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16
“괜찮으냐?”
생각에 잠겨있던 와중 들려오는 여신님의 목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안색이 좋지 않구나. 혹시 얘기하면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거냐?”
저 모습이 어떻게 가짜란 말인가. 나를 쳐다보는 눈빛이 거짓일 수 있다는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믿기지 않았다. 너무 현실성이 없어서 오히려 더 헷갈렸다.
시간의 여신은 대체 무슨 의미로 내게 그런 경고를 남긴 걸까. 정말로 여신님이 나를 속이고 있다는 뜻일까.
내가 곧바로 대답하지 않자 여신님은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와 내 안색을 살폈다.
이대로면 의심을 살 것 같아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대답했다.
“아니에요. 그냥 살짝 피곤해서요.”
“내면세계에 들어가는 건 집중력을 요구하는 일이니. 게다가 오늘 내내 움직였지 않느냐. 피로가 많이 쌓였을 거다.”
언제나처럼 똑같이 자상한 여신님이었다. 살짝 짓궂은 면이 있긴 해도 그마저 미워할 수 없는 평소와 다름없는 여신님이었다.
“얼른 돌아가 봐야겠네요. 내일 아카데미도 가려면.”
“음. 지금 바로 출발해야 시간에 맞출 수 있겠구나.”
여신님은 그리 말하고는 자신의 몸을 슬쩍 내려다보며 쓴웃음을 머금었다.
“잠시 빌린 거라 해도 오랜만에 육체를 가지니 좋구나. 이 아이에게는 나중에 따로 감사를 전해야겠어.”
“···도로시도 여신님한테 몸을 빌려준 걸 알면 좋아할 거예요.”
그녀가 상당한 신화 덕후임을 생각하면 가문의 영광으로 여기며 대대손손 자랑해대도 이상하지 않다.
“두 발로 땅을 딛고. 두 눈으로 풍경을 담고. 두 귀로 세상의 소리를 읽고. 코로 밤공기를 마시고. 입술로 너와 얘기할 수 있다는 건 정말 좋은 일이야.”
그렇게 말하며 여신님은 환하게 미소 지었다. 나도 모르게 움찔해버릴 만큼 아름다운 웃음이었다.
“어쩌면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너와 함께라면 그것도 좋을 것 같아.”
어째선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순간만큼은 내게 웃어 보이는 여인이 도로시가 아니라 그 속에 있을 낯설면서도 친숙한 여인으로 보였다.
그녀의 머릿결은 별빛이 수놓아진 밤하늘처럼 은은히 빛나는 남색이었다.
나는 순간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여신님.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음. 무엇이냐?”
“왜 저를 선택하신 건가요?”
지금에 와서는 확실히 깨닫고 말았다. 내가 여신님과 마주친 첫 만남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의 신전은 바다 건너 아일랜드에 있었다. 런던에서 무작정 걸어 나갔던 그 당시의 내가 마주할 수 없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나는 죽음의 끝자락에서 이곳과 똑같은 풍경을 목격하였다.
정확히 어떻게 한 건지는 몰라도 여신님의 의도였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왜 여신님은 많고 많은 사람 가운데서 굳이 나를 골라 사도로 삼은 걸까?
어쩌면 그 정답에 거짓의 여신을 조심하라는 아까의 경고가 적용되는 건 아닐까?
내 질문에 그녀는 입을 다물고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애써 눈을 돌리고 어색하게 침묵하길 잠시 여신님은 나지막이 대답을 흘려보냈다.
“약속했으니까.”
“···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대답에 얼떨떨하게 되묻자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내 말문을 틀어막았다.
“지금 당장은 더 얘기해주기 힘들단다. 나중에 전부 알려줄 테니 조금만 기다려주렴.”
약속. 약속이라니. 누구와의 약속?
몇 번이나 답을 곱씹어봐도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결국 의문에 휩싸인 채 억지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제 다시 그 반지 속으로 돌아갈 시간이구나.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는 건 이 아이한테도 좋지 않을 테니까.”
여신님은 그렇게 말하며 가슴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살포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가 내 안으로 다시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직전까지 허전했던 빈 공간이 따스하게 채워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음. 역시 여기가 내 집처럼 안락한 기분이구나. 아주 포근해.]
한편 눈을 감은 채로 가만히 서 있던 도로시는 이내 정신이 돌아왔는지 몇 차례 눈을 깜빡이며 어리둥절한 모습을 보였다.
“여긴···.”
“괜찮아요?”
혹시 부작용이 있지는 않을까 살짝 걱정하며 안부를 물었는데 다행히 겉으로 보기엔 멀쩡한 듯했다.
“방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나세요?”
“그게 이게 꿈인지 모르겠는데 뭔가 어렴풋이 떠올라요. 어떤 되게 예쁜 여신님이 제 몸을 잠시 빌리겠다고 하고서는···.”
횡설수설하며 본인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떠들어대는 모습에 여신님이 진심으로 감탄했다.
[대단하구나. 어렴풋하게나마 기억해낼 줄은 몰랐는데.]
‘대단한 거예요?’
[그렇고말고. 신격을 잘 받아들이는 체질이란 뜻이니 신의 사랑을 받을 확률이 높겠구나.]
확실히 그런 거라면 도로시에게 있어선 무엇보다도 좋은 일이리라. 여신님이 해준 얘기를 들려주면 기뻐서 방방 뛰지 않을까 싶을 정도. 정말 그런 반응을 보여준다면 얘기하고 싶다는 욕구가 마구마구 샘솟는다.
아무튼 도로시는 띄엄띄엄 여신님이 빙의한 이후까지 기억해냈다. 나와 나눴던 구체적인 대화의 내용은 떠올리지 못했지만 여신님의 정체나 나와의 관계 정도는 얼추 알아차린 것 같았다.
“정말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이에요! 이런 기회를 주셔서 감사드려요!”
“감사 인사는 제가 해야죠. 도로시 씨가 도와주지 않았으면 여기를 찾지도 못했을 거예요.”
이건 진심이었다. 여신님은 자기의 신전인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알려주지 않았으니 도로시가 아니었으면 결국 아스러진 신전을 찾지도 못한 채 런던으로 터덜터덜 돌아갔겠지.
“그럼···. 저희는 여기서 헤어지는 거네요.”
도로시는 아쉬운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나도 물론 그녀와 더 시간을 보내며 그간의 여정을 기념하며 자축하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시간이 없었다.
지금 당장 정거장으로 달려가 야간열차를 타지 않는다면 내일 아침 등교에 늦고 말 것이다.
“다음에 시간 될 때 사무실로 놀러 갈게요.”
“정말이죠···?”
“그럼요.”
그렇게 언질을 주고받은 뒤에야 겨우 마음이 풀렸는지 도로시는 방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렇게 또 한 명의 여자를 꼬시는구나. 아주 훌륭하도다.]
“······.”
평소처럼 여신님의 영양가 없는 헛소리가 덧붙여졌지만 거기에 딴지를 걸기엔 지금 내 마음이 너무 심란했다.
도로시와 인사를 나눈 뒤 현재 위치에서 제일 가까운 마도공학 정거장으로 이동했다.
정거장 위치를 어떻게 찾아야 하나 걱정했는데 멤버십 카드에 정거장 지도가 등록되어 있던 덕분에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깊은 밤 아무도 없는 열차 칸에 탑승해 자리에 앉은 다음 사색에 잠겼다.
이러고 있으니 예전에 파리에 갔다 돌아오던 길이 떠올랐다. 그때도 지금처럼 한밤에 바다를 건너고 있었지.
당시에는 예언의 마녀가 말했던 끔찍한 최후를 맞이할 거란 운명에 충격을 받았었다.
나는 그저 괴도로 살아가면서 새로운 삶을 즐길 생각뿐이었는데 무거운 돌덩어리가 가슴에 쿵 하고 내려앉은 기분이었다.
그런 나를 위로해줬던 것이 여신님이었다. 그녀 덕분에 나는 안심하고 잠들 수 있었다.
[지금 자놓지 않으면 나중에 피곤할 거다.]
여신님은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나를 걱정해주었다. 변한 것은 전혀 없었다.
다만 내가 그녀를 온전히 믿지 못하게 되었을 뿐이다. 이게 멍청한 짓이란 걸 알면서도 시간의 여신이 해줬던 경고를 그냥 무시할 수가 없었다.
둘 중 누군가는 나를 속이고 있다. 그렇다면 당연히 여신님을 믿는 게 옳은 일이다.
시간의 여신과는 오늘 처음 만난 사이이며 심지어 여신님과 껄끄러운 관계란 것도 알고 있으니.
그냥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나와 여신님의 사이를 이간질하기 위한 계략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지금 당장은 그렇게 생각하며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어차피 답이 나오지도 않을 문제를 계속 끌어안고 있다간 결국 그 무엇도 믿지 못하게 될 것 같았으니까.
“여신님.”
[말하거라.]
“무슨 일이 있어도 저와 함께 있어 주는 거죠?”
나는 창밖에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 위로 떠오른 밤하늘의 별빛들을 바라보며 어리광을 피우듯 그녀에게 물었다.
여신님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때처럼 내게 품을 벌려주며 대답했다.
[물론. 나는 끝까지 너를 떠나지 않을 거란다.]
끝이라. 내 끝은 과연 어디일까?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되는 걸까.
어쩌면 그 끝이라는 지점이 머지않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는 이전처럼 여신님의 품에 기대 간신히 눈을 감았다.
***
“뭐냐. 너 설마 또 밤새웠음?”
레이첼이 축 널브러진 나를 힐끗거리며 물었다.
“그냥···. 좀 피곤하네.”
너무나 당연하게도 나는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까딱 잘못했으면 지각할 뻔했던 탓에 아직도 정신이 없었다.
“쯧쯧. 그러다 내일도 밤잠 새면 큰일 나는 거 알지?”
“응···?”
“뭐냐. 그 반응은. 설마 까먹은 거?”
레이첼은 진심이냐는 듯이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내일 수학여행이잖아.”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허거덩!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