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98
“···운명의 여신?”
예상치 못한 얘기에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방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그러니까 신의 권속이라고 했나?
나와 같은 사도라는 건 다시 말해···.
공주님에게도 맨날 하렘을 연호해대는 여신님이 붙어있다는 건가?
아니 이 경우엔 성별을 바꿔서 역하렘인가.
잠시 그 광경을 상상해봤다.
사실 나야 그냥 평범한 괴도일 뿐이지만 그녀는 세계 최강국의 공주 그것도 왕위 계승이 내정된 후계자였다. 게다가 외모마저 비견될 자가 없을 만큼 아름다운 미녀.
즉 마음만 먹는다면 누구든 골라 사귈 수 있다는 거다.
자국의 대귀족 타국의 왕자 억만장자 초갑부 초절정 미남까지.
그런 남자들을 마주칠 때마다 눈이 돌아가서 역하렘을 외치는 운명의 여신을 떠올리니···.
“힘내세요.”
“음? 갑자기?”
그냥 나도 모르게 공감이 돼서 그만.
아니 이게 아니라 지금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그럼 공주님께서도 여신님과 함께하시는 건가요?”
“함께하다니 표현이 거창하구나. 물론 그분의 권속이니만큼 뜻에 따라 움직이고 있지.”
아무래도 그녀는 내 질문을 잘못 이해한 듯했다.
나는 문자 그대로 함께 그러니까 나처럼 여신님이 반지나 지팡이가 돼서 붙어 다니냐고 물은 건데.
“제가 엑스칼리버를 노리고 찾아올 거란 것도 여신님께 들은 건가요?”
“그래. 그분께서는 꿈에 나타나 내게 앞날을 속삭여주시거든.”
이걸로 확실해졌다. 운명의 여신은 공주님과 붙어 다니지 않는다.
하긴 생각해보면 애초에 신이 중간계에 내려오는 것 자체가 일반적인 일은 아니다.
권속을 만든다 해도 대부분 공주님처럼 간접적으로 소통하지 굳이 직접 붙어 다닐 이유가 없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 여신님은 특이한 케이스에 속한다고 봐도 무방하려나.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리면 확실히 평범하지는 않았다.
그때가 아마 처음 이 세계에 빙의하고 일주일 정도 지났을 때쯤으로 기억한다.
원래 신의 사도는 당연히 원래부터 그 신을 섬겨오던 신도 가운데서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반면 나는 신도는커녕 여신님의 이름조차 모르는 상태였다.
그래. 첫 만남은 단지 우연일 뿐이었다.
아카데미 입학식이 있기 전 늦은 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때였으리라.
지금이야 나름 충실한 삶을 살고 있다지만 그때 당시의 나는 지금과 달리 상당히 우울하고 무기력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야 그렇지 않겠는가. 하루아침에 내가 살던 세상이 송두리째 사라지고 웬 200년 전의 마법이 실존하는 세상에 떨어지게 되었는데.
하물며 내가 빙의한 육체는 원작에서도 아무 비중조차 없는 엑스트라 캐릭터에 불과했으니 여러모로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일까. 끝없이 밀려드는 우울함에 살짝 머리가 맛탱이 가버려 웃기지도 않는 생각을 떠올리고 말았다.
‘여기서 죽으면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눈이 소복하게 쌓인 어느 날.
나는 목적지도 정하지 않은 채 하염없이 걷고 또 걸었다.
새하얀 눈에 발자국이 찍혀도 딱히 기분이 좋지 않을 만큼 상당히 지쳐 있었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곳으로 가서 삶을 끝낼 생각이었다.
이 지독한 악몽에서 얼른 깨어나 다시 원래 내가 살아가던 세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그렇게 발걸음이 멈춘 곳은 잎사귀가 전부 떨어져 앙상한 나무 한 그루 앞.
누구의 것일지도 모르는 묘지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이 나뭇가지에 밧줄을 걸고 목을 매달면 나름대로 분위기가 있겠다는 생각도 잠시.
막상 밧줄은 물론이고 죽기 위해 필요한 그 어떤 준비물도 챙겨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허탈함과 나 자신을 향한 한심함에 헛웃음을 흘리며 힘없이 나무줄기에 기대앉아 넋을 놓고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이렇게 있다 보면 언젠가는 죽겠지’라고 마냥 기다리며.
그때 누군가 내게 말을 걸었다.
[정말 그걸로 만족하느냐?]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때의 추위가. 그때의 무력함이. 그때 여신님이 내게 건넸던 말들이.
[낯선 땅에서 와 죽음을 바라는 가여운 아이야. 정말 그대로 만족하느냐?]
처음에는 어디에서 들리는지 몰랐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묘지에 꽂혀있던 지팡이에서 한 여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음을 깨달았다.
특이하게 생긴 지팡이였다. 특히 까마귀 형상의 손잡이 부분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까마귀의 푸른 눈동자가 나를 응시하며 얘기를 거는 것만 같았기에.
나는 그것이 평범한 존재가 아님을 단박에 깨달았다.
이 세계에 마법과 신비가 존재함을 인식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냥 지팡이에서 그 목소리만 들어도 고귀한 신격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궁금했다. 도대체 지금 내게 말을 거는 저 지팡이 속의 여인이 누구인지.
“당신은···. 누구죠?”
[내 이름은······.]
“레이븐?”
“···아. 네.”
“무슨 일 있느냐? 갑자기 넋을 놓길래 놀랐다.”
공주님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너무 과거 회상에 몰두해 있었나. 그러고 보니까 한참 대화를 나누던 도중에 멍을 때리는 건 상대한테 실례인데. 하물며 무례를 범한 대상이 공주님이다 보니 더더욱 송구스러운 짓이었다.
“죄송해요. 잠깐 생각에 잠겨있었네요.”
“괜찮다. 아까의 얘기를 계속 이어가지.”
무슨 얘기를 하다가 이렇게 삼천포에 빠졌더라.
아 공주님은 꿈으로 운명의 여신이랑 소통한다고 했었지.
그걸로 내가 오늘 밤 엑스칼리버를 노릴 거란 사실도 알았다고 했으니 과연 운명의 여신답다.
미래를 알려줄 수 있다니 다시 생각해봐도 너무 사기 능력 아니야?
물론 내가 할 소리는 아니긴 했다. 마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인이었던 내가 이렇게 단기간에 강해질 수 있었던 것은 100% 여신님의 힘 덕분이었으니까.
심지어 나는 보석을 모을 때마다 끊임없이 강해지는 무한 성장 잠재력을 지녔으니 그에 맞먹는 사기적 능력이라 봐도 무방하겠지.
하지만 그래도 미래 예지가 사기인 건 변하지 않는다.
특히 지금의 내게는 너무나 탐나는 능력일 수밖에 없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거란 예언을 들은 데다가 하양이와 관련해서도 아주 머리가 지끈거리는 상황에서 미래를 알 수 있다면 훨씬 간단해질 테니까.
어떻게 하루만 트레이드 못 하나···?
물론 여신님과 잠깐이라도 떨어져 지내야 한다는 건 너무나도 슬프지만 분명 여신님도 내 마음을 이해해줄 것이다.
[······.]
왠지 여신님의 불편한 침묵이 들려온 것 같지만 아마도 기분 탓이겠지.
그야 침묵이 들릴 수는 없잖아. 하하.
잠깐만. 생각해 보니까 굳이 내가 그 능력을 가져야 할 필요는 없는 거 아닌가?
그냥 공주님이 미래를 보고 난 다음 나한테 얘기해주면 되는 거잖아.
완벽한 아이디어를 떠올린 나 자신에게 감탄하며 즉시 그녀에게 간청했다.
“공주님. 혹시 원하는 미래를 볼 수도 있나요?”
“흠. 그건 불가능하단다. 아까 말했듯이 꿈속에서 그분이 내게 알려주는 방식이라 전적으로 그분이 알려주시고자 하는 미래만 알 수 있으니까.”
“아···.”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튀어나온 즉답에 나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어째 일이 너무 쉽게 풀린다 했다.
애초에 그게 가능하다 하더라도 공주 본인에 관련된 미래만 볼 수 있다는 식으로 다른 제한이 존재했을 것이다.
“그럼 혹시 구체적으로 어떤 예지를 들은 건지라도 알려주실 수 있나요?”
“상당히 궁금한가 보구나. 그렇게 집요하게 캐묻는 걸 보면 말이다.”
“···죄송합니다. 혹시 불편하셨다면 사과드리죠.”
“아니. 딱히 불편하지는 않으니 괜찮다. 오히려 아주 흡족하구나. 무릇 친구라면 서로 부탁도 하는 법이지 않겠나.”
빈말이 아니라 진짜 나를 친구로 삼을 작정인가?
공주님에게 어울리는 고결하신 분들을 놔두고 왜 하필 괴도랑? 이건 부잣집 아가씨가 질 나쁜 양아치랑 어울리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거 아닌가.
만약 우리의 관계가 외부에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그날로 그녀의 이미지는 나락으로 처박히고 말 텐데.
그런 내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리 빅토리아 공주님께선 상쾌한 미소와 함께 내게 공감을 요구했다.
“그렇지 않은가? 같은 사도끼리 친하게 지내야지. 사실 나는 본녀를 제외한 다른 사도를 만난 건 네가 처음이었다.”
아 그런 거였나. 하기야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공감대를 단둘이서만 나누고 있다고 한다면 신분의 격차를 뛰어넘고 친하게 지낼 수도 있긴 하려나.
사도를 처음 만난 건 나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솔직히 좀 반갑긴 했다.
입 밖으로 꺼낼 얘기는 아니지만 만약 그녀가 공주가 아니라 평범한 신분이었다면 훨씬 친근하게 다가가지 않았을까 생각할 만큼.
“아 얘기가 이상한 데로 빠져 미처 답해주지 못했군. 내가 그분께 어떤 예지를 들었는지 궁금하다고 했었나?”
“네. 알려주실 수 있나요···?”
“그래. 전부 알려주도록 하마.”
그렇게 공주님은 얘기를 시작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집앞에 벚꽃이 활짝 피었더라구용!
편의점에 콜라를 사러 가다가 잠깐 구경하고 왔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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