어떻게 됨?”
“여기 정리해둔 수첩이야.”
“오.”
어제 샤론이 정리해둔 수첩을 건네받아 천천히 읽어나가는 레이첼.
수첩에는 기계가 작성했다 해도 믿을 정도로 주관적 의견 없이 객관적인 정보만 정리되어 있었다.
만약 저 수첩에 샤론의 사심이 담겼다면 아마도 부정적인 얘기로만 가득하지 않았을까?
어제 보였던 반응을 떠올리면 아마 100% 그랬겠지.
“흠. 그냥 무난하네.”
“나도 봐도 될까?”
“넌 어차피 어떤 내용일지 다 알고 있잖아.”
“그래도 궁금하니까.”
수첩은 율리아에게 돌아갔다. 작성된 내용을 꼼꼼히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
“좋아. 그러면 이 인터뷰 내용도 발표에 추가하자. 괜찮지?”
“그러던가. 어차피 발표하는 조장님만 귀찮아지는 건데.”
“나도 괜찮아.”
마지막으로 줄곧 조용히 있던 샤론도 고개를 끄덕였다.
“응.”
사실 이 내용이 추가된다고 사람들이 곧바로 생각을 바꿔 괴도를 호의적으로 평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율리아가 바랐던 것처럼 다시 한번 생각해볼 계기 정도는 마련해줄 수 있지 않을까.
“아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때 시큰둥한 표정을 짓던 레이첼이 불길한 미소를 띠며 얘기했다.
“응? 어떤 생각 말이야?”
“그 도둑놈이 미술관 털겠다고 했던 거. 오늘 밤이잖아?”
잠깐. 설마 지금 이 녀석···.
“다 같이 현장이나 가보자.”
갑자기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야. 평소엔 조별 과제에 제일 대충이던 녀석이 왜 뜬금없이 이런 타이밍에 열의를 불태우는 거냐고.
다행히 율리아는 레이첼의 의견에 회의적인 눈치였다.
“글쎄. 거기 가봤자 어차피 경찰이 막지 않을까?”
옳지! 잘한다!
실제로 맞는 말이다. 당연히 경찰은 일반인의 접근을 엄격히 통제할 테니까. 괴도를 잡는 데 사활을 건 만큼 조그만 변수라도 만들고 싶지 않아 하겠지.
“뭐 어때. 정 안 되면 멀리서 놈 얼굴이나 직접 봐도 이득이잖아?”
“음···. 확실히 그건 그럴지도.”
어이. 왜 이렇게 쉽게 넘어가는 거냐고.
조금이라도 더 노력해서 반대하란 말이야. 어차피 멀리서 봐봤자 얼마나 또렷하게 보인다고 바로 혹해버리는 건지 모르겠다.
“오케이. 그러면 조장님의 찬성으로 통과된 걸로.”
결국 보다 못한 내가 끼어들어 진심을 담아 물었다.
“평소엔 계속 시큰둥하다가 갑자기 왜 진심 모드야?”
“뭐? 그야 재밌잖아. 도둑질 구경을 어떻게 참냐?”
참 반박할 수 없는 논리였다. 본인이 재밌을 것 같다는데 내가 옆에서 뭐라고 하겠나.
[확실히 맞는 말이구나.]
‘옆에서 공감하지 마세요.’
이번에는 율리아가 나와 샤론을 번갈아 보면서 물었다.
“둘은 어때?”
“뭘 어때야. 당연히 같이 가야지. 특히 찐따는 무조건 따라와.”
내가 왜 네 명령에 당연히 따라야 하는 것처럼 말하는 건데.
당연하게도 나는 같이 갈 수 없었다.
“미안. 나는 힘들 것 같아.”
“나도 오늘은 안 돼.”
내 말에 연이어서 샤론 역시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사실상 말이 겹쳐서 동시에 거절한 수준이었다.
“하? 지금 신성한 조별 과제 활동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거냐?”
“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네가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어제 인터뷰도 빼먹은 주제에.
눈가를 찌푸리며 투덜거리던 레이첼이 갑자기 눈을 반짝이며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이번에는 또 뭔데. 쟤가 웃을 때마다 불길함에 가슴이 철렁거린다.
“동시에 빠지는 걸 보니 설마 너네 둘이···.”
“헉! 그 그런 거였어? 나는 그런 것도 모르고···.”
레이첼의 밑도 끝도 없는 억지 커플링 엮기와 옆에서 호들갑을 떨며 더더욱 상황을 최악으로 치닫게 하는 율리아의 환상의 콤보. 덕분에 정신이 어질어질해진다.
내가? 샤론이랑?
저 무뚝뚝하고 차가운 얼음 공주랑?
말도 안 되는 소리.
우리는 애초에 이어질 수 없는 운명이다.
그야 샤론은 괴도 레이븐을 싫어하는걸.
내가 사실 괴도 레이븐이란 사실을 알아채면 아예 연을 끊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우리 둘이 이어질 확률은 0%라는 거지.
[어리석구나. 원래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운명이거늘.]
‘여신님은 그냥 조용히 계세요. 제발.’
[흥. 그래 알았다.]
아 이번엔 여신님이 제대로 삐진 모양이다.
이거 풀어주려면 꽤 애먹겠네.
율리아는 이미 머릿속으로 완전히 나와 샤론의 관계를 확정지은 건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더듬으며 얘기했다.
“어 언제부터 그런 사이가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추 축하해? 잘 어울리···나?”
“거기서 의문형으로 끝내면 더 이상하잖아.”
나는 한숨을 쉬면서 오해를 바로잡아주었다.
“절대 아니야. 그냥 우연히 겹친 거라고.”
“흐음? 진짜 우연 맞아? 어제 단둘이 인터뷰 가면서 뭔가 일어난 건 아니고?”
“아니라니까! 그렇게 따질 거면 너도 이틀 전에 나랑 단둘이 인터뷰 갔잖아!”
내 반박에 레이첼은 즉시 눈을 찡그리며 경멸했다.
“아. 찐따 새끼가 뭐래. 내가 너 같은 찐따랑 왜 사귀냐?”
“······.”
“야. 삐졌냐? 농담이야 인마. 장난이잖아 장난.”
그녀는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쿡 찌르며 장난스럽게 윙크했다.
아오. 생긴 것만 예쁘게 생겼지 하는 짓은 그냥 남자애나 다름없는 놈 같으니라고.
“그래. 둘이 사귀는 거 아니라 치고. 그래서 왜 못 가는 건데. 제대로 이유 안 대면 그냥 연인의 오붓한 데이트 타임이라고 생각해도 되지?”
제대로 된 이유.
그야 내가 너희가 구경하려 하는 괴도 레이븐이니까. 내가 미술관에 가서 그림을 훔쳐야 너희도 그걸 구경할 수 있다니까?
물론 이렇게 말할 수는 없었기에 대충 적당한 변명을 둘러댔다.
“오늘 집에 친척이 하룻밤 머물고 가기로 해서 밤에 마중하러 나가야 해.”
“뭔 이런 애매한 날에 친척이 오냐? 아무튼 됐고. 너는?”
다행히 무사히 포위망에서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레이첼은 다음 타겟으로 샤론을 지목했다.
‘음?’
그런데 잠시만.
샤론은 왜 안 된다는 거지?
설마···.
셜록이라서?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어제 질문의 정답은 홍길동이었어용!
덤으로 장발장 간장게장 잔느도 정답으로 인정해드릴게용!
하지만 추천 괴도는 아주 나쁜 도둑이에용!!
절대 착한 녀석이 아니랍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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