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05
“휴우···.”
거울 세계로 무사히 이동했음을 깨닫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로 위험했다. 이 정도의 위기감을 느껴보는 게 얼마 만인가 싶을 정도.
특히 요즘 들어서는 집행자를 상대로도 가뿐히 이길 수 있을 만큼 성장했던 터라 더더욱 방심하고 말았다.
삼격 필살이라니. 다시 생각해도 더럽게 사기잖아.
당장은 위기에서 빠져나오긴 했으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결국 원래 세계로 돌아가면 막지도 피하지도 못하는 총알이 내게 날아오고 있다는 현실은 사라지지 않으니까.
즉 여기서 어떻게든 파훼법을 찾아내야 했다.
그게 과연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시간은 넘쳐나니까 진득하게 생각하다 보면 뭐라도 떠오르지 않을까.
“아.”
전투로 달아오른 몸이 차분해지려던 찰나 시계탑 위쪽에서 내려다보는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곳에 있을 사람이라 해봤자 어차피 한 명밖에 없으니 시선의 주인이 누구일지는 불 보듯 뻔했다.
“안녕.”
약간 뻘쭘한 기분에 손을 들며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보았다.
시계탑 난간에 걸터앉은 채 나를 빤히 쳐다보던 하양이는 똑같이 한 손을 들어 살짝 흔들었다.
확실히 처음 만났을 때와 비교하면 장족의 발전을 거뒀구나.
그래도 여전히 갈 길이 멀긴 하지만 이대로면 목표를 이루는 것도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것 같았다.
하양이를 바라보며 순간적으로 엄청난 갈등에 휩싸였다.
‘올라가야 하나?’
원래 계획은 혼자서 차분하게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려 했는데.
누가 옆에 있다고 해서 도움이 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까.
그리고 솔직히 시계탑 매번 올라가는 거 더럽게 힘들단 말이지.
거울 세계에 들어올 때마다 스폰 장소가 고정되어있는 건지 시계탑 앞의 분수대에서 깨어나는데 하양이를 만나려면 매번 옥상까지 올라가야만 한다.
역시 이건 아니다. 하양이한테 용건이 있는 거면 몰라도 단순히 인사차 만나러 가기엔 시계탑 등반 코스가 너무 험난하다.
처음에야 몽환적인 내부 풍경에 감탄하며 넋을 놓은 채 오르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몇 번 들락거리며 익숙해지고 나니 별 감흥이 없달까. 이러다 조금 더 있으면 아예 지긋지긋해지지 않을까 걱정될 지경이다.
오늘은 그냥 패스해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분수대 벤치에 앉아 고민에 잠기길 잠시.
“······.”
위에서 계속 따갑게 느껴지는 노골적인 시선에 얼마 지나지 않아 집중력이 흐트러지고 말았다.
결국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하양이를 올려다보았다.
서로 입을 꾹 다문 채 미묘한 눈싸움이 이어지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은 네가 내려와.”
왜 항상 나만 힘들게 올라가야 한단 말인가. 애초에 시계탑 안이 아무리 넓다 해도 야외보다는 좁을 수밖에 없다. 이왕 만나는 거면 하양이가 내려오는 편이 훨씬 즐길 거리도 많지 않겠는가.
하지만 녀석은 아무 미동도 없이 고개만 기울이고 있었다.
아 설마 말뜻을 이해 못 한 건가? 이 정도 간단한 회화는 가능할 줄 알았는데.
어떻게 말해줘야 할지 잠시 고민하다 내 옆을 가리킨 다음 이쪽으로 오라고 손짓했다.
그러자 하양이가 곧바로 반응을 보였다.
난간에서 그대로 뛰어내려 가뿐하게 착지한 것이다.
“···오.”
대단하잖아. 여기서는 나도 마법을 못 써서 평범한 일반인에 불과한데.
역시 괜히 초월자가 아니란 걸까. 하긴 시간의 초월자가 높은 데서 떨어져 다치는 것도 그림이 이상하긴 하다.
순식간에 아래로 내려온 하양이는 이쪽으로 사뿐히 다가와 내 앞에 섰다.
“크로.”
“그래. 잘 기억하고 있네.”
적어도 내 이름은 확실히 외운 듯하니 나름대로 뿌듯함이 밀려들었다.
잘 가르쳤다는 성취감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음. 그러고 보니까 네가 시계탑 밖으로 내려온 건 처음인 거 같네.”
매번 위에서만 봐오다 보니 이렇게 아래서 마주보는 느낌은 또 새로웠다.
생각해 보니 거울 세계에 들어올 때마다 하양이와 만나는 일에만 집중해온 탓에 막상 시계탑을 제외한 다른 곳들은 제대로 관찰해보지도 못했었지.
마음 같아서는 이 기회에 하양이랑 같이 이곳저곳 둘러보며 산책이나 다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러기엔 지금 내 상황이 꽤 급박해서 말이다.
당장 셜록의 삼격 필살을 파훼할 방법을 떠올리지 않으면 진짜 죽을지도 모른다고.
아니면 평생 여기서 하양이랑 같이 살아야 하나?
단둘뿐인 세상에서 영원히 같이 산다니. 하양이가 싫다는 건 아니지만 그건 상상만 해도 막막하게 느껴진다.
그런 미래를 상상하니까 절로 무거운 한숨이 튀어나왔다. 어떻게 해서든 이 위기에서 벗어나야 할 텐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셜록한테 내 정체를 밝혀야 하나···?
나 사실 너랑 같은 반 친구인 크로니까 제발 죽이지 말아 달라고?
아니지. 애초에 그녀가 샤론이 맞다고 100% 확신할 수도 없는 데다 설령 맞다 하더라도 그녀가 적대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그러지 않을 거라 믿고 싶지만 내 정체 따위 상관없다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벤치에 앉은 채로 고뇌를 거듭하던 와중 문득 옆에 있는 하양이는 뭘 하고 있나 생각이 들어 고개를 돌렸다.
녀석은 뒤돌아 분수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흐르는 물줄기에 고정된 시선은 한참이 지나서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설마···. 시계탑 아래로 처음 내려와 본 건가?’
기억을 되새기면 하양이는 언제나 시계탑 안에만 있었다. 적어도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는 밖으로 한 번도 나가지 않았고.
굳이 내려오지 않았던 이유가 따로 있던 걸까? 그렇다기엔 지금은 아무렇지 않게 뛰어 내려온 걸 보면 딱히 그런 건 없어 보이는데.
“흠···.”
재충전의 느낌으로 조금만 둘러볼까? 어차피 여기에 있는 동안은 얼마나 머물던 외부 시간은 멈춰 있으니 괜찮겠지?
그래.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부정적인 것들만 떠올려봤자 머리가 제대로 돌아갈 리 없잖아.
“하양아.”
이름을 부르자마자 홱 고개를 틀어 나를 바라보는 하양이.
“좀 돌아다닐까?”
“······.”
이번 말도 이해하지 못한 건지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건 보디랭귀지로 어떻게 표현해야 하지? 고민 끝에 그냥 손을 내밀었다.
내 손바닥을 지긋이 쳐다보던 하양이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초콜릿.”
“그거 아니야.”
지금은 안 챙겨왔다고.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야 겨우 손을 붙잡는 데 성공하고 그대로 벤치에서 일어났다. 하양이는 얌전히 내 손길에 이끌려 뒤따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거울 세계 탐방. 솔직히 말하면 두근두근한 모험심이 피어오르기도 했다.
과연 여기는 끝이 어디까지일까? 전부 다 여기처럼 한밤중의 런던과 같은 풍경일까?
거리를 걸으면서 옆에 있던 하양이에게 꾸준히 말을 걸었다.
여전히 그녀는 기초적인 단어를 제외하고는 거의 알아듣지 못했지만. 이렇게라도 대화를 계속해야 말문도 트일 테니까.
그렇지만 시간이 좀 지나서는 그마저도 멈추게 되었다. 애써 외면하려 해도 현실의 상황이 자꾸만 발목을 붙잡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어느 순간부터 나도 모르게 자연스레 하양이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있었다.
“넌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지금 내가 밖에서 죽을 위기에 처했거든.”
“여태껏 나름 많은 위기를 헤쳐왔는데 이번에는 진짜 위험하달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보이질 않으니까 미쳐버릴 지경이야.”
“그 녀석 진짜 날 죽일 생각인 걸까? 순순히 항복하라 했었는데 그러면 살려주려나? 근데 그러면 엑스칼리버는 어떡하지···. 아 진짜 답답하네.”
“이대로면 평생 여기에 갇혀 지내야 할지도 모른다고. 애초에 지금 이런 상황이 된 것도 널 위해서 움직이다···. 아니 됐다.”
“···하아. 어떻게 해야 할까? 응? 내가 죽으면 너는 초콜릿도 두 번 다시 못 먹고 쭉 혼자 지내야 할 텐데.”
사실 그녀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단 나 혼자서 내뱉는 넋두리에 불과한 내용이었다.
그러던 찰나.
턱.
“응?”
갑자기 하양이가 발걸음을 멈춰 세워버리자 의아함에 시선을 돌려 녀석을 바라보았다.
“초콜릿. 못 줘?”
“···참나. 지금 그게 중요하냐?”
그 와중에 용케도 그건 알아듣고 반응하네. 대체 초콜릿에 얼마나 진심인 건지.
나는 어이가 없어 튀어나오는 헛웃음을 흘려보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왜 괜히 시답잖은 말을 꺼냈는지. 이제 입을 다물고 다시 움직이려던 순간.
하양이는 맞잡은 손에 힘을 주며 내 걸음을 제지했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나 혼자 지내?”
그대로 멈춰서고 말았다.
“···너.”
“그건 싫어.”
하양이는 단순한 어휘만을 사용해 본인의 마음을 내게 전했다.
“그러니까.”
그녀가 붙잡은 손에서 새하얀 빛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 빛은 너무나 밝아서.
“죽지 마.”
어두운 런던의 밤거리를 환하게 비추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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