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13
분명 도로시의 눈동자는 선명한 오렌지색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와 전혀 다른 어두운 검푸른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저 빛깔은 상당히 익숙하게 느껴졌다. 내가 괴도로 활동하며 너무나 자주 봐왔던 색상이니까.
어디서 봤는지를 말하라면 셀 수 없을 정도지만 그중 하나만 꼽자면 까마귀의 눈동자라고 말할 것이다.
즉 지금 도로시의 몸을 차지한 것은 여신님이었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물었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내 물음에 도로시는 덤덤한 어투로 대답했다.
“걱정하지 말거라. 이 아이에게 해를 끼칠 생각은 없으니까. 단지 너와 나눌 이야기를 다른 제삼자가 듣지 못하도록 조처한 것뿐이란다.”
즉 도로시의 몸을 빼앗은 이유는 그녀가 우리의 대화를 들을 수 없게 하기 위해서란 건가.
“어떻게 하신 거예요? 능력 직접 못 쓰시는 거 아니었어요?”
여신님이 내게 보석을 모아달라고 부탁한 이유가 무엇이었나.
그 보석에 담긴 힘을 되찾기 위해서였다. 보석을 전부 되찾기 전에는 신으로서 권능을 다룰 수 없기에 내가 대신 그 힘을 일부 사용하면서 계속 강화해왔던 거고.
“이곳은 내 신전이니까. 적어도 이 안은 중간계와 분리된 나만의 공간이라 할 수 있는 셈이지.”
“그런 건가요?”
“그런 거다.”
순간적으로 침묵이 찾아왔다.
여신님은 내가 궁금해하는 것들을 전부 알려주겠다고 했으니 물어보기만 하면 순순히 대답해줄 것이다.
그런데 뭘 질문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너무 이해할 수 없는 점들이 많아서 그걸 명확한 질문으로 정립하기조차 쉽지 않았다.
의문투성이로 가득 찬 머릿속에서 간신히 하나를 끄집어내 물어보았다.
“···여기가 제가 찾던 신전이 맞나요?”
“그렇다고도 할 수 있고 아니라고도 할 수 있지. 네가 찾던 아스러진 신전은 맞지만 이 신전의 주인은 시간의 신이 아니니까.”
안 그래도 복잡해 죽겠는데 대답까지 참 헷갈리게도 해주시네.
일단 여신님이 시간의 신이 아니란 건 확실한 모양이다. 애초에 이건 처음부터 어느 정도 예상했던 답변이라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만약 그녀가 시간의 신이었다면 사도로 선택된 나도 마술을 사용하는 괴도가 아니라 하양이처럼 시간에 관련된 능력을 받았었을 테니까.
“그럼 비비안은 왜 저한테 여기로 가라고 한 거죠? 저는 분명 시간의 신에 관해 물어봤었는데요.”
“내가 시간의 신과 아는 사이이기 때문이다.”
또 애매한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여신님의 대답을 곱씹으며 천천히 생각해보았다.
말 그대로 단순히 아는 사이일 뿐이라면 굳이 비비안이 그렇게 알려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여신님과 특별한 사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합리적이겠지.
“혹시 두 분은 친구였나요···?”
“아니 가족이었다. 그 녀석은 내 여동생이거든.”
생각지도 못한 관계에 눈을 깜빡였다.
하긴 신화에서 신들끼리 가족인 경우도 종종 있으니까. 생각해보니 종종 있는 수준이 아니라 거의 근친으로 맺어져 있지 않나? 그건 그리스 신화만 그런 건가?
“나는 밤과 거짓의 신이었다.”
오. 설마 여신님이 이렇게 순순히 관장하는 영역을 밝힐 줄은 몰랐다.
그래도 대충 전부터 짐작하던 느낌에 부합하는 능력이었다.
마술이라는 요소 자체가 거짓에서 기인한 것이며 어두울 때 힘이 강해졌던 걸 떠올리면 밤이라는 요소도 납득이 가니까.
“그럼 여신님은 어디 신화 출신인 거예요?”
내가 신화를 잘 몰라서 한번에 알아차릴 수 없다는 게 아쉬웠다. 도로시라면 관장 영역을 듣자마자 정체를 알아차렸을 텐데.
“딱히 그런 건 없다.”
“네? 진짜로요?”
“애초에 지역 신화로 신을 구분 짓는 건 인간의 분류일 뿐이다. 실제 신들은 그보다 훨씬 복잡한 관계로 얽혀 만물 전체를 다스리고 있으니까. 흔히 알려진 신의 이름조차 인간이 부르기 편하도록 자기들의 입맛대로 갖다 붙인 꼬리표에 불과하단다.”
세상에. 이건 쉬이 믿기 힘든 굉장히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제우스도 진짜 이름은 제우스가 아니라는 거잖아? 우리가 아는 신화의 가장 기본 개념이 박살 나버릴 정보인데. 도로시가 이 얘기를 들었으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궁금할 정도다.
“그럼 여신님도 인간 사이에서 불리던 이름이 있어요?”
“그야 물론이지. 너도 이름만 대면 알 법한 아주 유명한 신들도 있단다.”
“네? 신들이요?”
“말하지 않았느냐. 지역 신화란 것 자체가 인간들의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며 왜곡된 거라고. 전혀 다른 신화의 신들이 사실 하나의 동일신인 경우는 셀 수 없을 정도란다.”
들을수록 더 경악스러운 내용이 이어진다. 그럼 제우스랑 오딘이 동일 인물이라던가 하느님과 부처가 같은 신이었다는 식의 전개도 가능하다는 거잖아.
이건 못 참겠다. 나중에 도로시가 깨어나면 한번 물어봐야지.
“그럼 여신님이 처음 만났을 때 알려주셨던 이름은···. 어라?”
자연스럽게 얘기를 꺼내다 갑자기 툭 끊겨버리고 말았다.
···내가 여신님의 이름을 알고 있었던가?
어째선지 머릿속이 지끈거리던 와중 도로시의 몸을 빌린 여신님은 나를 안타까운 눈길로 쳐다보며 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이마를 부여잡고 눈살을 찌푸리다 천천히 진정을 되찾았다.
“어 저희가 어디까지 얘기했었죠?”
“전혀 다른 신화의 신이 동일신인 경우가 많다고 했었다.”
“우와. 진짜 신기하네요.”
이제 뭘 물어봐야 하지?
아 여신님이 너무 흥미진진한 얘기를 해주느라 막상 원래의 목적을 잠시 까먹고 말았다.
“그럼 시간의 신은 여신님의 동생이라는 거죠?”
“그래.”
“혹시 불러주실 수 있나요? 아니면 대화만이라도 괜찮으니까.”
“아마 그건 힘들 것 같구나.”
예상외의 답변에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왜요?”
“그 아이와 나는 그리 원만한 관계가 아니거든. 지금은.”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어요?”
내 조심스러운 질문에 여신님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내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나는 제법 장난기가 심한 편이었다. 그래서 크고 작은 사고도 많이 치고 다녔지.”
그거야 딱히 놀랍지도 않았다.
말투만 점잖을 뿐 하는 짓은 말한대로 장난기 넘치는 사고뭉치에 가까웠으니.
당장 내가 봐왔던 여신님도 맨날 하렘을 연호해대는 변태이지 않았던가. 사실 그뿐만이 아니라 하루 24시간 내내 붙어있다 보니 언제 어디서든 옆에서 쫑알쫑알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편이었다.
요새는 입을 다물고 있는 탓에 오히려 허전했달까. 늘 떠들어대던 여신님이 사라지니 좀 쓸쓸하기도 했었다.
“그래서 동생한테 미움받은 거예요?”
“비슷한데 좀 다르다. 평소처럼 사고를 치던 와중에 내 모습을 관찰하던 동생의 흥미가 동해버린 거다. 그래서 나를 따라 사고를 쳐버렸지. 제법 거하게 말이다.”
“···음. 동생한테 귀감이 되셨어야죠.”
여신님은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렇게 얘기하는 걸 보면 동생이 진짜 사고를 거하게 쳐버린 건가? 신의 장난이면 어느 정도 규모일지 가늠이 안 잡혔다.
“그래서요?”
“세상이 멸망할 뻔했다.”
“···에?”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문제였기에 누군가는 대가를 치러야 했지. 그래서 나는 동생을 대신해 죗값을 받았고 덕분에 지금 이런 상태가 된 거다.”
그런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나는 내심 여신님이 어떤 다른 신과 싸워서 힘을 잃은 게 아닐까 짐작했었는데 설마 본인이 스스로 죗값을 치러서 이런 상태가 됐을 줄이야.
신이라는 존재가 겨우 지팡이에 깃들어서 버려져 있던 걸 생각하면 너무 가혹한 처사인 거 아닌가 싶다가도 세상이 멸망할 뻔했다는 얘기를 들으니까 그럴만한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사연을 들어도 이해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얘기만 들었을 땐 두 분의 사이가 나쁠 이유는 없지 않나요? 오히려 동생분이 여신님께 고마워하면 몰라도.”
“그 부분이 참 난처한 내용인데 말이지. 내가 그 아이에게서 제일 소중한 존재를 빼앗아갔거든.”
들을수록 반전의 반전이 넘쳐나네.
“···합당한 이유가 있는 거죠?”
“물론. 내 동생이 사고를 친 이유이자 세상을 멸망시킬 뻔한 존재가 그거였으니까. 다른 선택지가 없었어.”
얘기를 듣고 나니 확실히 난처한 상황이긴 했다.
세상이 멸망할 뻔했는데 자기가 아끼는 물건을 빼앗겼다고 삐진다는 게 좀 철없어 보이긴 했지만 애초에 시작은 여신님이 먼저 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시간의 신은 그런 여신님의 행동을 보고 따라 한 것뿐이라고 했으니.
대충 이해는 했는데 결국 뭔가 해결된 건 하나도 없는 느낌이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여신님께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시간의 신님한테 제 운명에 관해 물어보려 했는데 역시 무리겠죠?”
“···아니. 가능할 거다.”
“네? 하지만 그분은 여신님을 싫어한다면서요. 그럼 당연히 사도인 저도 싫어할 텐데요.”
“너는 괜찮다.”
나는 괜찮다고?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적인 대답에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뭔가 더 명쾌하게 설명해줬으면 좋겠지만 여신님은 짧은 단답만을 끝으로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그럼···. 시간의 신을 만나게 해주세요.”
여신님은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듯이 몇 번이나 입을 우물거렸지만 결국 별다른 얘기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 요구를 받아들여주었다.
“그래. 그러마.”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엄청난 떡밥..!
엄청난 반전..!
엄청난 뮹뮹..!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