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07
집에서 하룻밤 휴식을 취한 다음 새벽 일찍 호수로 향했다.
“자 여기요.”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비비안에게 엑스칼리버를 건넸다.
세상에서 제일 유명한 전설의 검인 만큼 살짝 욕심이 들기도 했지만 그런 생각은 금세 머릿속에서 지워내 버렸다.
어차피 내가 레이어드도 아니고 검을 쓸 일 자체가 없을 텐데 괜히 욕심부려서 뭐 하겠는가. 그보다 비비안에게 들어야 할 정보가 몇 배는 더 가치 있었다.
“이 검도 오랜만에 보네.”
비비안은 내게 검을 받아들고서 상태를 꼼꼼히 살폈다.
아서 왕의 전설은 지금으로부터 못해도 1000년 전의 시대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다. 천년 만에 다시 보게 된 검을 보고 오랜만이라는 짧은 감상평이 끝이라니. 역시 초월자의 시간 개념은 인간을 아득히 뛰어넘었구나.
“그런데 가슴팍에 그 요상한 문양은 뭐니?”
예상치 못한 질문에 어리둥절하기도 잠시 나는 화들짝 놀라며 셜록이 남겨버린 마크를 가리키며 외쳤다.
“이게 보이세요!?”
“당연히 보이지.”
그래. 생각해보면 그렇다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그녀가 여신님 앞에서 유독 비굴한 모습을 자주 보여준 탓에 잘 체감이 안 될 뿐 비비안은 무려 아서 왕에게 엑스칼리버를 직접 건네준 호수의 요정이었으니까.
이 표식을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건 이걸 없앨 방법을 알 수도 있다는 뜻이 아닐까?
두근거리는 마음을 담아 그녀에게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혹시 없애주실 수 있나요?”
“그거야 뭐 간단한 일이지.”
비비안이 태평한 어조로 대답하며 손에 쥐고 있던 엑스칼리버를 허공에 그었다. 그러자 초록색으로 빛나던 문장이 반으로 갈라져 소멸해버렸다.
“······.”
어안이 벙벙해져 가슴팍을 내려다보았다. 손으로 몇 번을 쓸어내리고 나서야 정말 문양이 말끔하게 사라졌다는 것을 깨닫고 복잡한 감정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역시 엑스칼리버. 과연 전설에 등장하는 성검다운 능력이다.
아니면 그냥 비비안이 저런 인간의 마법 따위 손짓 한번에 깨트리는 괴물이거나.
뭐가 됐든 나로서는 허망함이 밀려들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쉽게 해결될 문제였던 거야? 그런 거였으면 지난 밤 동안 잠까지 설쳐가며 걱정했던 정신적 스트레스는 어떻게 되는 거냐고.
그래. 좋게 생각하자. 어쨌든 고민했던 문제가 쉽게 해결됐다는 건 좋은 일이니까.
예상치 못한 도움을 받긴 했지만 원래 비비안에게 받기로 했던 보상은 다른 것이었다.
사실 그게 원래 내가 개고생을 해가며 엑스칼리버를 훔쳐 온 이유기도 했고.
“이제 약속했던 내용을 알려주세요.”
“아 시간의 신에 관해서였나?”
하양이의 시간을 다스리는 권능은 분명 신에게 하사받은 힘이라고 했다. 즉 시간의 신이야말로 지금 마도공학을 비롯한 수수께끼의 해답을 밝혀줄 가장 핵심적인 열쇠나 다름없었다.
아까 흔쾌히 표식을 없애주던 모습과는 달리 눈만 도르륵 굴리며 살짝 머뭇거리던 비비안은 이내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그래. 약속했으니까 알려줘야지.”
누가 보더라도 말하길 꺼리는 눈치다.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지난번에 신의 이름을 남한테 함부로 말하고 다니다가 천벌 받을 수도 있다고 그녀가 직접 얘기했었으니까.
하지만 나도 여기서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설령 시간의 신에게 미움을 받게 된다고 하더라도 분명 여신님이 지켜줄 테니까 괜찮다.
“아일랜드의 아스러진 신전으로 가.”
“아스러진 신전이요···?”
“음. 내가 알려주는 것보단 네가 직접 가서 확인하는 게 좋을 거야. 거기에 가면 곧바로 알 수 있을 테니까.”
역시 그녀는 시간의 신에 대해 직접 언급하길 피하고 있다.
원하던 답을 바로 얻은 건 아니어도 충분한 수확이긴 했다. 이 이상 더 억지로 비비안을 압박해봤자 오히려 반작용만 나올 수도 있고. 아무래도 이 정도 선에서 만족해야 할 것 같다.
“정말 거기 가면 신에 대해 알 수 있는 거죠?”
“난 약속은 무조건 지켜. 이 검도 펜드래곤 꼬맹이랑 내기로 빌려줬던 거고.”
그런 비하인드 스토리가 숨어있을 줄이야. 고작 내기에 져서 엑스칼리버를 줬던 거라니. 뭐라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꾹 참고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감사해요.”
“흥. 됐으니까 얼른 가버려. 너랑 엮일수록 피곤한 일만 생기는 것 같아. 뿔피리를 찾으러 오는 게 아니면 어지간해서 찾아오지 마.”
“네. 그럴게요.”
그녀는 답답하다는 듯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나를 힐끗거렸다. 뭔가를 말하려는 것처럼 입을 우물거리다 결국 아무 말 없이 호수 안으로 스르륵 사라져버렸다.
왜 비비안은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내가 시간의 신을 찾아가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는 건가?
조금은 두렵기도 했으나 내 의지는 변함없었다.
다른 것보다도 예언의 마녀와 운명의 여신이 말했던 내가 맞이하게 될 비참한 최후. 그것이 무엇일지 알고 싶었으니까.
어느덧 동이 트며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새벽 일찍 나온 터라 피곤함은 완전히 가시지 않았으나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가슴팍에 새겨진 표식도 없어졌으니 아카데미에 갈 시간이었다.
***
오늘은 사실 아카데미에 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표식이 새겨진 채로 갔다가 샤론과 마주치면 곧바로 정체를 들통나고 말 테니까.
밤을 꼬박 새워가며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난감해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녀가 말해준 대로라면 이 마법은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비비안이 칼질 한 번으로 마법을 없애준 덕분에 결국 무사히 등교할 수 있었지만.
나는 반에 들어가 자리에 앉은 다음 샤론의 눈치를 살폈다. 앞자리에 앉아있던 그녀는 나와 흘깃 눈을 마주치고는 아무런 반응 없이 무덤덤하게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휴.”
다행히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하긴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초월자가 직접 손을 써줬는데 간파할 수 있을 리가.
“왜 갑자기 한숨 쉬냐?”
아슬아슬하게 제 시각에 맞춰 나타난 레이첼이 내 옆자리에 앉으면서 말을 걸어왔다.
“한숨은 무슨.”
대충 시치미를 떼고 넘어갈 생각이었지만 녀석은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는지 눈가를 가늘게 뜨면서 기분 나쁘게 실실 웃기 시작했다.
“다 봤거든? 샤론이랑 눈 마주쳤는데 저쪽에서 먼저 시선 돌리니까 한숨 쉰 거잖아.”
그걸 그새 다 봤다고?
아니 애초에 봤으면서 왜 묻는 건데.
대답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해 무시로 일관하려 하니 옆에서 자꾸 팔꿈치로 옆구리를 찌르며 귀찮게 구는 레이첼.
“야. 이 누님은 다 아니까 그냥 솔직히 말해. 샤론한테 차인 게 그렇게 슬퍼? 아주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던데.”
“아니. 난 너 좋아하는데.”
우뚝. 갑자기 모든 행동을 정지한 레이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뻥이야.”
그렇게 나를 놀려댔으면 반대로 자기가 당하는 것도 받아들여야지.
생각보다 격렬한 반응에 입꼬리를 히죽 올리며 비웃어주었다.
그러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레이첼이 부들부들 떨더니 대뜸 내 멱살을 붙잡고 마구 흔들어댔다.
“죽어! 그냥 죽으라고!!”
“억! 으어어···.”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그녀를 말리려 했으나 내 입에서는 인간의 언어가 아닌 소리만이 흘러나올 뿐이었다.
‘여자가 뭔 힘이 이렇게 세!?’
다행히 중간에 나타난 율리아가 끼어 들어준 덕분에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진짜 죽었을지도 몰라.
율리아는 레이첼을 진정시킨 뒤에 눈빛을 반짝거리며 조잘조잘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얘기의 주제는 당연히···.
“그거 들었어? 어젯밤 궁전에 괴도가 또 나타났대!”
내 얘기였다. 아카데미 제일의 모범생이자 대귀족의 장녀가 사실은 범죄자를 찬양하는 광신도 집단인 괴도 추종자의 수장이라니. 과연 이 사실을 누가 믿을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이 떠들어댔으면 이제 반 아이들도 율리아가 괴도에 대해 얘기하는 걸 그러려니 받아들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특히 레이첼은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대놓고 시큰둥한 태도로 대답했다.
“뭐? 그런 얘기 못 들었는데. 신문에도 안 나왔고.”
“당연히 극비로 숨기는 거지! 궁전이 또 털렸다는 소식이 퍼지면 민심이 바닥을 칠 테니까!”
“근데 너는 그 극비 내용을 무슨 수로 알고 있는데?”
“···어? 그 그건···.”
율리아의 말문이 탁 막혀버렸다.
그 대답은 내가 대신해줄 수 있다. 그녀는 괴도 추종자로서 내 행적을 좇는 데 진심이거든. 본인과 조직원들의 능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나에 관한 소문을 수집한다고 들었다.
솔직히 이쯤 되면 좀 무서울 정도다. 혁명 조직으로 변모하는 건 무사히 막아냈지만 그 대가로 정말 사이비 종교 단체가 되어버린 느낌은 착각일 뿐인 걸까.
“그런데 샤론이 왜 안 오지?”
평소와 달리 자리에 앉아 책만 읽고 있는 샤론을 보며 걱정스럽게 중얼거리는 율리아.
반면 레이첼은 딱히 걱정되지 않는지 하품을 쩍 내뱉으며 대답했다.
“냅둬. 지가 심심하면 알아서 오겠지.”
그 말에 나는 샤론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설마···.
들킨 건 아니겠지···?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병원에 갔다온 뒤로 손목이 좀 나아졌어용!
오늘부터는 더 열심히 써서 연재주기 회복해볼게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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