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0
나는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달이 아름답네요.”
[그거참 낭만적인 고백이구나.]
고백이 아니라 그냥 달을 올려다보며 느낀 점을 말했을 뿐이다.
밤하늘의 떠오른 달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이대로 줄곧 멍하니 구경만 해도 질리지 않을 정도로 예쁜 달이었다.
그래도 이젠 슬슬 시작할 시간이다.
[준비는 다 끝났느냐?]
“네. 완벽히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미술관 근처에 잔뜩 몰려있는 인파.
그중에는 나를 잡으려 이를 가는 경찰들도 있고 그냥 괴도의 모습을 보기 위해 찾아온 구경꾼들도 있었다.
관객들은 이미 착석을 끝마친 상황.
남은 건 무대에서 공연을 펼치는 것뿐.
복잡한 상념은 잠시 밀어두기로 했다. 같은 반 여자아이의 정체가 뭔지는 지금 당장 신경 쓸 문제가 아니니까.
나는 모자를 눌러쓰며 미소를 지었다.
“시작하죠.”
이번 마술쇼는 대성공할 예감이 들었다.
***
경찰 제복을 입은 여인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사람들 못 들어오게 막아. 제대로 통제하라고.”
“네! 알겠습니다!”
“망할 도둑놈 같으니라고.”
레이븐에게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가젯은 담배를 꼬나물었다.
폐부 깊숙이 들어오는 니코틴이 그나마 마음을 진정시켜준다.
괴도 레이븐은 날짜만 예고할 뿐 구체적인 시간대는 명시하지 않는다. 다만 여태까지 그는 항상 밤에만 활동했기에 슬슬 나타날 거라고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아주 난리 시장통이군.”
이번에 투입된 경찰 인력은 역대로 따져도 손에 꼽힐 정도였다. 고작 한 명의 범죄자를 체포하기 위한 규모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
거기에다 특종의 냄새를 맡고 몰려온 기자들과 구경꾼까지 합해지니 북새통이 펼쳐졌다.
이런 상황은 오히려 녀석에게 유리하게 작용할지도 모른다.
특히 녀석이 감쪽같은 분장술도 펼친다는 소문이 있으니 더더욱 주의해야 한다.
가젯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안 온 건가.”
금발에 에메랄드 눈동자를 지닌 탐정 소녀. 성격은 꽤 특이해도 그녀의 능력만큼은 진심으로 인정했었기에 내심 아쉽게 느껴졌다.
‘뭐 이런 상황에선 딱히 할 수 있는 것도 없겠지.’
애초에 탐정이란 직업은 현장 체포와는 다소 동떨어진 직업이다. 이미 일어난 범죄를 추적하여 추리를 통해 범인을 색출해내는 거라면 몰라도.
“후우.”
가젯은 담배를 끄고서 미술관 안쪽으로 들어갔다.
한눈에 들어오는 건 레이븐이 목표로 점찍었던 ‘폭풍우 치는 밤의 등대’ 주변의 삼엄한 경비였다.
그야말로 개미 한 마리 허용하지 않겠다는 굳센 의지가 보일 정도.
과투자나 비효율적이란 표현은 현재 상황에선 중요하지 않았다. 과장 보태 국가 전체의 관심이 현재 이곳으로 쏠린 지금 만약 괴도를 놓쳤을 때 벌어질 상황은 상상도 하기 힘든 수준이니까.
좋다. 이 정도라면 제아무리 놈이라도 그림을 훔치는 건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다.
그때였다.
팟!
갑자기 무언가 끊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미술관 내부가 어두컴컴해졌다.
조명들이 일제히 꺼져버린 것이었다.
우왕좌왕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가젯이 크게 소리쳤다.
“당황하지 마라! 준비해둔 비상 조명을 켜!”
이런 상황쯤은 이미 염두에 두고 있었다. 특히 이전번 하수도에서 똑같은 수법으로 곤욕을 치렀던 가젯이 방비를 세워두지 않을 리 없었다.
혹시 모르는 상황을 대비해 마력으로 가동되는 특수 조명을 세팅해뒀기에 즉시 미술관은 다시 빛을 되찾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공연은 시작된 이후였다.
“뭐···!?”
고작 5초 남짓한 짧은 순간.
그 찰나에 그림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한순간에 휑해진 벽을 보며 모든 사람이 경악했다. 도대체 어떤 방법을 사용한 건지 파악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게 대체···.”
“센서도 울리지 않았잖아!”
“하지만 마법이 아니라면 이런 건 불가능해···!”
마력 탐지기가 울리지 않았는데도 도저히 마법이 아니라면 설명되지 않는 상황.
이 기가 막힌 마술쇼에 모두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와중에 뒤이어 바깥에서 무시할 수 없는 외침이 들려왔다.
“괴도 레이븐이다!”
“그림을 들고 있어!!”
그 말만으로 충분했다. 가젯은 망설이지 않고 곧장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전원 레이븐을 추격해라!”
그녀 역시 제일 선두에 앞장서서 미술관 밖으로 달려 나갔다.
사람들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반대편 건물의 옥상에 익숙한 실루엣이 태평하게 서 있었다.
경찰들의 플래시가 그쪽을 비추자 곧 그의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검은 실크햇과 펄럭이는 망토 차림의 남성. 손에 들린 그림은 불과 직전까지만 해도 미술관에 있던 ‘폭풍우 치는 밤의 등대’였다.
“당장 쫓아!”
당연히 그냥 들고 가도록 두고만 볼 수는 없었다. 경찰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레이븐을 잡기 위한 포위망을 구성했다.
가젯 역시 한손에 총을 들고서 반대편 건물로 향하려 했다. 누군가 뒤에서 그녀의 어깨를 잡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한시가 급한 일촉즉발의 순간 들어온 방해에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며 뒤돌았다.
그러나 손길의 주인을 보자마자 가젯의 표정은 급변했다.
“셜록?”
“쫓아가면 안 돼요.”
“네?”
“저건 가짜예요.”
혼란스러웠다.
가짜라니 그게 대체 무슨 뜻인가?
그녀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사람이 옥상에 있던 괴도의 모습을 보았다.
그것은 이전에 사용됐던 조악한 풍선 인형 따위가 절대 아니었다. 자세나 움직임 무얼 봐도 살아 움직이는 인간이 분명했다.
“대역이라는 소리인가요?”
“아니요. 아마 옥상에 있던 남자는 레이븐이 맞을 거예요.”
“지금 당신 말이 어떻게 들리는지 알아요?”
몇 초 전까지만 해도 가짜라고 했다가 이제는 레이븐이 맞을 거라니.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추라는 건지 가젯은 혼란스럽기만 했다.
“제 말은 레이븐이 아니라 그림이 가짜라는 소리였어요.”
“그림이 가짜라고요?”
방금 보았던 직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분명 그림은 자신이 알던 것과 완벽히 똑같은 그림이었다.
“당신은 그림이 가짜라는 걸 어떻게 눈치챈 거죠?”
“제 마법을 이용해 추리했어요.”
“참 편한 대답이군요.”
가젯은 반대편 건물을 흘겨보았다.
이미 자신이 나선다고 무언가 바뀔 타이밍은 한참 지났다. 탐정 소녀에게 붙들린 순간 그녀가 직접 괴도를 체포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쩔 수 없이 부하에게 맡기고 셜록의 얘기나 자세히 들어보기로 했다.
“그 말이 맞다고 치죠. 진짜 그림은 어딨다는 겁니까?”
“그림은 어디에도 가지 않았어요.”
혹시 일부러 열받게 하려고 말을 빙빙 꼬아서 하는 걸까.
진지하게 그런 의구심을 품을 정도로 수수께끼 같은 대답이었다.
“셜록. 그림은 사라졌습니다.”
“아니요. 등대는 여태껏 줄곧 자리를 지켰어요. 따라오세요.”
탐정은 그 말만을 남긴 채 미술관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런 소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가젯은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일반인 통제 구역에 아무렇지 않게 들어가는 뻔뻔함이란.
누가 보면 그녀가 자신의 상관 경찰인 줄 알겠군.
미술관은 텅 비어있었다.
그야 당연했다. 지켜야 할 그림은 이미 사라졌고 범인은 열심히 도주 중이니 출입문을 지키는 최소 인력만 빼고 모두 괴도를 추격하러 쫓아갔으니까.
게다가 미술관은 꽤 어두워 음산한 분위기마저 느껴졌다.
비상용으로 준비한 마도 조명은 한정된 수량 탓에 그림 주변에만 설치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들은 그림이 있던 위치까지 걸어갔다.
역시 펼쳐진 풍경은 아까와 마찬가지였다. 그림이 있어야 할 자리엔 새하얀 벽면만이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자 등대가 어디 있습니까.”
“조명이 꺼지고 고작 5초. 그 사이에 마법도 쓰지 않고서 그림을 완벽히 훔쳐 반대편 옥상까지 달아나는 게 가능할까요?”
“······.”
그야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괴도 레이븐은 그 일반적 상식을 부수고 해내지 않았는가.
“사실 그림을 훔친 게 아니라면? 그냥 그림이 사라진 것처럼 꾸민 것뿐이라면?”
“그게 무슨 소리···. 아.”
셜록을 향해 날아오던 반문이 뚝 끊겼다.
그림이 사라진 벽면을 유심히 쳐다보던 가젯이 무언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쫘악!!
가젯은 빈틈의 실마리를 찾아 벽면을 거칠게 뜯어냈다.
그러자 힘없이 찢어져 나풀거리는 벽.
아니 이렇게 쉽게 뜯기면서 펄럭거리는 것은 ‘벽’이라고 지칭할 수 없다.
“일종의 가림막이죠. 미술관의 벽과 완전히 똑같이 생긴 가림막을 통해 그림이 사라진 것처럼 꾸며낸 거예요.”
“···이럴 수가.”
가림막의 안에는 ‘폭풍우 치는 밤의 등대’가 멀쩡히 자리해 있었다.
“조명을 끄는 동시에 가림막이 쳐지도록 설계해 놨던 거겠죠. 이 가림막은 전날 예고장을 놔두면서 천장 쪽에 같이 설치했을 테고.”
셜록의 추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형사님이 하신 것처럼 조금만 유심히 관찰해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어요. 하지만 이 급박한 상황에서 침착하게 관찰하기란 쉽지 않죠. 특히 그림이 사라진 직후에 바깥에서 괴도 레이븐이 나타났다는 얘기를 들으면요.”
모두가 깜빡 속아 넘어간 완벽한 트릭이었다.
“그림은 이미 도둑맞고 범인은 반대편에 있는 상황. 자연스레 미술관을 지키던 경비는 순간 극도로 허술해질 수밖에 없어요. 레이븐은 경찰들을 따돌린 다음 그 타이밍에 유유히 그림을 들고 사라지려 했던 거겠죠.”
단 한 명. 셜록을 제외하면 말이다.
“···당신은 그걸 어떻게 다 간파한 겁니까?”
“관찰했거든요.”
그리고.
짝. 짝. 짝.
고요한 미술관에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젯밤 예고장이 들려있던 조각상의 손에 한 남자가 걸터앉아 미소를 짓고 있었다.
괴도 레이븐의 등장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조각상에 함부로 앉으면 안돼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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