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
붉은 단발.
날카롭게 올라간 눈매 속의 새빨간 삼백안.
교복이 맞나 싶을 정도로 딱 붙게 줄인 불건전한 옷차림까지.
내 짝인 레이첼은 누가 보더라도 불량스러운 인상의 양아치 소녀였다. 실제 성격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원작에선 입이 험할 뿐 속마음은 여리다고 나오지만 솔직히 잘 와닿지는 않았다.
“안녕.”
그녀의 요구대로 덤덤히 인사를 건네자 나를 빤히 바라보는 새빨간 눈동자.
이윽고 작게 콧방귀를 뀌며 책상에 드러눕더니 작게 들려오는 중얼거림.
“흥. 재미없는 새끼.”
쟤는 대체 내게 무슨 반응을 원한 걸까?
인사해달래서 해줬더니 재미가 없다고 말하면 뭘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다.
[정말 재미없구나.]
‘여신님은 대체 누구 편이에요?’
[그야 당연히 네 편이지 않겠느냐.]
딱히 그런 것 같지는 않지만 일단 넘어가 주기로 했다.
그나저나 얘는 자리에 앉자마자 자려는 건가? 책상에 엎드린 레이첼을 가만히 관찰해보았다. 곧 나지막이 들리는 규칙적인 숨소리.
진짜로 자기 시작했다. 심지어 작게 코까지 골면서 꿀잠을 자고 있다. 엎드린 지 1분도 안 된 거 같은데 저 정도면 진기명기 수준이 아닐까.
굳이 녀석을 깨우지는 않기로 했다. 어차피 그래봤자 다시 잘 게 뻔하고 괜히 깨웠다간 또 찐따라는 소리만 들을 게 분명했다. 나중에 수업 시간이 되면 알아서 일어나겠지.
“자 그러면 오늘의 수업을 시작하겠어요. 먼저 책을 펴서···.”
내 착각이었다. 그녀는 수업 종이 울리고 선생님이 들어왔음에도 전혀 깰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문제는 선생님 역시 그런 레이첼을 굳이 깨우지 않고서 수업을 시작했다는 점이다.
못 본 걸까? 아니면 일부러 무시하는 걸까?
뭐가 됐든 수업은 시작됐고 이대로면 레이첼은 수업 전체를 건너뛰어 진도를 따라잡지 못하게 될 것이다.
아카데미는 평범한 학교가 아니다. 조금이라도 나은 성적을 얻기 위해 매일 같이 치열한 경쟁을 치러야 하는 약육강식의 세계다.
물론 그녀 본인의 선택이니 그에 맞는 대가를 치르는 것도 맞지만 그래도 가능하다면 깨워주는 편이 좋겠지. 수업 도중에 잠을 청한 것도 아니고 너무 깊게 잠들어서 수업 종을 못 들은 걸 수도 있으니까.
“레이첼. 수업 시작했어. 일어나.”
“으음···. 흠냐.”
잠꼬대를 중얼거리며 눈을 찌푸리는 레이첼.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아 살짝 흔들며 깨워보았다.
“으응···?”
“일어났어?”
“뭐야. 찐따가 왜 꿈에···.”
아직 잠을 덜 깬 건지 헛소리를 중얼거린다. 심지어 그걸로 모자라 내 볼까지 쿡쿡 건드리기까지 한다.
“응?”
“저기···. 그만해줄래?”
깜빡이는 눈동자. 빤히 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애써 시선을 피했다.
[후후. 부끄러워하는구나.]
‘이 상황에 아무렇지 않은 게 이상한 거 아니에요?’
그때였다. 이제야 지금이 현실임을 깨달은 건지 레이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더니 입이 마구 움찔거렸다. 그리고는 뒤이어.
“꺅!!”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 가녀린 소녀처럼.
반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렸다. 수업을 진행하던 선생님은 불편함을 감추지 않고 헛기침하며 지적했다.
“거기 두 사람. 한 번만 더 떠들면 바로 퇴실 조치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왜 나까지? 나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억울해···!
살짝 곁눈질로 옆을 바라봤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잔뜩 당황한 상태인 레이첼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
다행히 그 이후론 특별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점심이 지난 오후 다음 수업이 시작하기 전 잠깐의 쉬는 시간.
옆에서 빈둥거리던 레이첼이 나를 보며 물었다.
“야. 찐따.”
“응?”
“다음 수업 뭐냐?”
아니 바로 뒤돌면 시간표가 떡하니 있는데 그걸 왜 나한테 묻는 거야.
굳이 귀찮게 입씨름하고 싶지는 않아서 얌전히 대답해주었다.
“대련이네.”
“오. 개꿀.”
다음 수업이 마음에 들었는지 즉시 표정이 환해지는 레이첼.
그와는 반대로 내게는 썩 내키지 않는 수업이었다.
‘대련’이란 과목이 무엇이냐 하면 말 그대로 대련을 맞붙는 실전 수업이다.
둘씩 짝을 지어 일대일로 마법을 통해 대련을 진행하는 게 수업의 전부.
지루한 이론이 아닌 자기들끼리 합법적으로 치고받을 수 있는 시간. 당연히 많은 학생에게 최고로 평가받는 수업 중 하나였다.
하지만 내게는 달랐다.
애당초 전에 말했듯 내가 빙의한 ‘크로 모리스’란 캐릭터는 엑스트라로 전투력 역시 매우 약한 편에 속한다.
간단히 여신님의 힘을 이용하지 않을 경우 나는 반에서 제일 약하다고 봐도 무방하다. 어떻게 싸우든 내가 질 게 뻔한 대련을 좋아하는 게 더 이상하겠지.
그래도 어쩌겠는가? 수업에 빠질 순 없는 노릇이니 평소 하던 것처럼 대충 싸우다 지는 수밖에.
***
아카데미에는 대련실이란 공간이 따로 존재한다.
그곳에 모인 우리는 대련 담당 교사인 로버트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언제나 얘기했듯 절대 대련 중에 다쳐서는 안 된다. 하지만 만약 그런 상황이 나올 경우 즉시 대련을 중단하고 친구의 상태를 살핀다. 알겠나?”
“네.”
다소 뻔하다 느껴질 상투적인 얘기들이 끝나고 선생님이 평소와 달리 한마디를 추가로 덧붙였다.
“그리고 오늘부터는 대련에 개성 마법을 사용해도 된다.”
“와!!”
그 즉시 지루해하던 아이들이 돌변하여 환호성을 내질렀다.
개성 마법이란 아주 간단한 개념이다. 말 그대로 마법사가 지닌 고유의 개성에 해당하는 마법을 뜻한다.
이 세계관에서 마법사에겐 마력 회로란 것이 존재한다. 마력 회로는 지문처럼 개인마다 전부 다른 형태와 성질을 띠고 있다. 따라서 마법사마다 가장 잘 다루는 고유한 마법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와 반대되는 개념은 일반 마법이라고 부르며 특별한 제한 없이 누구나 익힐 수 있는 마법을 의미한다.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내 개성 마법은 ‘마술’이다. 비둘기를 날리거나 카드를 이용하는 등의 눈속임용 마술. 당연히 전투에는 딱히 도움이 되지 않는 마법이다.
그러니까 대련에 개성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변해봤자 내게 이득은 거의 전무하다는 소리다.
[너무 겸손한 거 아니냐? 충분히 너도 뛰어난 마법사란다.]
‘여신님의 힘이 있을 때의 얘기죠. 지금은 밤도 아니잖아요.’
[조금 더 자신감을 가지거라. 아이야.]
글쎄. 내가 보기엔 여신님이 너무 나를 믿고 있는 것 같다. 애초에 빙의된 지 한 달밖에 안 된 시점에서 마법에 미숙한 건 당연한 일인데 말이지.
“다음은 크로 모리스.”
“어?”
잠깐 생각에 잠겨 있다 보니 어느새 내 차례가 돌아왔다. 이렇게 빨리?
“상대는 레이어드.”
“네.”
이름이 호명되자마자 앞으로 걸어 나오는 소년.
큰일이다. 왜 하필이면 저 녀석인 건데.
갈색 머리에 특이하게 목검 한 자루를 들고나오는 소년.
이 만화의 주인공이다. 그의 개성은 신체 강화. 다들 마법으로 싸우는 세계관에서 검으로 적을 썰어 버리는 정석적이면서도 매력적인 컨셉. 능력만 봐도 주인공으로 손색이 없는 녀석이다.
마술이나 깔짝대는 누구와는 다르게 말이지.
꼼짝없이 주인공과 싸우게 생겼다. 그것도 개성 마법이 허용된 첫날에 말이다.
이건 딱 봐도 전투력 측정기로 사용되고 버려지는 클리셰잖아.
[힘내거라. 이 몸은 너를 응원하고 있다.]
‘그거참 감사하네요.’
그래. 아무리 주인공이라고 해도 여신의 응원을 받지는 않잖아?
한번 최선을 다해 싸워볼 생각이다. 엑스트라의 유쾌한 반란이라고 할까. 이기면 좋고 설령 지더라도 본전이니까. 무려 세계의 주인공인데 진다고 해서 이상한 건 아니잖아?
나도 앞으로 나가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고 섰다.
“크로. 잘 부탁해.”
“응. 최대한 열심히 해볼게.”
주인공답게 성격도 좋은 레이어드. 페어플레이 정신으로 악수까지 한 다음 선생님의 심판 아래 대련이 시작되었다.
“둘 다 준비됐나? 그러면 시작한다.”
삑!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시작된 대련.
레이어드는 곧바로 마법을 사용해 자신의 몸을 강화하였다. 물론 나도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일단 견제용으로 트럼프 카드를 날렸으나 곧바로 휘두른 목검에 막혀버렸다.
하지만 그것은 시선을 분산하기 위한 용도.
나는 로프를 휘둘러 상대의 몸을 묶었다.
“흡!”
역시 어렵지 않게 로프를 베어내 버리는 레이어드. 목검으로 저렇게 깔끔하게 베어낸다니. 너무한 거 아니냐고.
녀석은 빠르게 승부를 보기로 한 건지 곧장 달려들며 접근해온다. 그리고는 곧장 내 목에 겨눠지는 칼끝.
“이걸로 끝이네.”
“과연 그럴까?”
“···뭐?”
스르륵.
마치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내 형상. 갑작스러운 상황에 레이어드는 순간 당황한 듯했다.
나는 그 틈을 노려 뒤에서 공격을 시도했고.
팅!
허무하게 가로막히고 말았다.
결국 승부는 모두의 예상대로 끝나버렸다.
“레이어드의 승리다.”
선생님의 덤덤한 선언에 한숨을 내쉬었다.
휴. 역시 쉽지 않구나.
최대한 노력해봤는데 아직 한참 무리인 것 같다.
[그래도 이 정도면 꽤 선방하지 않았느냐. 기운 내어라.]
‘하긴 그렇긴 하죠.’
마지막 한 수 때는 진짜 이기지 않을까 하며 순간 설렜을 정도였다.
자리로 돌아와 앉아서 바닥난 마력을 회복하려던 찰나.
레이어드가 내가 있는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응? 내가 기죽었을까 봐 위로해주려는 건가?’
그런 거라면 너무 걱정할 필요 없는데 말이지. 주인공의 성격이 워낙 착하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 예상과 달리 레이어드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마치 심기가 매우 불편한 것처럼 말이다. 대체 뭐 때문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왜 그랬어.”
“응? 뭐가 말이야?”
“시치미 뗄 필요 없어. 일부러 봐줬다는 거 다 아니까.”
[어머나.]
이게 대체 뭔 소리야?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참고로 팬아트는 상시 환영이랍니당!
내놓으란 소리는 아니지만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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