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12
도로시의 얘기를 듣고 나서 무언가 크게 변하지는 않았다.
오이디푸스의 예언.
자신에게 예정된 미래를 피하기 위한 발버둥이 오히려 비극적인 최후의 원인이 되는 경우를 일컫는 표현.
간략한 설명만 들어도 친숙하게 느껴질 만큼 창작물에서 자주 사용되는 클리셰다.
그녀는 지금 내 상황이 그와 비슷할 수도 있다고 넌지시 경고했다.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렇다고 막상 문제를 해결할 명확한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만약 내가 도로시의 경고를 듣고 지금에라도 모든 일을 때려치운다고 가정해보자.
애초에 그 행동 자체가 비극적인 최후라는 예언으로 향하는 길일 수도 있다.
즉 예언을 알게 된 시점에서 무슨 짓을 해도 의미 없는 발버둥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물론 그거 하나 때문에 포기하고 내팽개칠 수는 없었다.
당장 오이디푸스의 예언이 정말 사실인지도 미지수이지 않은가.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당연히 예언을 피하려 최대한 몸부림쳐보는 게 옳은 선택이리라.
밤이 어두워진 가운데도 쉽게 잠들지 못하고 한참을 고민하고 있자 내가 심란해하고 있음을 눈치챈 건지 침낭에서 고개만 쏙 내뺀 도로시가 나지막이 얘기했다.
“일반적으로 예언은 신조차 피할 수 없는 절대적인 인과율의 결과지만 그렇다고 예언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에요.”
방법이 있다고? 흘려들을 수 없는 내용에 나는 몸을 돌려 도로시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는 내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시선을 살짝 피하며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갔다.
“예언을 말장난으로 만드는 거죠.”
“말장난?”
“보통 예언들은 내용이 구체적이지 않고 모호하게 표현되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러니까 적당히 엉터리 해석이 가능하도록 끼워 맞춰서 예언이 성취됐다고 우기는 거죠.”
나는 작게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게 진짜 가능해요?”
“많진 않아도 신화 속에서 그런 내용도 분명 있어요. 진짜 가능할지야 저도 모르지만 적어도 가능성은 있다는 거죠.”
“흠···.”
예언을 엉터리로 해석해서 우기는 말장난이라···.
좀 떨떠름하긴 해도 만약 가능하다면 이보다 좋은 해결법은 없겠지. 나는 그녀가 알려준 방법을 진지하게 고민해보기 시작했다.
일단 예언의 내용부터 떠올려보자. 도로시의 말대로라면 예언이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모호한 내용이어야 한다.
사실 자세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기억나지는 않는다. 단지 끔찍한 최후라는 키워드만이 뇌리 깊숙이 각인되었을 뿐.
그렇다면 끔찍한 최후를 비틀어야 한다는 건데 뚜렷한 방법이 당장 떠오르진 않았다.
도로시한테 예언의 내용을 털어놓고 도움을 구해야 하나?
‘···아니.’
그건 섣불리 결정하긴 힘든 문제였다. 그렇게 세부적인 내용까지 남한테 공개했다가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그녀를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여신님도 내 운명에 관여하기 힘들다고 못 박은 상황에서 도로시가 큰 도움을 줄 거라고 기대하긴 어려웠다. 당장 이렇게 힌트를 제공해준 것만으로 과분한 은혜를 받은 상황이니까.
지금 당장은 나 혼자서 해결하려 시도해보고 정 안 되면 마지막 수단으로 도움을 청하는 게 합리적인 선택지였다.
확고한 행동 방침을 정하고 난 뒤에야 간신히 잠들 수 있었다. 비록 밤잠을 설쳐서 일어났을 땐 눈 밑이 퀭하긴 했지만.
아침 일찍 일어나 다시 탐색을 이어갔다. 남은 장소는 총 세 곳. 각각의 거리가 상당해 돌아오는 시간까지 고려하면 오늘 하루 안에 끝낼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을 정도로 아슬아슬한 상황이었다.
“여기도 아닌 것 같네요.”
북쪽으로 올라가며 정오 즈음에 한 곳을 더 조사했지만 그곳 역시 우리가 찾아 헤매던 아스러진 신전이 아니었다. 그로부터 반나절쯤이 지나 도착한 10번째 장소.
남은 신전이 얼마 되지 않을수록 더더욱 꼼꼼하게 살펴보았으나 이번에도 도로시의 대답은 이전과 똑같았다. 고개를 덤덤히 가로젓는 반응에 절로 한숨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이제는 정말 마지막 장소만 남았다. 이곳 말고도 도로시가 알지 못하는 숨겨진 신전이 더 있을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시간상으로도 한곳을 둘러볼 정도의 여유밖에 남지 않았다.
즉 여기마저 아니라면 아무런 성과도 없이 런던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상황이다.
나름대로 충분한 여유를 가지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신전을 찾는 게 이렇게나 힘들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만약 다시 돌아가서 비비안한테 더 자세하게 물어본다면 순순히 알려줄까?
아마 그렇게 바라는 대로 잘 풀릴 가능성은 희박하리라. 신의 분노를 피하려 일부러 최대한 적은 정보만을 건네준 것 같았으니까.
어쩔 수 없다. 설령 이번에 못 찾는 한이 있더라도 다음에 한 번 더 아일랜드에 와서 또다시 찾아보는 수밖에.
마지막 장소는 해가 저물어 넓은 평야가 노을빛으로 물들어갈 때 도착하였다.
그곳은 신전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만큼 세월의 풍파에 휩쓸려 원래의 모습을 거의 잃어버린 상태였다.
남아있는 거라곤 허물어가는 신전 공터에 우뚝 솟은 거대한 나무 한 그루뿐.
신전을 꼼꼼히 살펴보던 도로시는 이번에도 역시나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면서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신전의 정보를 특정할 만한 정보가 거의 없어요. 훼손이 심하게 된 것도 있지만 애초에 이 신전의 주인분 자체가 화려함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나무 앞에 세워진 묘비가 유일한 단서예요. 여기 그려진 까마귀는 보통 신화에선 죽음이나 지혜를 상징하는 경우가 많죠. 시간이랑 관계가 있을 가능성은 적어요.”
“······.”
줄줄 이어지는 그녀의 설명에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멍하니 넋을 놓은 채 눈앞에 보이는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나무의 앞에 놓인 묘비 하나.
지역도 시간도 계절도 다르다.
하지만 이곳은 내 기억 속에 뿌리내린 그 날과 소름 돋도록 일치했다.
틀림없다. 여긴 내가 여신님을 처음 만났던 장소였다.
‘어째서?’
머릿속에 의문이 가득 차올랐다.
이곳은 바다 건너의 아일랜드인데 어떻게? 그 당시의 내가 아무리 정처 없이 오랫동안 떠돌아다녔다고 하더라도 브리튼을 벗어났을 리는 없다. 정확한 위치를 기억하고 있지는 않지만 절대 아일랜드는 아니었었다.
애초에 무언가 이상하다. 나는 여신님의 신전이 아니라 시간의 신을 만나러 바다 건너 아일랜드까지 왔던 건데. 어떻게 딱 마지막 장소에서 이 장소를 발견한다는 말인가?
우연이라기엔 너무나 공교로웠다. 마치 이 모든 게 처음부터 짜여있던 각본인 것처럼.
어쩌면 지금 이 순간도 예언으로 향하는 운명의 굴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현듯 무심코 넘겨버렸던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비비안에게 아스러진 신전에 관한 얘기를 들었던 당시 그녀는 스쳐 지나가듯이 한마디를 덧붙였었다.
거기에 가면 곧바로 알 수 있을 거라고.
과연 그녀가 말하고자 했던 의미가 이게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그 말은 사실이었다.
이곳을 내가 못 알아볼 리가 없으니까. 보자마자 무조건 알아차릴 수밖에 없는 풍경이었으니까.
목적지를 찾은 것 같은데 명쾌하게 해결되긴커녕 훨씬 더 혼란스럽기만 했다. 정말로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게 맞는지 그렇다면 하양이에게 권능을 내려준 시간의 신이 여신님이란 뜻인지 헷갈렸다.
이건 나 혼자 고민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가장 확실한 답을 듣기 위해 나지막이 그녀를 불렀다.
“여신님.”
당장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그에 굴하지 않고 꿋꿋이 말을 이어나갔다.
“듣고 계신 거 다 알고 있어요. 끝까지 입 다무실 생각이에요?”
[···그런 건 아니란다.]
“왜 그러는 건진 몰라도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끝까지 숨기는 건 불가능하잖아요. 전부 얘기해주세요.”
[그래. 얘기해주마. 네가 궁금해하는 것들 모두.]
아일랜드로 향할 때부터 여신님이 갑자기 침묵해버린 게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이런 이유 때문일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지금 가장 궁금한 것은 여신님과 하양이가 무슨 관계냐는 거였다.
도로시가 말하길 신은 오직 한 명의 사도만을 선택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여신님이 정말로 시간의 신이라면 나와 하양이 둘 다 사도로 임명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초월자를 권속으로 삼는 건 별개로 취급되는 건가? 아니면 내가 모르는 다른 무언가 있는 걸까.
온갖 가능성을 추측하며 머리가 지끈거리는 와중 내 옆에 있던 도로시 또한 당황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무 무슨 일인가요? 방금 목소리는 어디서 들려온 거예요?”
“···여신님의 목소리가 들려요?”
다른 사람은 못 듣던데? 왠지 모를 위화감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찰나 갑자기 움직임을 우뚝 멈춰 서버린 도로시가 고개를 푹 숙였다.
“도로시···?”
조심스레 이름을 부르자 이내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단순한 착각인 걸까? 고개를 숙였다 들어 올린 짧은 순간에 그녀의 눈빛이 급변하였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뮹뮹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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