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19
“우와···.”
누구의 것인지 모를 감탄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목소리의 주인을 특정하는 건 큰 의미가 없는 행동일 것이다. 배를 처음 눈에 담은 순간 누구나 예외 없이 감탄을 터뜨리기 바빴으니까.
잔잔한 바닷가의 부두에 정박해있는 크루즈는 생각했던 이상의 덩치를 자랑했다.
21세기에 살았던 현대인의 관점으로도 쉽게 보기 힘든 수준이라 단언할 수 있었다.
깔끔한 디자인의 외관만 보아도 덩치뿐만 아니라 내부 시설 또한 범상치 않을 거란 짐작이 갔다.
막연하게 상상만 하던 순간이 구체적인 현실로 빚어지니 학생들의 설렘도 이전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크기를 키워갔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현대 문물을 경험했다 하더라도 이렇게 고급스러운 크루즈에 타볼 만큼 좋은 인생을 산 건 아니었으니까.
시간이 되자 선원들이 앞으로 나와 티켓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단체로 온 아카데미 일행 또한 한 명씩 꼼꼼하게 체크를 한 뒤에야 승선할 수 있었다.
“조심히 탑승하십시오!”
우리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크루즈에 올라탔다.
짠 바다 냄새와 뜨거운 햇살 거기에 끼룩대는 갈매기 소리까지.
그야말로 너무나 이상적인 크루즈 여행의 시작이지 않은가. 이런 값진 추억을 고작 몇 시간밖에 즐기지 못한다는 게 너무나 아쉬울 따름이었다.
심지어 나흘 뒤에 돌아올 땐 다시 탈 수도 없다고 한다. 율리아가 설명했듯 이 크루즈는 어디까지나 보석을 실어나르는 김에 우리도 덤으로 태워 가는 것뿐이었으니.
좀 섭섭하긴 해도 이해는 갔다. 보석의 주인으로선 큰돈 들이지도 않고 마법사들을 호위로 써먹는 셈이니까. 그 누가 이 배 위에서 절도를 저지르겠는가? 그런 의미에선 서로 윈윈하는 좋은 전략이었다.
단지 그들이 한 가지 놓친 점이 있다면 그 아카데미 학생들 가운데 나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뿐. 이 중에 괴도 레이븐이 섞여 있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보통 런던 내에서만 활동하였으니 말이다.
“자자 얼른 들어가서 본인이 배정된 방에 짐들 풀렴! 도착할 때까지는 자유 시간이지만 선원들의 통제에 잘 따라야 한단다!”
선생님의 말씀에 아이들은 모두 환호했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단어 중 하나가 바로 자유 시간 아니겠나. 심지어 이런 호화 크루즈에서의 자유 시간이라니 말할 것도 없었다.
사실 짐을 풀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고작 3시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객실에 틀어박혀서 휴식을 취하는 아이들이 얼마나 있겠나. 다들 갑판 위로 나와서 바다를 구경하고 선실 내부에 마련된 온갖 휴양 시설을 즐기기에 바쁘지.
우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배정된 객실은 대충 물품 보관함 정도로 대충 짐만 던져놓은 다음에 곧바로 갑판으로 나와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을 감상했다.
“와···. 이렇게 보고 있으니까 진짜···. 우읍···!”
율리아가 아련한 눈빛으로 바다를 바라보다 갑자기 입을 틀어막고 헛구역질을 해댔다.
바다의 경치에 감탄한 게 아니라 뱃멀미 때문에 힘겨워하고 있던 모양이다.
그 모습을 목격한 레이첼은 깔깔 웃어대며 손가락질해댔다.
“푸흡! 대귀족 아가씨가 더럽게 토를 해대면 되나!”
“안 했거든···!?”
“뭐 어때 꼴을 보니까 결국 하겠구만.”
나는 율리아의 안쓰러운 몰골을 보고 고개를 내저었다.
바다는 매우 아름답지만 멀미에 약한 사람들에게는 바다가 끔찍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차멀미는 괜찮다 해도 바다 위에선 파도가 24시간 내내 넘실대기 때문에 훨씬 멀미가 심하게 찾아오니까.
“최대한 시선을 멀리 둬봐. 파도의 흔들림은 최대한 무시하고 수평선 끝자락에 집중하면 좀 나을 거야.”
“후우···. 응. 고마워.”
내 조언에 맞춰 율리아는 난간을 붙잡은 채 최대한 먼 곳을 응시했다.
저런다고 마법처럼 한번에 좋아지진 않겠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나아질 것이다.
다행히 좀 괜찮아졌는지 표정이 꽤 밝아진 것 같다.
“우웨엑.”
“아.”
밝아진 게 아니라 창백해졌던 거였구나.
결국 율리아는 멀미를 참지 못하고 바다 위에 자신의 흔적을 뿌리고 말았다. 난간을 얼마나 세게 붙잡았는지 손이 하얗게 질려버릴 정도였다.
생각보다 뱃멀미를 심하게 하는 율리아 때문에 덩달아 지켜보는 우리의 표정도 걱정으로 물들고 말았다.
“정 안 되겠으면 객실에 들어가서 눈이라도 붙이는 게 어때?”
“그래도 모처럼 크루즈에 탔는데···.”
“어차피 넌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탈 수 있잖아.”
말투는 좀 틱틱대더라도 레이첼 또한 율리아를 염려하고 있었다. 결국 율리아도 무작정 버텨봤자 해결될 문제가 아니란 걸 깨달았는지 초연하게 현실을 받아들였다.
“크로 말대로 객실에서 좀 쉬고 있을게···. 너희는 나 신경 쓰지 말고 재밌게 즐겨. 레이첼 말대로 어차피 난 언제든 또 탈 수 있으니까.”
“막상 본인이 그렇게 말하니까 좀 재수 없네.”
레이첼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비틀거리는 율리아의 옆에 서서 그녀를 부축해주었다.
“내가 데려다 놓을 테니까 너희는 적당히 시간이나 때우고 있어.”
“···나 혼자 갈 수 있는데.”
“웃기고 있네. 가다가 또 토사물이나 잔뜩 쏟아내겠지.”
“······.”
귀족에게 하기엔 무례에 가깝다고 느껴질 만큼 적나라한 표현이었으나 딱히 틀린 말은 아니란 걸 본인도 느꼈는지 율리아는 얼굴만 붉힐 뿐 별다른 부정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이 갑판에서 사라지고 나니 엉겁결에 샤론과 단둘만 남게 되어버렸다.
무슨 얘기를 하면 좋을지 몰라 어색한 침묵이 흐르던 와중 평소와 달리 의외로 그녀가 먼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아까 율리아가 말했지. 이 배에 보석이 있다고.”
아까 열차에서 다 함께 나눴던 내용이니 잡담의 주제로 별달리 이상하지도 않지만 그 말을 샤론이 먼저 꺼내니 어쩐지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것도 사실이었다.
나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했다.
“응. 그랬었지.”
어차피 내가 여기서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상대도 내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을 리 없다.
무엇보다 지난번 삼격 필살 문양 덕분에 오히려 내 알리바이가 더 튼튼해졌으니 어지간해선 그녀가 날 의심 선상에 올려놓지는 않을 것이다.
“궁금하지 않아?”
“뭐가?”
“보석 말이야. 어떤 보석이길래 브리타니아에서 프랑크 왕국으로 건너가는 걸까. 심지어 왕한테 진상한다던데.”
자꾸만 샤론의 질문이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마치 내가 보석에 관심을 품고 있는지 유도하는 느낌이라고 할까. 혹시 아직도 내가 괴도일지 모른다는 의심을 지우지 않은 걸까?
아무래도 조금 더 주의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최대한 신중하게 답을 골라내었다.
“나도 궁금하긴 한데. 뭐 어쩌겠어. 직접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보러 갈래?”
순간적으로 침묵이 찾아왔다.
혹시 잘못 들은 건가 싶어 옆을 바라보았으나 샤론은 초록색 눈동자를 빛내며 내 대답을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보러 가자니. 그게 무슨 뜻이야?”
“너도 궁금하다고 했잖아. 나도 마찬가지거든.”
“보석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는 거야?”
사실 안 그래도 배에 올라타기 전부터 보석을 훔쳐볼까 고민하고 있긴 했다. 하지만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은 데다 옆에 아이들까지 붙어있을 테니 기회가 생기지 않는다 싶으면 그냥 순순히 포기하려 했었다.
그런데 설마 그녀가 먼저 내게 보석을 보러 가자고 제안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심지어 난 아직 짐작도 하지 못한 보석의 위치를 벌써 전부 파악해놓았단 말인가.
하지만 내 예상과 달리 샤론은 덤덤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모르는데.”
“···보석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 보러 가자고? 애초에 선원들이 못 보게 막지 않을까?”
너무나 합리적인 물음이었다. 아무나 탑승할 수 없는 초호화 크루즈에 모셔가고 일국의 왕에게 진상할 예정일만큼 값진 보석을 일개 학생한테 함부로 보여줄 리가.
“직접 찾아서 몰래 보면 되지.”
이쯤 되니 살짝 무서워질 지경이다. 대체 뭘 생각하고 있길래 갑자기 저런 식으로 나온단 말인가.
설마 처음부터 전부 계획된 건 아니겠지? 율리아의 뱃멀미로 두 사람이 자리에서 빠져나가는 것까지 싹 다 의도된 거라면···.
그런 말도 안 되는 음모론까지 고민하게 될 만큼 샤론의 태도는 분명 이상했다.
그녀가 여태 보여줬던 모습하고는 너무나 다른 이색적인 행보에 나는 진심을 담아 물어보았다.
“왜 그렇게까지 보석을 보고 싶어 하는 거야?”
그 말에 샤론은 나를 빤히 바라보다 입꼬리를 미세하게 올리며 대답했다.
“궁금해졌거든.”
이상했다.
분명 보석에 대한 답을 한 것일 텐데 어째서인지 그 말이 나를 향한 것만 같이 들렸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몸을 사리겠다는 본래의 계획과 달리 무심코 충동적으로 대답을 내놓고 말았다.
“그래. 한번 찾아보자.”
나도 궁금해졌으니까.
네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이야.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뮹뮹 이제 감기 다 나은 거에용!
부활인 거에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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