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18
하양이의 대답은 분명 어딘가 이상했다.
그냥 넘기기 힘든 강렬한 위화감에 하양이를 붙잡고 질문들을 쏟아부었다. 거의 기진맥진해질 만큼 한계까지 몰아붙였으나 그 이상의 별다른 단서는 얻을 수 없었다.
결국 확실하게 거둔 정보는 단 한 가지였다.
하양이는 나를 처음 만난 사람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즉 내가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그 어떤 사람도 만난 적이 없다는 뜻이었다.
언뜻 생각해도 뭔가 많이 이상한 얘기였다. 아직 의사소통이 100% 완벽히 되는 게 아니다 보니 내가 잘못 오해 했을 가능성도 없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하양이가 나를 처음이라고 인식하는 건 확실해 보였다.
하지만 그건 말이 안 된다. 하양이는 나를 만나기 이전에 프랑켄을 만나 마도공학 기술을 개발할 수 있도록 도와줬으니까.
이건 시간의 여신이 직접 보증한 만큼 의심의 여지 없는 불변한 진실이었다.
서로 어긋나 모순되는 두 가지 상황을 말이 되도록 하나의 시나리오로 만들어야 한다. 어쩌면 바로 거기에 내가 그토록 궁금해하던 진실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당장 떠오르는 가장 그럴듯한 가능성은 하양이의 기억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
그렇다고 한다면 얼추 말이 되었다. 정확한 기간은 모르지만 하양이는 시간도 흐르지 않는 이 거울 세계 속에서 상당히 오랫동안 갇혀 있었을 테니 그로 인해 기억을 잃어버린 게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오퍼레이터가 무슨 수를 쓴 것일 가능성도 있다. 그는 하양이가 세계를 멸망시킬 위험한 존재라며 경계하고 있으니 기억을 전부 없애버리는 편이 조금이나마 안전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르니까.
그게 아니라면···. 솔직히 당장 떠오르는 다른 가능성은 딱히 없었다.
아무래도 답을 찾기 위해선 하양이와의 완벽한 의사소통이 먼저 해결돼야 할 것 같다.
나는 하양이를 복잡미묘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내가 어쩌다 이런 특이한 꼬맹이랑 엮여서 이렇게 골머리를 싸매야 하는 건지.
일단 오늘은 처음 들어올 때부터 조금만 있다가 떠나기로 정해놓았으니 슬슬 돌아가기로 했다.
여기에 계속 남아있어봤자 문제가 해결되긴커녕 두통만 더 심해질 게 뻔했으니까.
딱히 작별 인사는 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내가 바깥세상에 있는 동안 거울 세계의 시간은 흐르지 않으니 하양이는 내가 사라졌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손거울을 통해 다시 내 방으로 돌아온 뒤 침대에 털썩 누워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쩜 이렇게 산 넘어 산인지. 날이 갈수록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수수께끼들이 무서울 정도로 쌓여가고 있었다.
제일 무서운 사실은 주변을 둘러싼 문제들이 모두 중심에 존재하는 한 가지 진실로 수렴하는 듯한 느낌이 자꾸만 든다는 것이다. 그 끝에 무엇이 존재할지는 아직 섣불리 단정 지을 수 없지만 나와 관련이 있다는 것만큼은 이쯤 되면 확실한 듯했다.
아니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 굳이 내가 찾아 헤매지 않아도 예언의 내용대로 운명이 내게 알아서 찾아올 테니까.
지금은 차라리 머리를 말끔히 비우고 심신을 다잡는 편이 좋을 것 같다.
그래. 마침 내일부터 수학여행이니 오히려 좋게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간만에 모든 구속을 벗어던지고 아카데미의 학생으로서 순수하게 수학여행의 청춘과 낭만을 즐기는 거다.
어차피 아카데미 학생들이 다 같이 가는 일정에서 무슨 일이 생길 리도 없지 않은가?
[흠. 꼭 그렇게 말하면 무슨 사건이 생기던데 말이야.]
“불안하게 그런 말 하지 마시죠.”
차마 여신님의 예언 아닌 예언에 부정은 하지 못한 채 애써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길함을 억누르며 눈꺼풀을 닫았다.
부디 내일 떠오르는 햇살 속에서의 여정은 아무 고난 없이 평온하기만을 바라면서.
나는 그렇게 잠에 빠져들었다.
***
다음 날.
우리 반은 평소와 달리 아카데미가 아니라 런던 정거장 앞에서 조례를 시작했다.
오늘의 출발 일정은 먼저 런던에서 열차를 타고 해안 도시인 도버까지 이동 거기에서 크루즈선을 타고 프랑스 북부 항구 도시인 칼레까지 이동한다. 거기에서 또 열차를 타고 파리까지 직행하는 것이다.
원래 지구에선 몇십 년 안에 도버와 칼레를 잇는 해저 터널이 개통되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렇지 않다 보니 다소 갈아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고급 크루즈선도 타게 되었으니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이득이라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실제로 반 아이들 역시 그 덕분에 매우 들떠있는 상태였다.
“들었어? 우리가 탈 여객선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배래!”
“진짜? 그럼 첫 번째는?”
“나도 자세히는 모르는데 우리나라가 아직 만드는 중이라고 들었어. 이름이···. 타이타닉이었던가?”
별로 친하지 않은 여자애들 둘이 속닥거리는 얘기를 우연히 엿듣다 식겁하고 말았다.
그 이름이 왜 거기서 나와···? 그러고 보니까 시기상으로는 얼추 맞는 것 같기도 하다.
만약 오늘 우리가 타고 가는 배가 그 이름이었으면 생각만 해도 아찔했겠네.
아무튼 세계 제일이라 평가받는 런던 마법 아카데미의 수학여행이라 그런지 이동 수단도 범상치 않았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크루즈선이라니. 심지어 첫 번째인 타이타닉은 아직 완공 전이라니 사실상 첫 번째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렇게 좋은 배를 고작 몇 시간 동안 해협을 건너는 용도로만 이용해도 괜찮은 건가?
막말로 크루즈 선상에서 3박 4일을 보내도 학생들은 전부 만족할 것 같은데.
뭐 좋은 게 좋은 거겠지. 어쨌거나 우리는 설렘으로 부푼 마음을 안고서 열차에 탑승했다.
4명씩 나뉘는 열차 칸에 자연스럽게 모여든 환상의 사인조.
따로 모이자고 말도 안 했는데 너무 자연스러워서 딱히 놀랍지도 않았다.
당연하다는 듯 내 옆자리를 차지한 레이첼은 어울리지 않게 꽤 신난 모습이었다.
항상 저렇게 귀여운 얼굴로 있어 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내 속마음을 읽은 것처럼 그녀는 갑자기 인상을 홱 찌푸리며 내 옆구리를 툭툭 쳐댔다.
“야. 뭔 생각 중이냐?”
“···응? 아무 생각 안 했는데.”
“씁. 수상한데. 그건 됐고! 혹시 마법으로 움직이는 열차가 있다던데 들어본 사람?”
여기서 갑자기 마도공학에 관한 얘기가 나올 줄이야.
사실 마도공학 기술 자체는 딱히 극비도 아니었다. 오히려 돈이 될 만한 사업에는 가리지 않고 뛰어들어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다.
단지 열차의 탑승권은 멤버십에 가입한 VIP에게만 나눠주니 일반인은 열차를 구경할 기회가 없을 뿐이었다. 실제로 나도 마녀 씨가 처음에 탑승권을 양도해주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엮일 일도 없지 않았을까.
그렇다 보니 마도공학 열차에 관해 설명해줘도 딱히 문제 될 건 없었다.
하지만 그 기술이 세계를 멸망시킬 시발점이란 얘기를 듣고 난 이후부턴 왠지 껄끄럽게 느껴진달까. 괜히 엮여봤자 좋지도 않을 테니 그냥 얌전히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근데 진짜 크루즈선은 어떻게 대여한 거야? 아무리 아카데미가 돈이 많다고 해도 그게 가능하나?”
하긴 듣고 보니 의아하긴 했다. 물론 아카데미의 자본력이라면 푯값을 감당할 수야 있겠지만 굳이 많은 돈을 써가며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수학여행의 메인 테마가 크루즈 여행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파리까지 가기 위해 단순히 몇 시간 거리를 건너려고 최고급 크루즈를 타다니. 사치가 심해도 너무하지 않은가.
“설마···. 율리아 네가 한 짓은 아니지? 가문의 힘을 이용해서···.”
“아니거든!”
레이첼의 나름 그럴듯한 추리를 율리아가 단칼에 부정해버렸다. 솔직히 나도 꽤 가능성 있다고 생각했는데. 우리가 의심스러운 눈길로 쳐다보자 율리아는 한숨을 내쉬며 얘기했다.
“그게 아니라 원래 배가 그렇게 이동할 예정이었대. 그래서 우리는 남는 자리에 덤으로 탑승하는 거고.”
“응? 그 정도 크루즈가 고작 그 거리를 움직인다고? 차라리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로 가는 거면 모를까.”
“무슨 보석을 프랑크의 왕한테 건네주러 가는 거라 들었어.”
질문을 던질 때마다 너무 술술 대답이 잘 나오자 우리는 멍하니 율리아를 바라보다 동시에 물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아···. 그게 아버지한테 여쭤봤거든. 나도 똑같이 의심해서···.”
아 대충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율리아도 우리처럼 그레이스가 뒤에서 움직인 게 아닌가 의심한 것이다. 율리아의 아버지는 상당한 딸바보이니 가능성이야 충분했으니까.
그나저나 프랑크의 왕한테 건네줄 보석이라니. 얘기만 들어도 절대 평범한 수준은 아닐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훔칠 생각이니?]
‘여신님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요?’
[네 편한 대로 하려무나. 오늘은 휴가라고 했으니 푹 쉬어도 된단다.]
‘흠···.’
솔직히 궁금하긴 하다. 그래도 여신님의 말처럼 괜히 귀찮을 일에 휘말리고 싶지도 않은데.
무엇보다 이번에는 수학여행인지라 샤론도 바로 옆에 있다는 점이 꽤 거슬렸다. 당장 지금도 맞은편에 앉아있고.
별다른 반응 없이 무덤덤하게 창가만 바라보는 그녀를 힐끗 살폈다.
일단 배에 올라타서 상황을 좀 지켜볼까?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감기 때문에 며칠 동안 계속 훌쩍거린 거에용..
그래도 오늘은 푹 쉬었더니 좀 나아졌어용..!!
독짜님들도 다들 감기 조심하세용!!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